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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보감

작성자
busong
작성일
2018-02-06 20:25
조회
140
인천보감 (人天寶鑑) 은 세상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일들을 모은 것으로서, 주로 승려들
의 이야기이며 유교와 도교에 관계되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도 수집하여 편집한 책이다.
편집자인 담수 (曇秀) 스님은 서문에서 이 책을 편집한 의도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하나는 옛 사람들의 훌륭한 일을 널리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비석이나 어록, 짧
은 기록, 또는 직접 들은 이야기들을 시대의 앞뒤없이 보이는대로 기록하였으며, 이것은 대
혜스님의 정법안장 (正法眼藏) 을 본따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선 (禪) 을 닦는 이들이 오로지 선만을 주장하는 폐단을 경계하고 옛 사람들은 선과
율 (律) , 그리고 유교와 도교까지도 널리 터득하였음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담수스님이 사명 (四明) 절강성 (江省) 에 주석하던 소정 (紹定) 3년 (1230) 에
스스로 서 (序) 를 쓰고, 난정 유비 (蘭庭劉 ) 의 서 (序) 와 고잠 사찬 (古柝師贊) 의 발
(拔) , 그리고 영은사 묘감 (妙堪) 의 착어 (着語) 를 붙여서 2권으로 간행하였다.
옛부터 중국 총림에서는 이 책을 선림 7부서 (禪林七部書) 중의 하나로 높이 평가하고 있
다.
인천보감의 내용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로 수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인물이 불교의 스
님들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천태종 스님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맨 처음에 소개되는 담광법사 (曇光法師) 에서부터 열번째인 사명지례 (四明知禮) 에 이르
기까지 모두 천태종과 관련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122단락 중에서 천태종에
관계되는 것이 약 40개이니 거의 13이나 되는 셈이다.
여기 수록된 천태종 스님들의 법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이 법계도를 통해서 보면 이들은 모두 이른바 산거파 (山居派) 인 사명지례의 법손이며, 그
중에서도 선종과의 접근을 강조한 남병 (南屛) 의 후손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어떤 스님
들은 법계가 분명하지 않아서 법계도에 들어가지 못한 분들도 있지만 이 법계도에서 볼 때
맨 마지막에 있는 북봉인 (北峯印:1148∼1213) 은 인천보감이 편집되기 불과 17년 전에 입
적하였다. 그러나 선종의 스님으로서 담수 (曇水) 스님에게서 가장 가까운 시기의 스님은 불
조 덕광 (:1121∼1203) 인데 약 50여 년 이전의 일이다.
둘째는 스님들이 속해 있는 종파에 따라 호칭에 차이가 있다. 즉 선종에 속한 스님은 선사
(禪師) , 율종계통은 율사 (律師) , 그리고 천태종 계통은 법사 (法師) 라 하여 종파가 분명
히 구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태종 초기의 스님인 남악 (南嶽) 의 경우에는
「남악선사'라고 한 경우도 있다.
셋째는 선종과 천태종 스님들과의 교류를 비롯하여 다른 종파간의 교류에 대한 언급이 많
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종경록 (宗鏡錄) 에 대한 이야기로서 끝맺는데, 종경록은 선과 교,
천태, 유식, 화엄 등을 하나의 근원인 일심 (一心) 으로 귀결시키고 있는 책이다.
인천보감을 편집한 담수 (曇秀) 스님에 대해 살펴보면 그는 임제종 대혜파인 소옹 묘담
(:1177∼1248) 의 법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천보감에는 천태종 산
거파의 스님들이 거의 모두 수록되어 있고, 또 북봉인스님까지 수록된 점으로 보아 담수스
님은 이들과 관계가 깊은 분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사찬 (師贊) 의 발문에서 보면 "사명 땅 선객 담수공은……인천 (人天) 의 안목을 열
어주었기에 보감 (寶鑑) 이라 이름짓고 원각사 (圓覺寺) 로 달려가 간행하고자 하였다"고 적
고 있는데, 본문 속에 소개된 원각사 (No.93) 는 천태종에 속한 절이다.
담수스님이 인천보감을 간행하기 위해 찾아간 원각사와 본문 중의 원각사와의 관계, 나아가
담수스님과 천태종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 더 연구해 봐야 할 것이다.

인천보감 (人天寶鑑) 서 (序)

옛분들에게 있었던 훌륭한 일들이 세상에 밝혀지지 못하는 것은 후학의 잘못이라고 들었
다. 3교 (三敎) 의 훌륭한 분들 중, 불교에서는 한마디 말씀 한 가지 행이 모두 비석이나 어
록, 단편 등에 실려 있으나 사방에 흩어져 있어 빠짐없이 볼 수가 없다. 그리하여 덕스러운
이가 묻혀서 혹은 들어보지도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항상 총림에 드나들면서 더러는
큰스님들의 법문 중에서 듣기도 하고 혹은 찾아다니면서 구하기도 했는데, 모두가 의지를
북돋아주고 후세의 거울이 될 만한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때그때 기록해 둔 것이 총 수백
토막이 되었는데, 그것을 「인천보감 (人天寶鑑)」이라고 이름붙였다. 여기서 인물에 등급을
매기거나 선후를 나누지 않았으니 대혜 (大慧) 스님의 ‘정법안장 (正法眼藏) '을 본땄다.
옛날에는 선을 닦는 자들도 누구나 경학과 율법을 공부하였고 경율을 하는 자들도 모두 힘
써 선을 닦았으며, 나아가 유가나 노자의 도에서도 터득하여 철저히 깨달았다. 지금처럼 한
가지 방법만 오로지 하고 한 가지 맛에만 빠져 마치 어울릴 수 없는 물과 불처럼 서로를 헐
뜯지는 않았다. 아! 옛분들의 행이 어려운 것이 아닌데,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를 비하해서
옛분들을 쫓아갈 수 없다고들 하니, 그들은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같은 사람인 줄을 너
무도 모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스스로 분발하는 이가 있다면 옛분들과 무엇이 다르랴.
이제 이 책을 간행하여 이 내용을 널리 펴는 것은 후학에게 보여서 그들이 선배들의 모범을
알아 모두 도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이니, 고명한 분들은 나무라지 마소서.

소정 (紹定) 3년 (1230) 결제일에,
사명 (四明) 사문 담수 (曇秀) 는 서문을 쓴다.


서 문 (2)
이 책의 내용은 모두 불가(佛家) 의 묘약이며 세상을 구제하는 것으로, 병자에게 먹이면 곧
병이 낫게 되고 심지어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름발이까지도 낫게 할 수 있다.
사명도인(四明道人) 담수(曇秀:송대 임제종) 스님이 오랫동안 강 건너, 바다 건너 다니면서
이 약을 골고루 맛보았는데 번번이 효험을 보았다.
때문에 마땅히 간행하여 길이 후손에게 복을 내려주려 하는 것이니,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서문을 쓴다.

소정(紹定) 경인년(1230) 6월 보름
난정 유비(蘭庭劉斐) 는 쓴다.


발 문 ⑴

옛 사람은 마음 닦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마음 닦는 바른 행은 생각과 말에서 벗어나
지 않는다. 그래서 도를 세상에 알려 후생에게 모범이 되려 하는데, 여기에 어찌 선종 율장
교학, 유학 불교 도교의 차이가 있겠는가. 지극히 공정하면 천하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이다.
사명 (四明) 땅 선객 담수공 (曇秀公) 은 여기에 두터운 뜻을 두고서 총림을 두루 다니며
현묘한 기연을 빠짐없이 봐오면서 가는 곳마다 보고 들은 바를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 이
책이 인천 (人天) 의 안목을 열어주었기에 「보감 (寶鑑)」이라 이름짓고 원각사 (圓覺寺)
로 달려가 간행하고자 하였다.
이는 선배들의 감추어진 덕과 숨겨진 빛을 밝혔을 뿐 아니라 장차 동지와 더불어 힘써 이
길을 따르고자 함이다.
나는 그의 말을 가상히 여겨 마침내 책 말미에 발문을 쓰는 바이다.

때는 소정 (紹定) 경인 (1230) 7월 14일, 고잠비구 사찬(古柝比丘 師贊) 은 만수사 (萬困寺)
귀운당 (歸雲堂) 에서 쓰노라.

발 문 ⑵

담수 (曇秀) 서기가 옛 일을 모아 책으로 엮어서 이를 「인천보감」이라 하고 나에게 평
〔着語〕 을 청하기에 한마디 써 주었다.

옛 스님의 사정을 알고 나니 부끄럽기만 한데
우물 속에 빠진 몸이 어찌 난간에 기어 오를 수 있으랴
본래 한 점의 마음은, 태양처럼 밝은데
변방사람인지 본토사람인지를 비춰 본 적 있으랴.
先德情知巳厚顔 那堪落井更攀欄
本來一點明如日 胡漢何曾自照看

소정 (紹定) 경인 (1230) 8월,
영은사 (靈隱寺) 주지 묘감 (妙堪) 이 쓰다.



1. 승보 /담광(曇光) 법사

당나라 덕종(德宗:779∼805) 이 담광(曇光) 법사에게 물었다.
“스님네들을 어째서 보배라 합니까?"
담광법사가 대답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스님네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그 모두를 보배라 합니다.
첫째는 스스로의 마음을 단박에 깨쳐서〔頓悟〕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분
을 선승(禪僧) 이라 합니다. 둘째는 이해〔解悟〕 와 실천〔修行〕 을 동시에 행하여 세간
흐름에 들어가지 않은 분을 고승(高僧) 이라 합니다. 셋째는 계(戒) ·정(定) ·혜(慧) 를 고
루 갖추어 설법솜씨가 뛰어난 분을 강승(講僧) 이라 합니다. 넷째는 견문이 깊고 알차서 옛
일로 지금일을 검토하는 분을 문장승(文章僧) 이라 합니다. 다섯째는 인과(因果) 를 알고 자
비와 위엄을 함께 쓰시는 분을 주사승(主事僧) 이라 합니다. 여섯째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
여 부처종자를 기르는 분을 상승(常僧) 이라 합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마침내 천하에 조서를 내려 승려되는 것을 허락했다
「당승전 (唐僧傳)」

2. 법화선문 /대선(大善) 선사

대선(大善) 선사는 남악(南嶽) 선사의 상수제자로서 법화선(法華禪門) 을 닦아 자비삼매
(慈悲三昧) 를 얻었다. 당시 형양내사(衡陽內史) 정승고(鄭僧曠) 는 현령 진정업(陳正業) 에
게서 스님의 덕을 칭찬하는 말을 늘 듣기는 했었지만 믿음을 낼 생각은 없었다. 하루는 진
정업과 함께 사냥을 나가서 사슴 한 떼를 포위하게 되었다. 정승고가 진정업에게 물었다.
“그대가 늘 대선스님은 자비삼매력이 있다고 하였는데, 오늘 저 사슴들은 어떻게 할 것인
가?"
진정업이 좌우 몇 사람을 거느리고 함께 소리 높이 “나무대선선사"를 염하니 즉시 뭇사슴
들이 하늘로 치솟아 포위망을 벗어났다. 그러자 정내사는 부끄러워하며 굴복하였다.
「국청석각 (國淸石刻)」

3. 두타행 /좌계 현랑 (左溪玄朗)

좌계존자 (左溪尊者) 의 법명은 현랑 (玄朗:673∼754, 천태종 제5조) 이며 조상 (鳥傷) 사
람이다. 천궁사 (天宮寺) 혜위 (慧威) 법사에게 불법을 배워 종지를 얻고 바위산 골짜기에
숨어 살았는데, 원숭이가 열매를 따가지고 와서 발우에 바치기도 하고 날아가던 새가 와서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비구에게 필요한 열 여덟 가지 물건만을 가지고 12두타 (十二頭陀) 를 행하면서 30년을 이
렇게 살았으며, 세세한 수행과 몸가짐까지도 모두 계율을 따랐다. 이화 (李華:당나라 문인)
는 스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누구에게 선법을 전해 준 적도 없고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계율을 청정히 지
켜 흠이 없었고 외모에 신경쓰지 않았다. 경을 강의해도 대중이 많기를 기대하지 않았으며,
고단한 줄 모르고 학인을 지도했다. 구석진 집에 살면서 두 가지 반찬있는 밥을 먹지 않았
다. 경전을 공부할 때 말고는 밤에 등불을 켜지 않았고, 낮에도 부처님 상호를 우러러 예불
할 때 말고는 한 발짝도 쓸데없이 걷지 않았다. 가사 한 벌로 40년을 지냈고 깔방석 한 장
을 죽을 때까지 갈지 않았다. 이익 때문에는 한마디도 법문한 적이 없고, 터럭만큼도 불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재물을 받은 일이 없는 분이다." 「본전 (本傳)」

4. 자기 부처 /무상 (無相) 선사

오대산 무상 (無相:684∼162) 선사가 예불하고 대중에게 법문하였다.
“그대들은 진흙부처를 보았다 하면 절구에 쌀을 찧듯 절만 하고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으
니, 자기 몸에 부처님이 한 분씩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다. 허공을 타고온 많은 석가와
관음이 밤낮으로 그대들의 육근에서 빛을 내뿜고 땅을 흔든다. 거닐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사이에 언제나 함께 드나들면서 실오라기만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 부처님
에게 예불드리고 배우지 않고 도리어 흙덩이한테 가서 살길을 찾고 있느냐. 그대들이 이 부
처님에게 예불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에 예불드리는 것이다. 그대들 마음이 비록
뒤바뀐 헛된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본디부터 지금까지 넓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미혹하다
하나 한번도 미혹한 일이 없었고, 깨달았다 하나 한번도 깨달은 일이 없어 부처님보다 조금
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다만 바깥경계에 탐착하여 생멸과 미오 (迷悟) 가 있게 되었으니,
만일 한 생각에 회광반조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옛스님은 말
하였다.
부처가 자기 마음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밖에서 찾고 있네. 값을 칠 수 없는 보배를 속에 지
니고도 일생을 쉴 줄 모르네.'
또 화엄수 (華嚴遂) 법사의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내가 마음이 본래 성품임을 깨닫고 나니 지금의 모든 수행과 동정 (動靜) 이 본래 성품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게 수행 〔道〕 과 이치 〔理〕 가 부합하는 까닭에 종일토
록 예불해도 예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종일토록 염불해도 염불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다.'
자, 말해 보아라. 화엄스님은 어떻게 이것을 알아냈겠는가? 마치 선재동자 (善財童子) 가 비
로자나 누각에 들어가 불가사의하고 자재한 경계를 깨친 것과 같다. 선재동자는 마지막 경
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110성 (城) 을 돌아다니며 53선지식을 찾아뵈었다. 그러면서 갖가지 경계를 보고 온
갖 법문을 들어보았으나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꿈속에서 온갖 일을 보지만 꿈을
깨고 나서야 그것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도력 높은 선사들과 선재동자는 비록 꿈속에서는 소소영영함을 얻었지만 여전히 오음 (五
陰) 경계에 떨어져 있다. 만일 정수리에 눈이 있고 팔꿈치에 부적이 있다면 석가와 미륵도
마른 똥막대이고 문수 보현도 땅에 가득 찬 범부일 뿐이다. 또한 진여와 열반도 나귀 매는
말뚝이고 일대장경도 고름 닦는 종이니, 무슨 들어갈 누각이 있고 깨칠 경계가 있겠는가. 혹
이렇게 못한다면 남의 꿈 속에서 한번이고 두번이고 절해야 할 것이다."
「통행록 (通行錄)」

5. 조계 근원 /덕소 (德韶) 국사

천태산 (天台山) 덕소 (德韶:891∼972, 법안종) 국사는 처주 (處州) 용천 (龍泉) 사람이
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매서운 의지로 선지식을 찾아 도를 물었으나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조산 (曹山) 에 와서는 대중에 묻혀 살았는데, 한번은 한 스님이 법안 (法眼) 스님께 묻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어떻게 하면 단박에 온갖 인연을 쉴 수 있겠습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공 (空) 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색 (色) 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더냐? 공이 인연을 맺
는다고 한다면 공이란 본래 인연이 없는 것이다. 색이 인연을 맺는다고 한다면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일상생활에 어떤 물건이 그대에게 인연을 맺는다는 말이냐?"
덕소스님은 그 말을 듣고 머리끝이 쭈해지며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또다
시 어떤 선객이 물었다.
“무엇이 조계 (曹溪) 근원의 물 한 방울입니까?"
법안스님이 말씀하셨다.
“이것이 조계 근원의 물 한 방울이로구나."
덕소스님은 듣고서 확실히 깨쳤다. 법안스님께서 “그대는 앞으로 우리 종지를 널리 펼 사
람이니 이곳에 지체하지 말라" 하시므로 마침내 천태산을 돌아다니시다가 그곳이 좋아 그곳
에서 생애를 마칠 생각을 가졌다.
당시 오월 (吳越) 의 충의왕 (忠懿王) 이 왕자의 신분으로 태주 자사 (台州史) 로 있었다.
그는 스님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한번은 사람을 보내 스님을 맞이하여 제자의 예를 올렸다.
왕은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에게 목이 잘리는 꿈을 꾸었는데 놀람과 의심이 풀리지 않아 마
침내 스님께 해몽을 부탁하였다. 스님은 비상한 꿈이라면서, 주 (主) 자에서 점 하나를 없앴
으니 곧 왕이 될 것이라고 하자, 왕은 과연 말씀같이 된다면 부처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였다. 건우 원년 (乾祐元年:948) , 충의왕은 임금자리를 물려받고 스님을 높이 받들어 국
사로 모셨다.
당시 회창 (會昌) 의 법난 (845) 때문에 천태 지자 (天台智者) 대사의 교법이, 큰스님들은
빛을 감추고 저술들도 대부분 해동 (海東:고려) 으로 흘러갔었다. 나계 의적 (螺溪義寂:919∼
987, 천태종 중흥조) 법사가 앞으로 불법을 들을 수 없게 됨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여 힘써
모아 보았으나 우선 금화사 (金華寺) 장경각에서 「유마경의소 (維摩脛義疏)」 한 질을 찾
았을 뿐이었다. 그 뒤 충의왕이 불경을 읽다가 내용 〔敎相〕 에 막혀 스님께 법문을 청하
였다. 스님께서는 의적을 천태종의 종지에 훤히 통한 사람이라 칭찬하니 왕이 마침내 의적
스님을 불러 강원을 세웠다. 왕이 기뻐하여 특별히 열 사람의 사신을 바다 건너 파견하여
경전을 베껴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이 다시 일어나 지금까지 땅에 떨어지지 않으
니, 그것은 덕소스님과 의적스님의 덕택이라 하겠다.
개보 (開寶) 4년 (972) 6월 28일 천태산 (天台山) 화정봉 (華頂峯) 에서 입적하셨는데, 이
날 밤 별이 땅에 떨어지고 하늘에서 큰 눈이 내렸다. 스님께서 열반하실 때 보인 신비한 징
조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법등 (法燈:?∼974) 선사의 「행업 (行業)」 등 글에 자세
하게 실려 있다.

6. 소금 한 줌 /지자 지의 (智者智 )

지자 지의 (智者智 :538∼579, 천태종의 개조)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나와 같이 공부하던 조 (照) 선사는 남악 (南嶽) 선사 회중에서 고행과 선정이 가장 뛰어
난 사람이었다. 그가 한번은 대중의 소금 한 줌을 공양 때 마실 물에 쓰고는 줄어든 양이
얼마 되지 않아서 개의치 않았다. 그 뒤 방등참법 (方等懺法) 을 닦는데 홀연히 어떤 모습이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그 한 줌 소금이 3년 동안 몇 십 섬으로 불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황급히 시자들을 시켜 자기 옷과 살림살이를 팔아 소금을 사서 대중에게 빚을 갚았다.
이 일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전해들은 바도 아니니 이것을 거울삼아 후회 없도록 해야
한다. 나는 비록 덕행이 적은 사람이지만 멀리서 가까이서 자못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간에 염령 (嶺) 이 가로막혀 걸어오기가 어렵다. 그래서 늙고 병든 사람들이 드나들 경우
에는 대부분 대중의 노새로 맞이하고 보내며, 내게 오는 손님은 개인적으로 수고비를 지불
하여 피차 허물이 없게 하였다.
나는 대중의 주지이고 노새도 내것이었으나 이미 대중에게 희사한 이상 이제는 내것이 아니
다. 내 맘대로 쓸 수는 없다 해도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말을 하겠는가. 이것은 하나의 예를
든 것에 불과하나 다른 일도 모두 마찬가지다." 「국청백록 (國淸百錄)」

7. 무작계 (無作戒) / 택오 (擇梧) 율사

도솔사 (兜率寺) 택오 (擇梧) 율사는 보령 (普寧) 율사에게 공부하였는데, 몸 단속이 엄
격하였으며 하루 한 끼 공양에 예불 독송을 끊임없이 하였다.
한번은 경산 (徑山) 유림 (維琳) 선사에게 도를 물었다. 유림선사는 택오율사가 계율에만
마음을 두어 도를 통하지 못함을 보고는, 계율에 몸이 묶여 있으니 가슴이 답답하지 않느냐
고 놀렸다. 택오율사가 “저는 마음 〔根識〕 이 어둡고 둔해서 매이지 않을 수 없으니, 스
님께서 가엾게 생각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유림선사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바수반두 (婆修盤頭) 존자는 하루 한 끼 공양에 눕지도 않고 지내며 하루 여섯 차례씩 예
불하였다. 이렇게 청정무구하여 대중들에게 귀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20조 (祖) 사야다
(儷夜多) 존자가 그를 제도하고자 하여 바수반두의 문도들에게 물었다.
“이 두타승이 청정행을 열심히 닦아 부처님이 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렇게 열심히 정진하는데 어째서 부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대들의 스승은 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정진해 가지고는 티끌 겁이 지나도 모두 허
망의 근본이 될 뿐이다."
바수반두의 문도는 분한 마음을 내지 않고 사야다에게 물었다.
“존자께서는 어떤 덕행을 쌓았기에 우리 스승을 비난하십니까?"
“나는 도를 깨치려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잘못 〔顚倒〕 되지도 않는다. 나는 예불하지
도 않지만 그렇다고 부처님께 오만하거나 가볍게 굴지도 않는다. 장좌불와 (長坐不臥) 하지
않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도 않는다. 하루 한끼만 먹는 고행을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아
무거나 식탐을 내지도 않는다. 나는 만족도 탐욕도 없다. 이렇게 마음 둘 곳 없음을 도라고
한다."
바수반두는 이 말씀을 듣고 무루지 (無庄智) 를 얻었다.

유림선사는 큰 소리로 할을 한 번 하고서 말하였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둔한 놈이다."
택오율사는 이 말끝에 마음이 활짝 트여 껑충껑충 뛰면서 절하고 말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으면 어찌 잘못을 알았겠습니까. 지금부터는 지키면서도 지키
지 않는, 지킨다는 생각이 없는 계율 〔無作戒〕 을 지키겠으며, 더이상 애써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작별하고 떠났다. 방장실로 돌아와서 익혀 왔던 수행을 다 버리고 그저 선상 (禪
床) 만을 지키며 법문하는 일 말고는 묵묵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갑자기 하루 저녁은 명
정 (明靜) 법사를 불러서 말하였다.
“경산스님께서 내게 망정과 집착을 타파해 주신 뒤 지금껏 가슴 속에 아무 일도 없다. 오
늘밤에는 무성삼매 (無聲三昧) 에 들어가겠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가 없더니 마침내 영영 누우셨다. 「통행록 (通行錄)」

8. 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 진종 (眞宗) 황제

송나라 진종 (眞宗:996∼1022) 황제가 한번은 태평흥국사 (太平興國寺) 를 없애 창고를 만
들려고 하였다. 조서가 내리던 날, 한 스님이 절을 없애서는 안된다고 꼿꼿하게 말하였다.
황제는 중사 (中使) 를 보내면서 “절을 없애라는 명령을 듣지 않으면 목을 베어라" 하고는
칼을 뽑아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그 중이 칼을 보고 겁이 나서 떨거든 목을 베고, 그렇지 않거든 용서해 주어라."
중사가 명령대로 하였더니 그 스님은 웃으면서 목을 쓱 내밀며 말했다.
“불법을 위해 죽는다면 실로 달갑게 칼을 핥겠다."
황제가 기뻐하여 폐사를 면했다.
한자창 (韓子蒼) 이 말했다.
“지금 세상에도 이와 같은 스님이 있다니 참으로 납자라고 할 만하다."
「석문집 (石門集)」 "

9. 대중은 없어도/ 법창 의우 (法昌倚遇)

법창선원 (法昌禪院) 의 의우 (倚遇:1005∼1081, 운문종) 선사는 임장 (臨 ) 고정 (高亭)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큰 뜻을 품고 사방을 돌아다녀 총림에 이름을 날렸다. 부산 법원
(浮山法遠) 선사는 스님을 두고 행각하는 후학들의 본보기라고 하였다.
만년에는 분령 (分寧) 북쪽 천산만학 가운데 담이 무너진 옛 집에 은거했다. 간혹 납자들이
찾아와서는 모두 고된 일을 힘들어 했는데도 스님은 한 마디도 자상하게 문도들에게 가르쳐
준 일이 없었는데, 학인들은 스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 담담하고도 힘겨운 생활을 견딜
수 없어 모두 그곳에서 떠나버렸다. 결국 혼자 산에 머물게 되었는데, 새벽에 향 피우고 저
녁에 등불 밝히며 법당에 올라 설법하는 일을 늙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고, 총림에서 하는
법도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용도각 학사 (龍圖閣 學士) 서희는, 대중이 없어도 대중이 있을 때처럼 처신하니 진짜 산사
람이라면서 감탄하였다. 돌아가실 즈음에 하루 앞서 게송을 남겼다.

금년 내 나이 일흔 일곱
길 떠날 날을 받아야겠기에
어젯밤 거북점을 쳐보니
내일 아침이 좋다고 하더라.
今年七十七 出行須擇日
昨夜報龜哥 報道明朝吉

서희가 이 게송을 보고 깜짝 놀라서 영원 유청 (靈源惟淸) 스님과 함께 찾아갔더니 이미
입적하셨다.「정강집(汀江集)」

10. 나태함을 일깨운 입적 / 법지 지례 (法智知禮)존자

법지존자 (法智尊者:960∼1028) 의 법명은 지례 (知禮) 이다. 나이 40이 되면서부터 눕지
않고 늘 앉았으며 문밖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법을 물으러 다니는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하
루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반 줄의 게송을 보고도 자기 몸을 잊고, 한마디 법문을 듣고도 불 속에 몸을 던진다 하였
다. 성인들은 법을 위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는데, 내가 신명을 던져 나태한 이들을 일깨우
지 못한다면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리고는 도반 열 사람과 3년 결제로 법화삼매 (法華三昧) 를 닦고 3년 기한이 되면 함께
몸을 태우자고 하였다.
이때 한림학사 (翰林學君) 양억 (陽億:大年) 이 편지를 보내 세상에 머물러 주기를 간곡히
청하면서, 정토를 좋아하고 속세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지기도 하였다. 스님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종일토록 모든 상 (相) 을 깨트려도 모든 법 (法) 은 이루어지고, 종일토록 법을 세워도
티끌까지도 다 없어집니다."
그러자 양억이 다시 물었다.
“보배나무에는 바람이 읊조리고 금빛 도랑에는 파도가 인다고 하니, 이것은 어떤 사람의
경계입니까?"
“보고 듣고 하는 경계일 뿐 도리는 없습니다."
“법화경과 범망경은 모두 마왕의 설법입니다."
“부처와 마왕과는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양공은 교리를 가지고도 스님을 굴복시킬 수 없고 말로서도 만류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마침
내 자운 (慈雲) 법사에게 편지를 내어 항주 (杭州) 에서 명주 (明州) 로 오게 하여, 법사가
직접 그들의 결의를 막아 줄 것을 부탁하는 한편 고을의 장수에게는 그들을 보호하여 분신
할 틈을 주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 해에 양공은 스님에게 법호를 내려 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진종 (眞宗) 황제가 양공을
불러 까닭을 물으시니, 공은 이 기회에 스님께서 몸을 버리려 한다는 일을 아뢰었다. 황제가
기뻐 찬탄하면서 양공에게 “세상에 머물러 주십사는 내 마음을 꼭 전하라"고 거듭 말하며,
법지 (法智)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이 일로 원행 (願行) 이 실현되지 않자, 스님은 도반들
과 다시 광명참법 (光明懺法) 을 닦아 자연스럽게 입적하자고 약속하였다. 닫새째 되던 날,
가부좌한 채 대중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났다가 죽는 것은 당연한 분수다. 그대들은 쉴 새없이 부지런히 도를 닦고, 내가
살아 있을 때나 마찬가지로 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말이 끝나자 스님은 염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교행록등 (敎行錄等) 」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 (大覺 懷璉) 선사

원통사 (圓通寺) 의 거눌 (居訥:1010∼1071, 운문종) 선사는 신주 ( 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
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
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 (仁宗) 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 (淨因寺) 에 주지하도록 하였
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 (懷璉:1009∼1090, 운문종)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
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 (大覺禪師)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 (英
宗) 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 (蘇東坡) 가 신규각 (宸奎閣) 의 비문
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
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요 (參寥:?∼1106, 운문종) 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
실 때 왕 〔英宗〕 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직
접 내리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전문 (全文) 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
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
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
목 (龍腦木) 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질그릇 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
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 밖
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
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

12. 공덕(功德) / 보지 (寶誌) 선사

양 무제 (武帝) 가 보지 (寶誌) 선사에게 물었다.
“짐이 정사를 돌보는 여가에 여러 가지 착한 일을 했는데, 공덕이 되겠습니까?"
“공덕은 공덕이나 진정한 공덕은 아닙니다."
“"무엇이 진정한 공덕입니까?"
“성품이 깨끗하여 마음이 밝으면 바탕이 저절로 비고 고요해지니 이것이 진정한 공덕입니
다."
무제는 이 말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옛 성인께서 말씀하셨다.

한순간 고요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만큼의 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낫다.
보배탑은 결국 먼지로 돌아가지만
한순간 깨끗한 마음은 깨달음을 이룬다. 「통행록 (通行錄)」

13. 화엄경을 칭송함 / 손사막 (孫思邈)

도사 손사맥 (孫思邈) 은 경조 〔京兆〕 사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하루에
만 글자를 외웠다. 노장 (老莊) 을 잘하고 불전에 더욱 뜻을 두었다. 50세가 되자 종남산
(終南山) 에 숨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연홍 (鉛汞:송화 가루나 약초 등으로 만들어 신선도를
닦는 사람들이 먹은 음식) 만을 먹고 살았다. 도선율사 (道宣律師:596∼667, 智首율사의 법
을 이음. 남산 율종의 개조) 와 사이가 좋아서 하루종일 법담을 나누었으며, 「화엄경"을 베
껴 쓰기도 하였다.
그때 당 (唐) 태종 (太宗:627∼649) 이 불경을 읽고자 하여 손사맥에게 물었다.
“어느 경이 가장 크고 높은 경입니까?"
“화엄경은 부처님도 높이시던 경입니다."
“요즈음 현장삼장 (玄台三藏) 이 대반야경 600권을 번역하였는데 (660년) , 그것을 큰 경이
라 하지 않고 오히려 80권 화엄경을 크다 합니까?"
“화엄법계에는 모든 법문이 다 갖추어져 있고 한 법문이 대천세계만큼의 경전을 설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반야경은 화엄의 한 부분 〔法門〕 이 되는 것입니다."
왕이 알아듣고 그때부터 「화엄경」을 늘 독송 〔受持〕 하였다. 「석씨유설 (繹氏類說) 」

14. 참학 (參學) 하는 일/ 시랑 양억 (楊億)

시랑 (侍郞) 양억 (楊億:974∼1020) 은 한림학사 (翰林學君) 이유 (李維) 에게 편지
를 보냈는데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잠깐 남창 (南昌) 태수로 와서 마침 광혜 상총 (廣慧常總:1025∼1091, 임제종 황룡파) 스
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공양을 될 수 있는대로 간소하게 하여 밥상을 물리고 여가가
많았으므로 더러는 직접 오시기도 하고 더러는 수레로 모셔오기도 하여 이것저것 터놓고 물
었더니 어둡고 막혀 있던 것이 싹 풀렸습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난 뒤에는 마치 잊었던 일
이 갑자기 생각난 듯, 자다 깨어난 듯 마음이 탁 트여 의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 가슴에 막혀 있던 것이 저절로 탁 떨어져 내려가서 몇 겁을 두고 밝히지 못했던 일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났으니 이는 정말로 스님께서 의심을 환희 결택 (決擇) 해 주시고, 막힘
없이 지도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옛분들이 큰스님을 찾아뵙던 일들을 거듭 생각해 봅니다. 설봉 의존 (雪峰義存) 스님
은 동산 양개 (洞山良介) 스님을 찾아뵙고 투자 의청 (投子義靑) 스님을 세 번 뵈었으나 마
침내는 덕산 선감 (德山宣鑑) 스님의 법제자가 되었으며, 임제 의현 (臨濟義玄) 스님은 대우
수지 (大愚守芝) 스님의 뒤를 이었으며, 운암 담성 (雲巖曇晟) 스님은 도오 원지 (道吾圓智)
스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마침내 약산 유엄 (藥山惟儼)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단
하 자순 (丹霞自淳) 스님은 마조 도일 (馬祖道一) 스님에게 인가를 받았으나 석두 희천 (石
頭希遷) 스님의 후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예전에도 많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길 일이 아
닙니다. 병든 이 몸이 지금 법을 이어받은 인연은 사실 광혜 (廣慧) 스님에게 있으나 처음
일깨워 지도해 주신 분은 바로 별봉 (鼈峰:임제종 대혜파, 無際了派의 제자) 스님이셨습니
다. 안녕히 계십시오.



시랑이 한 스님과 법담을 나누다가 말하였다.
“참학 (參學)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루종일 언제나 자기를 살펴보아야 〔照顧〕 합니
다. 듣지 못했습니까? 선 〔禪道〕 을 말하자면 늘 살피고 다녀야 할 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일상생활에서 무슨 일을 하거나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닭이
알을 두고 일어나버리면 기운이 이어질 수가 없어서 마침내 병아리가 부화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만가지 경계는 빽빽하고 6근은 요동하는데 조금만 살펴보는 일 〔照顧〕 을 놓치면 그
대로 신명을 잃게 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태어날 인연을 받아 생사에
매여 있는 이유가 수많은 겁토록 생멸심을 쫓아 그것에 끄달려다니다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
입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한번이라도 살펴봄을 잃은 적이 있다면 어떻게 우리가 여기 있을
수 있겠습니까? 큰 길의 흰 소 〔露地白牛:본디는 법화경에서 一乘을 비유한 말로서, 선문
에서는 청정무구한 본심을 말한다〕 를 알고자 합니까? 콧구멍 〔鼻孔:본래면목〕 을 잡고
한번 끌어당겨 보십시오."
또 말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눈으로 가섭존자를 돌아보시며 대중에게 말씀하시기
를, ‘나에게 정법안장 (正法眼藏) 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하셨고, 또 말
씀하시기를, ‘나는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법한 일이 없다' 하셨는데, 이것이 무슨 도리이겠
습니까?
누구나 저마다 한 글자 각주도 붙일 수 없게 되면 누구에게나 굉장한 일이 벌어진 셈이나
그것을 ‘굉장하다'고 해버리면 벌써 틀립니다. 그렇다면 석가는 패전한 군대의 장수이고,
가섭은 신명을 잃은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생사 열반이 모두
다 꿈속의 일이고, 부처와 중생도 모두 군더더기 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곧바로 이렇게 알
아버려야지 밖으로 치달려 구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밝히지 못했다면 그대는 한참 잘못
되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시랑은 임종 하루 전에 게송 한 수를 직접 써서 집사람들에게 주며 다음날 이부마 (李駙馬:
李遵 ?∼1038) 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꺼졌다 일어나는 거품이여
두 법은 본래 같은 것
참된 귀결처를 알려 한다면
조주 동원의 서쪽이니라.
生與 滅 二法本來齊
欲識眞歸處 趙州東院西

이부마는 받아보고서 말하였다.
“태산 (泰山) 의 사당 〔廟〕 속에서 지전 (紙錢:죽은사람의 노자돈으로 쓰는 가짜 종이
돈) 을 팔도다." 「대성광등 (大聖廣燈)」

15. 전생에 쓴 능가경 / 장문정공 (張文定公)

장문정공 (張文定公:張齊賢, 宋 太宗·眞宗代의 총신) 은 전생에 낭야사 (琅耶寺) 의 지장
(知藏:장경각에서 경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소임) 이었는데, 「능가경 (磅伽脛)」을 베끼
다가 다 쓰지 못하고 죽게 되자 내생에 꼭 다시 쓰겠다고 발원하였다.
뒤에 제주 ( 州) 에서 지사 (知事) 가 되어 낭야산에 왔다가 도량을 두루 걸어다녔는데, 어
쩐지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장경각에 이르자 퍼뜩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리하여
대들보 사이의 경 (脛) 상자를 가리키며 "저것은 내 전생의 일이다!" 하고는, 가져오게 하
여 들여다보니 과연 「능가경」이었으며 글씨체가 금생과 똑같았다. 한번은 그 경을 읽다가
“세간이 생멸을 떠난 것이 헛꽃 같은 일이며, 지혜는 유무가 있을 수 없어도 자비심을 일
으킨다"고 한 대목까지 읽고는 마침내 자기 지견이 밝아져 게송을 지었다.

한 생각이라도 생멸이 있으면
천 가지 일이 유무에 묶이는데
신검의 칼끝을 가볍게 드는 곳에
쟁반 위의 구슬이 튀어나오네.
一念存生滅 千機縛有無
神鋒輕擧處 遂出走盤珠

만년에 이 경 (脛) 을 꺼내 소동파 (蘇東坡) 거사에게 보여 주면서 그 내력을 이야기하였
더니, 소동파가 경 끝에 제 (題) 를 달고 그것을 비문에 새겼다.

16. 몹쓸 병으로 죄값을 치르다/ 기 ( ) 선사

기 ( ) 선사는 진주 (秦州) 용성 (龍城) 사람이다. 처음 천성사 (天聖寺) 호태 (晧泰)
선사에게서 법을 얻고 만년에 황룡 혜남 (黃龍慧南) 선사에게 귀의하였는데, 혜남선사는 스
님이 바르고 투철하게 깨달았음을 보고 몹시 후대하여 전주 (全州) 흥국사 (興國寺) 에 주
지하게 하였다. 스님은 이곳에서 개당하여 마침내 혜남스님의 법을 이었는데, 어느 날 밤 꿈
에 산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스님이 몹쓸 병을 만나면 이곳 인연은 다하는 것입니다."
말이 끝나자 산신은 숨어버렸다. 30년이 지난 뒤에 과연 문둥병이 걸려서 일을 그만두고 용
성의 서쪽에 돌아와 작은 암자를 짓고 거기서 요양하였다.
스님에게 극자 (克慈) 라는 한 제자가 있었다. 오랫동안 양기 방회 (楊岐方會) 스님에게 귀
의하였고, 선림에서 뛰어난 사람이었다. 돌아와 정성으로 간호하였는데, 비바람과 추위, 더위
에도 불구하고 스님께서 일생을 마칠 때까지 마을에서 걸식을 해와 봉양하였다. 하루는 스
님이 극자스님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성사 호태스님에게 도를 얻었는데 만년에 황룡스님을 뵙고는 도 (道) 와 행 (行)
이 겸비함을 마음 속으로 존경하여 법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반평생 이런 몹쓸 병에 걸릴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나. 그러나 지금은 다행히 그 죄값을 다 갚았다. 옛날 신선들은 흔히
몹쓸 병으로 신선도를 얻었으니, 그것은 아마도 티끌세상의 얽매임을 잘라버리고 허유 (許
由) 와 소부 (敖父)*의 풍모를 마음에 품었기에 전화위복이 된 것이 아니겠느냐. 나도 이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이 있겠느냐. 이제는 머뭄도 떠남도 내게 달려 있어
머물고 떠남에 모두 자유롭게 되었다."
마침내 큰 기침을 한번 하고 묵묵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하니 신비한 향기가 들
판에 가득하고 사리가 수없이 나왔다. 「주봉록 (舟峯錄)」

17. 석란문 (繹亂文) / 희안수좌 (希顔首坐)

희안 (希顔) 수좌는 자 (字) 가 성도 (聖徒) 이며 강직하고 과감한 성격이었다. 불법은 물
론 다른 학문까지도 통달하였으며 품격과 절도로 스스로를 지켰다. 행각을 마치고 옛 초막
에 돌아와 숨어 살면서 세속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항상 문 닫고 좌선만 하니, 수행이
고결한 사람이 아니면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명공귀인들이 여러 차례 몇몇 절에 주지로
모시려 했으나 굳이 거절하였다.
당시 참이 (參已) 라는 행자가 있었는데, 승려가 되고자 하여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다. 그러
나 스님은 그가 승려 될 그릇이 못됨을 알고‘석란문 (繹難文)’ 이라는 글을 지어 물리쳤
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들을 아는 데는 아비만한 사람이 없고, 아비를 아는 데는 아들만한 사람이 없다. 내가 보
건대 참이 (參已) 는 승려 될 그릇이 아니다. 출가해서 승려가 된다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
겠는가. 편안함과 배부르고 따뜻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달팽이 뿔* 같은 하잘것없는 명리
를 구하는 것도 아니다. 생사를 해결하는 길이고 중생을 위하는 길이며, 번뇌를 끊고 3계 바
다를 벗어나 부처님의 혜명 (慧命) 을 잇기 위한 것이다. 성인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불법
이 크게 허물어졌는데, 네가 감히 함부로 이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
「보량경 (寶梁脛)」에 말하기를 “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다" 하였고, 「통혜록 (通慧錄)」에도 “승려가 되어 10과 (十科)* 에 들지 못하면 부처
님을 섬겨도 백년 헛수고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래서 어렵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도 외람되게 승려의 대열에 끼어 불도에 누를 끼치고 있는데 하물며 네가 하겠다는 것
이냐?
출가해서 승려가 되어 3승 12분교와 주공 공자 (周公軫子) 의 도를 모른다면, 그는 인과에도
어두울 뿐더러 자기 성품도 알지 못한 사람이다. 농사 짓는 수고도 모르고, 신도들의 시주를
받기 어려운 줄을 생각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함부로 술 마시고 고기 먹으며, 재계 (齋戒)
를 파하고 범하여 장사를 차리고 앉아 부처를 팔아먹는다. 도둑질, 간음, 노름으로 절집을
떠들썩하게 하고 큰수레를 타고 드나들면서 자기 한 몸만을 아낄 뿐이니, 슬픈 일이다. 여섯
자 몸뚱아리는 있어도 지혜가 없는 이를 부처님께서는 바보중이라 하셨다. 세치 혀는 있어
도 설법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처님께서는 벙어리 염소중이라 하셨다. 또한 승려 같으나 승
려도 아니고 속인 같으면서 속인도 아닌 사람을 박쥐중, 또는 민머리 거사라고 하셨다. 그러
므로 「능엄경 (磅嚴脛) 」에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도적이 내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마
구 팔아 온갖 죄업을 짓는가" 하였으니, 이런 이들은 세상을 제도하는 나룻배가 아니라 지
옥의 씨앗으로서 설사 미륵이 하생할 때가 되어 머리를 내밀고 나올 수 있다 해도 몸은 이
미 쇠우리 안에 빠져 온갖 형벌의 아픔이 하루아침 하룻저녁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런 자들이 백천, 혹은 만이나 되는데, 겉으로 승려의 옷만 걸쳤을 뿐, 그 속을 까놓고 말
해보면 승려라 할 수 없다. 그것이 소위 솔개의 날개를 달고 봉 울음을 운다 하는 것이다.
이들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이지 옥 (玉) 은 아니며, 풀 무더기 속에 우거진 쑥대지 설산 (雪
山) 의 인초 (忍草) 는 아니다.
나라에서 승려에게 도첩 (度牒) 을 주는 것은 본래 복을 빌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도
리어 부역 면제 받는 것을 따지면서 승려에게 평민이 되라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승려
들에게 심한 푸대접을 하고 있다.
오직 지난날 육왕 회련 (育王懷璉) ,* 영안 설숭 (永安契嵩) ,* 용정 원정 (龍井元淨) , 영
지 원조 (靈芝元照) * 같은 분은 한 마리 여우털처럼 빛나는 보배라 할 수 있겠지만, 나머
지 양가죽 같은 보잘것없는 자들이야 말할 가치가 있겠는가. 아! 불법의 바다가 오늘날처럼
더럽혀진 적은 없었다. 이런 말도 지혜로운 이와 할 수 있을 뿐, 속인들과는 하기 어려운 일
이다.

18. 공양할 때든, 목욕할 때든 /범 (梵) 법주

범 (淨梵) 법주 (法主) 는 가화 (嘉禾) 사람으로, 출가하여 신오 처겸 (神悟處謙:천태종)
스님을 찾아 뵈었다. 정법스님은 깨달음 〔解〕 과 실천 〔行〕 을 겸비하였으며 불법을 위
해 보시로 중생을 제도하였다. 만년에 북선사 (北禪寺) 에 살 때는 늘 시장거리에서 걸식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리자 그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규율을 말세 사람으로서 마땅히 실
천하는 것이지 남에게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스님은 몸가짐이나 대중을 거느리는 모든 일에 법도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법석은
절강성 (江省) 서쪽에서 가장 모범적이었다. 스님은 문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였다.
“하루 스물 네 시간 행주좌와 (行住坐臥) 하는 4위의 가운데에서 지켜야 할 법문이 있으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마음을 참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든지 모조리 마업 (魔業) 이
되어버린다. 우선 발우를 펼 때만 해도, 광야의 귀신들이 항상 주림을 느끼다가 스님네들이
부딪치는 발우소리를 헛듣고 주림과 불길이 더해져서 고통이 배가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몸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난 다음에 밥을 받고 나누어 먹어라'고 이
르셨다. 그러므로 백장스님의 청규 (淸規) 에도 발우 씻은 물을 버리면서 하는 축원이 있으
니 ‘옴 마휴라 사바하'가 그것이다. 백장선사는 오직 마음 〔心印〕 만을 전하는 분인데도
오히려 세세한 행을 지켰는데, 하물며 계율의 가르침까지 겸수하신 우리 스님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
나아가 목욕을 할 때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옛날 한 비구가 목욕을 하면서 장난치고
웃고 하다가 바른 생각 〔正念〕 을 잃어 뒷날 끓는 물이 튀어오르는 업보를 받은 일이 있
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께서는 마음을 잡아매어 관찰하게 하고 늘 다음과 같은 발원문을 하
게 하였다. ‘내 이제 육신을 씻으며 발원합니다. 중생들의 심신에 때가 없어져 안팎으로 빛
나고 깨끗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우선은 이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다른 일도 다 이와 같다. 그러니 일상생활에 조심조심 노
력하며 물러서서 돌이켜 보고 마음을 잘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 「통행록 (通行錄)」

19. 사명 법지스님을 추억하며 / 자운 준식 (慈雲悛式)법사

자운 준식 (慈雲遵式:964∼1032, 천태종) 법사가 말하였다.
“나는 사명 법지 (四明法智:960∼1028) 스님과 40년 동안이나 도반으로 지내왔는데, 막상
죽을 때에는 그의 방 앞에서 곡 한번 하지 못했다. 그래서 탄식하다가 못내 이런 노래를 지
어 불렀다.

하늘에는 두 달이 없고
인간에는 스님 하나 뿐
天上無雙月 人間有一僧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사람에게는 후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박하다고 생각
하지 말아라. 다만 그의 깨달음과 수행이 남다르게 뛰어남을 보고 극단적인 말로써 내 감회
를 펴 본 것이다. 남다르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릉 (비陵:천태종 5조, 荊溪湛然) 법사도
기억하지 못한 일대장교를 다 외웠고, 남들은 수행하기 어려운 네 가지 삼매 〔四三昧〕*
를 모두 수행하였다. 번갈아 찾아오는 추위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옆구리를 자리에 붙인 일
없이 69세에 세상을 마쳤으며, 병이 갑자기 심해졌는데도 쉬지 않고 도를 닦으며 후학을 가
르쳤다. 문도들이 편안히 쉬라고 청해도 듣지 않았는데, 죽고 나니 사리가 부지기수로 나왔
다. 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20. 왕자로 태어나서 사문이 되다 / 용호 문 (龍湖聞) 선사

용호사 (龍湖寺) 문선사 (聞禪師) 는 당나라 희종 (僖宗:872∼887) 황제의 태자였다. 얼굴
과 풍채가 그려 놓은 듯 맑고 반듯하여 희종이 몹시 사랑하였으나 그는 세상을 다스릴 마음
이 없었다. 왕은 백방으로 손 써서 회유하였으나 끝내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상
화산 (霜華山:石霜禪師) 의 도풍을 흠모하여 꿈 속에서 보곤 하였다.
중화 (中和) 원년 (881)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드디어 머리를 깎고 마음 내키는대로 돌아
다녔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석상 경저 (石霜慶諸:807∼888) 선사를 찾아
가니 선사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그대는 원력 덕에 왕가에 태어났으나 이제 그 몸을 벗고 나를 따르려하니 참으로 불속의
부용꽃이로다."
밤이 되자 문선사는 방장실에 들어가 간청하였다.
“조사께서 따로 전하신 일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조사를 비방하지 마라."
“천하에 이 종지가 널리 퍼졌는데 그것이 빈 말이었겠습니까?"
“안산 (按山) 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때 가서 그대에게 말해주겠다."
문선사는 그날로 작별하고 떠났다. 소무성 (邵武城) 바깥에 이르러 그곳 산이 깊고 울창한
것을 보고는 풀을 헤치고 들어갔는데, 거기서 은거하는 고행승을 만났다. 그는 흔쾌히 자기
토굴을 내어주면서 “스님께서 이곳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고는 깊숙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떠났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사는 그곳에서 십여 년을 머물게 되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서 말하
였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용입니다. 비를 내리는 일을 잘못하여 하늘의 벌을 받았는데 도력을
빌어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더니 작은 뱀으로 둔갑하여 소매 속으로 기어들어가 버렸다. 밤이 되자 바람과 천둥이
선상을 뒤흔들며 산악이 진동하였으나 문선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꼿꼿이 앉아 있었다.
날이 새고 하늘이 개니 뱀은 땅에 내려와 어디론가 가버리고, 얼마 있으니 노인이 나타나서
사례하였다.
“대사의 힘이 아니었으면 피비린내로 이 산을 더럽힐 뻔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보답할 길
이 없으니 바위 밑에 구멍을 파서 샘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뒷날 대중이 모이면 물이 많
이 모자라게 될 것이니 그래서 스님을 이곳으로 모셨습니다."
그 샘은 지금 호수가 되었고 이 인연으로 용호사 (龍湖寺) 라 이름하였다.
「사기비 (寺記碑)」

21. 방장실을 짓지 않고 대중과 함께하다 / 수기 (修己) 선사

장석사 (仗錫寺) 수기 (修己) 선사는 부산 법원 (浮山法遠) 선사와 함께 행각하였고, 여산
(盧山) 불수암 (佛手巖) 에 암자를 짓고 살기도 하였다. 뒷날에는 사명산 (四明山) 깊숙히
들어가 십여 년을 홀로 살았는데, 범과 표범이 나타나도 삼매를 닦은 힘 때문에 한번도 두
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구불구불 험한 산길에 찾아오는 사람 없고
적막한 구름 속에 한 사람 뿐이어라.
晳腸鳥道無人到 寂寞雲中一箇人

뒤에 승속이 모두 그의 도풍을 듣고 흠모하게 되었는데, 산에 산 지 40여 년 되도록 집안
에 쌓아둔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누더기 한 벌로 지내며 오직
절 일으킬 것만을 생각하여, 여러 해에 걸쳐 힘쓴 끝에 선림을 이루게 되었다. 대중들에게
필요한 물건은 많이 갖추어 놓았으나 방장실만은 짓지 않고 대중과 함께 거처하였으니, 이
는 아마도 수기선사가 방을 따로 쓰면서 편안하게 지내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지사 (知事) 온궁 (睛躬) 이라는 사람이 선사가 먼 곳에 출타한 틈을 타서 방장실
을 지어놓았다. 당시 달관 담영 (達觀曇潁:989∼1060, 임제종) 선사가 설두산 (雪山) 에서 법
을 펴고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이렇게 감탄하였다.
“본색종장이 아니면 좋은 보필이 있을 수 없고 좋은 보필자가 아니라면 도인의 덕을 높일
수가 없다." 「장석달관비 (仗錫達觀碑)」

22. 전생의 원 (願) 을 이어 / 변재 원정 (辯才元淨) 법사

변재 원정 (辯才元淨) 법사는 항주 (杭州) 어잠 (練潛) 사람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어깨살이 가사의 매듭같이 솟아올라 있었다가 81일 만에 없어지니 그의 아버지가 감탄하여
말했다.
“이 아이는 전생에 사문이었으니 그 원 (願) 을 빼앗지 말고 자라면 부처님을 모시게 하겠
다."
법사가 세상을 떠난 그 해가 실로 81세였으니 아마도 이는 숙명인 것 같다. 출가한 후에는
법좌를 볼 때마다 감탄하며, 저기에 올라 설법을 해서 사람들을 제도하는 것이 자신의 원이
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운 (慈雲遵式) 스님을 찾아가서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하였다. 배움과 실천이 함
께 향상하여 몇해 안 가서 자운스님의 상좌들과 나란히 앉게 되었는데, 자운스님이 죽고 난
뒤에는 다시 사명산 (四明山) 의 조소 (祖韶) 스님을 모셨다. 조소스님이 천태지관 (天台缺
觀) 을 가르치다가 “한끼의 밥으로 일체에게 보시하며 모든 불보살에게 공양한 다음에야
먹을 수 있다" 하신 방편오연 (方便五緣) 에 나오는 유마거사의 말씀까지를 이야기하니, 원
정스님은 그 말 끝에 깨닫고는 “오늘에야 색, 소리, 냄새, 맛이 본래 제일의제 (第一義諦)
를 갖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사물을 대할 때 마음 속에 의심이 없을 것입
니다" 하였다.
당시 심숙재 (沈叔才) 가 항주 (杭州) 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관음도량 (觀踵道場) 은
경 공부와 참회로 불사를 하는 곳이니 선수행자들이 살 곳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스
님에게 교학하던 곳을 선도량으로 바꾸라고 명하였다. 스님이 그곳에 도착하자 오월 (吳越)
사람들은 마치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기라도 한 것처럼 귀의하고 부모를 공양하듯 스님을
모셨다. 돈, 베, 비단 등의 보시가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천축사 (天竺
寺) 에 머문 지 14년 되던 해, 그 절의 부 (富) 를 탐내는 사람이 스님을 협박하여 쫓아내
니, 스님은 기꺼이 떠나면서 그것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이 일로 천축사 대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사건이 조정에 알려져 다음 해에 스님이 다시 옛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스님은
마지 못해 돌아오는 듯하였고, 대중들은 다시 크게 모였다. 스님과 세속을 벗어난 도반이었
던 조청헌 (趙淸龜) 은 이 일을 보고 찬 (讚) 하였다.

스님께서 천축사를 떠나니 산은 비고 귀신이 울었는데
천축사에 스님께서 돌아오니 도량에는 빛이 찬란하도다.
師去天竺山空鬼哭 天竺師歸道場光輝

스님은 그곳에 다시 2년을 머물다가 하루는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성인이었던 우리 조사 지자 (智者) 대사도 중생교화를 더 급하게 여겨 자기 수행에는 해
가 되었기에 수행위로는 철륜왕 (鐵輪王) *이 되어야 하는데도 오품위 (五品位) *까지밖
에 증득하지 못하셨는데, 하물며 범부야…" 하고는 그곳을 떠나서 종남산 (終南山) 용정
(龍井) 에서 노년을 보냈다. 갈대와 대나무로 지붕을 덮고, 문 닫고 좌선하여 종일 아무소리
가 없었다. 이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뿌리가 자라는 겨울의 마른 나무와 같은 경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가라앉은 옛우물과도 같은 경지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스님을 「눌 (訥:말더
듬이) '이라고 불렀다.
스님은 계율을 엄격히 지켰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설법을 하였는데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
다.
“귀신의 힘으로는 두렵게 할 수 없다. 낮에는 말을 해도 여기까지 오지 않는 수가 있고 밤
에 사람들이 조용해야 들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한번은 손가락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을 했다. 그래서 오른손가락 2개와 왼손가락 3개로 겨
우겨우 물건을 잡았는데 그 문도들 중에 따라하려는 자가 있으면 번번히 못하게 하면서, 동
파 (蘇東坡) 라야 나처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루는 누군가가 와서 북산 (北山) 에 스님과 같은 방법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몇 있다고 하
니 스님은 밀행 (密行) 하는 승려들의 경계는 내가 추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용정잡비 (龍井雜碑)」



23. 대중공사를 통해 살림의 법도를 정하다 / 부용 도해 (芙蓉道楷) 선사

부용 도해 (芙蓉道楷:1042∼1118, 조동종 投子義淸의 법을 이음)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
다.
“내 이렇다 하게 수행한 바가 없는데 과분하게도 산문을 주관하게 되었으니, 이제 옛분들
이 주지하시던 법도를 비슷하게나마 본받아 보답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일을 여러분과
의논해서 결정하고자 한다.
이제부터는 산을 내려가지 않고, 신도들이 베푸는 공양에 가지 않을 것으며, 화주 (化主) 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절에서 1년 동안 수확하여 거둔 것을 360등분하여 하루에 하루
분만을 사용할 것이며, 사람 수에 따라 늘이거나 줄여서는 안 된다. 밥을 먹을 만하면 밥을
짓고, 밥을 짓기에 부족하면 죽을 쑤고, 죽을 쑤기도 부족하면 마음을 끓일 것이다. 새로 오
는 사람과 상견례를 할 때에도 차 끓이는 것으로 족하다. 다른 일은 애써 줄이고 오직 도를
결판하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일 일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일은 여러분 중에 나이 많은
이를 존중해서 다시 의논하도록 할 것이며, 이것 역시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들이여,
옛사람의 게송을 들어보았는가."

거친 산전 (山田) 의 좁쌀밥과
채소 시래기 반찬을
먹겠다면 나도 따라 먹겠으나
안 먹겠다면 마음대로 하여라.
山田脫粟飯 野菜淡黃
喫則從君喫 不喫任東西 「어록(語錄)」

24. 부뚜막 앞에서 선정에 들다 / 지자 의 (知者 ) 선사

지자 의 (知者 )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예전에 큰스님 한 분이 주지살이를 하면서 공양주에게 늘 죽을 쑤게 하였다. 하루는 그
공양주가 생각생각에 다 타들어 가는 장작불을 보면서 덧없이 흘러가는 세상이 이보다 더
빠름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부뚜막 앞에서 고요히 선정 (禪定) 에 들었다. 며칠 만에 일어나
그 절 상좌에게 가서 깨친 경계를 자세히 이야기하였는데, 법을 말하는 것이 자못 깊었다.
그러자 상좌는
‘그대가 이제까지 말한 것은 나도 아는 경계지만 지금 말한 것은 내 모르니 더는 말하지
말라'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숙명통 (宿命通) 을 얻었는가?'
‘조금은 압니다.'
‘무슨 죄로 천한 몸을 받고 무슨 복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저는 전생에 이 산의 주지였는데, 손님이 오는 바람에 모자라는 대중의 나물 반찬을 축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견책을 당해 지금 대중의 부림을 받게 되었으나 전생에 닦던 바
를 잊지 않았기에 쉽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국청백록 (國淸百錄)」

25. 비구라는 말의 뜻/ 대지 (大智) 율사

대지 (大智) 율사가 지은 「비구정명 (比丘正名) "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범어로는 필추 (ц:比丘) 며 중국어로는 걸사 (乞君) 니 안으로는 법을 빌어 성품을 돕고
밖으로는 밥을 빌어 몸을 돕는다. 부모는 사람 중에 가장 가까이 할 사람이나 가장 먼저 그
인연을 끊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모조리 깎아 없앤다. 칠
보가 창고에 넘치는 부도 초개같이 버리고 일품 (一品) 벼슬에 달하는 명예도 구름이나 연
기만도 못하게 보면서 무상 (無常) 함에 진저리를 내어 모든 현상 〔有〕 의 근본을 깊이
캔다.
뜻을 높이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낮추어야 하니 잡고 있는 주장자는 마른 찔레나무요 들고
있는 발우는 깨진 그릇과 다를 바 없다. 어깨에 걸친 회색 옷은 다 떨어진 누더기며 팔꿈치
에 둘러 멘 걸망은 영락없는 푸대자루다. 청정한 생활은 이미 팔정도 (八正道) 에 맞고 검약
한 처신은 사의행 (四依行) 에 맞으니 구주사해 (九州四海) 가 모두 내가 가는 길이며, 나무
밑 무덤 사이 모두 내가 쉬는 곳이다.
삼승 (三乘) 의 좋은 수레를 타고 부처님이 남기신 자취를 밟으며 거룩한 가르침을 어김없
이 받아 가지니 진정한 불제자다. 세상 인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으니 실로 대장부다. 마군
과 싸워 이기고 번뇌 그물을 열어 제쳐 만금의 훌륭한 공양도 받을 만하며 사생 (四生) 의
복밭이 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니니 걸사라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지원집 (芝園集)」

26. 주지살이 / 영원 유청 (靈源惟淸) 스님

영원 유청 (靈源惟淸:?∼1117, 임제종 황룡파) 선사는 문에다 방 ( ) 을 써 붙였다.

나 유청은 이름만 주지일 뿐 실로 길손과도 같다. 단지 대중을 통솔하고 불법을 널리 펴서
우러러 교풍을 돕는 것을 내 직분으로 삼을 뿐이다.
절에서 관리하는 상주물 (常住物) 은 내 것이 아니므로 이치로 보아서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소임자에게 모두 위임하고 분야를 나누어 일을 맡아 보게 하되, 공과
사를 분명히 하여 합당한 것은 하고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 나는 그저 대중과 함께 밥
먹고 옷 입고 할 뿐이며 몸에 지닌 물병과 발우만으로 인연 따라 가고 머물 뿐이다.
생각컨대 사방 납자들은 목적이 있어서 여기 왔을 것인데 침식까지는 정성껏 살펴주겠지만
나머지는 따로 공양하기 어렵다. 그 물건들은 세속법으로는 공공물이고 불법으로는 대중의
재산이니 이것을 훔쳐 남의 마음을 사고 자기 것으로 가로채는 일은 실로 본래 세웠던 뜻에
서 보면 감히 하지 못할 일이다. 일찌감치 글로 써서 알리는 바이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석각재천동 (石刻在天童)」

27. 좋은 인연들 / 시랑 장구성 (張九成)

시랑 (侍郞) 장구성 (張九成:子韶) 거사는 젊어서 진사 공부를 하는 여가에 틈틈이 불경
공부에도 매우 마음을 쏟았다. 영은사 (靈隱寺) 의 오명 (悟明) 선사를 뵙고 종지를 물어보
니 오명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한창 열심히 공부해서 이름을 날려야 할 때인데 어찌 생사 문제를 참구할 수 있겠는
가?"
공이 말하였다.
“옛어른 〔先儒〕 이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 (道) 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
습니다. 그러나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어서, 옛날 훌륭한 신하 중에
도 선문 (禪門) 으로 도를 얻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유교와 불교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불교의 우두머리이신 스님께서 어찌 말로 저를 막으려 하십니까?"
오명선사는 그 정성이 갸륵해서 그를 받아주며 말하였다.
“이 일은 생각생각에 놓아서는 안되니, 오래오래 인연이 무르익어 때가 되면 저절로 깨치
게 된다."
그리고는 화두를 주면서 말하였다. “조주 (趙州) 스님에게 한 스님이 묻기를, 「조사가 서
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자, 조주스님은 ‘뜰앞의 잣나무니라' 하였다. 이 화두를
들어 보아라" 하였다.
그러나 공은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호문정공 (胡文定公:胡安國) 을 뵙고 마음
쓰는 법에 대해 자세히 물으니 호안국은, 논어 맹자에서 인의 (仁義) 에 대해 말한 부분과
한곳으로 유추해 보면 그 속에 요점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공은 그 말을 간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하루 저녁은 변소에 가서 ‘측은히 여기는 마
음은 인 (仁) 이 비롯되는 곳이다 〔惻隱之心仁之端〕’라는 구절을 깊이 생각하였다. 묵묵
히 생각에 잠겼는데, 그때 홀연히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모르게 뜰 앞 잣나무 화
두가 들리며 〔擧〕 갑자기 느낀 바 있어 게송을 지었다.

봄 하늘 달밤에 한마디 개구리 소리가
허공을 때려 깨서 한 집을 만들도다
바로 이런 때를 뉘라서 알겠는가
산꼭대기 곤한 다리에 현묘한 도리 있도다.*
春天夜月一聲蛙 撞破虛空共一家
正恁?時誰會得 嶺頭脚痛有玄妙

공은 우연히 묘희 (妙喜大慧:1089∼1163) 스님이 불상에 붙인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되었
다.

까맣게 옻칠한 커다란 죽비 (竹 ) 에
부처가 온다면 한 방 치리라.

이 게송을 보고 나서 묘희스님을 만나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러다 조정으로 돌아와 예부
시랑 (禮部侍郞) 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묘희스님이 서울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더니, 스님이 만나겠다고 알려와 마침내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말고는 별다른 말이 없었는데 스님은 돌아와 문도들에게 말하였
다.
“장시랑은 깨달은 바가 있더라."
“서로 만나 선 (禪) 의 선 자도 뻥긋하지 않았다는데 어떻게 깨달았는지를 아십니까?"
“내 눈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냐?"
공이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받들기 위해 휴가를 청해 경산 (徑山) 을 지나던 길에 스님을
뵙고, 「대학 (大學)」에 나오는 격물의 뜻 〔格物致知〕 을 물었더니 스님이 말하였다.
“공은 격물 (格物) 만 알았지 물격 (物格) 은 모르는군요."
공은 망연히 있다가 한참 뒤에 말하기를,
“거기에도 어떤 방편이 있겠지요"라고 하였다. 스님이 다시 이야기 말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당나라 사람이 안록산 (安祿山) 과 짜고 반란을 일으켰는
데, 그 사람은 난 (亂) 에 앞서 낭주 (州) 태수였던 이라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당 현종
(玄宗) 이 촉 땅에 행차했을 때 그 그림을 보고 노하여 신하에게 그의 목을 칼로 치라 하였
다, 그 사람은 그때 섬서성 (曳西城) 에 있었는데 갑자기 목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 말입
니다."
공이 이 말을 듣자 홀연히 꿈에서 깨어난 듯하여 벽에 글을 지어 붙였다.

자소 (子韶)는 격물 (格物)이요
묘희 (妙喜)는 물격 (物格)이니
한 관 (貫) 이 얼마나 되는고
오백돈이 둘이로구나.
子韶格物 妙喜物格
欲識一貫 兩箇五百

공은 이로부터 도를 참구하여 법을 깨달아 자유로왔고, 마음이 텅 비고 의혹이 없어졌다.
언젠가는 이렇게 감탄하였다.
“경산 노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사방팔방으로 활짝 트여서 마치 천문만호를 한번 밟아
보지 않고도 활짝 열어제치는 듯하다. 어떤 때는 가마를 나란히 타고 높은 산에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깊은 연못가를 천천히 걷기도 하는데,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으나 아무
도 우리 두 사람의 경계 〔落處〕 를 알지 못한다.
이 장구성이 생사 문제 〔末後大事〕 를 깨닫게 된 것은 실로 경산스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니, 이 한 줌의 향 (香) 은 스님을 감히 등질 수 없기 때문에 피우는 것이다."
공이 남안 (南安) 에서 유배생활을 보낸 14년 동안, 불교 경전과 유가 서적들을 공부하면서
지나가는 납자 (納子) 가 있으면 반드시 경계를 확인해 보고 선열 (禪悅) 의 즐거움을 맛보
았으나, 한번도 득실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는 사람은 모두 그의 도풍과 현달함
을 높이 평가하고 마음 깊이 존경하였다.
공은 언젠가 중승 (中丞) 하백수 (何伯困) 에게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낸 적이 있다.

내가 경산스님과 절친하게 왕래하는 것은 다 유래가 있는 일입니다.
옛일들을 살펴보니, 배휴 (裴休) 도 황벽 (黃岫希運)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한퇴지 (韓退
之) 도 태전 (太)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습지 (李習之:) 는 약산 (藥山惟儼)
스님께, 백낙천 (白樂天) 은 조과 (鳥果道林) 스님께, 양대년 (楊大年:億) 은 광혜 (廣慧常總)
스님께, 이화문 (李和文) 은 조자 (照慈;睛聰) 스님께, 소동파 (蘇東坡) 는 조각 (照覺:東林常
總) 스님께, 황산곡 (黃山谷:庭堅) 은 회당 (晦堂祖心) 스님께, 장무진 (張無盡:商英) 은 도솔
(兜率從悅)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 분들을 어찌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서 변소 청소
나 하는 노파들과 같다 하겠습니까.
경산스님은 그 마음 바탕 〔心地〕 이 생과 사를 하나로 보고 사물의 이치를 지극히 궁구하
였습니다. 나아가 도를 논하기를 좋아했는데, 선비들도 당하지 못할 적이 있었습니다. 하늘
에서 해가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이름난 명사와 사귀기를 좋
아하고 그 사람들과의 친분으로 세상에서 행세하려 드는 것은 도둑들이나 하는 짓인데, 어
찌 이 분들이 그런 짓을 했겠습니까.
지난번 사형께서 나를 일깨워주신 편지를 받고 마음 속에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평소 문하
에서 같이 수학하지 않았더라면, 마음을 쏟아 주위 사람들에게 모두 알렸겠습니까. 덕 높으
신 사형께서는 살펴주소서.

공이 유배에서 풀려나 북쪽으로 돌아올 때 장주 (♠州) 에 도착하니 묘희스님도 매양 (梅
陽:묘희스님이 유배갔던 곳) 에서 그곳으로 와 있었다. 나란히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오면
서 스님은 날마다 종지 〔宗要〕 를 말해 주었다. 공이 물러나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이 장구성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노스님께서 선 (禪) 의 강물을 기울여 여러분들께
법을 들려 주셨겠는가?"
공이 영가현 (永圈縣) 을 다스릴 때 광효사 (光孝寺) 의 주지 자리가 비어 있으므로 복당
(福唐) 서선사 (西禪寺) 의 수정 (守淨) 선사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불법이 떠난 지 오래되어 경산 노스님께서 영외 (嶺外:梅陽) 로 가신 뒤에 학인들은 의지
할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정은 맑고 경산스님도 돌아오셨으니 불법이 다시 일어나
려는가 봅니다.
저는 사실 이 도에 일찍부터 부딪쳐 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명공대가 (名公大家) 한두 분을
찾아 그 분들의 제창으로 미혹한 이들을 깨우쳐 주고자 하니 스님께서 제발 저의 청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혹 서선사는 넉넉한 곳이고 광효사는 박한 곳이라서 수정스
님은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말은 속인의 소견으로 다른 사람을 맞추려
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으로 불법의 흥망을 점쳐 보려 하니, 스님께서 불법을 일으켜
보겠다는 마음을 내고 여러분들이 반 팔의 힘만 내주신다면 지극히 다행이겠습니다.

불법을 지키려는 공의 정성이 이 편지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문도전(聞道傳)」

28. 도반될 자격 / 지화 (知和) 암주

지화 암주 (知和庵主) 는 고소 (姑蘇) 사람인데 성품이 고결하여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한
번은 호상 (湖湘) 지방을 행각하다가 밤이 되어 객실에서 자게 되었는데 보교 (普交:1048∼
1124) 스님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지화스님은 보교스님이 침착하고 온후한 데다가 말없
이 밤새도록 꼿꼿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기특하게 여겨서 물었다.
“스님은 만리 낯선 길을 혼자 다니시오?"
“예전에는 도반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절교했습니다."
“어째서 절교했소?"
"“ 사람은 길에서 주운 돈을 대중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돈을 똥이나 흙처럼 보아야 하는데 그대가 비록 주워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
다 하더라도 이는 아직 이익을 떨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는 헤어졌습니다. 두번째 도반은
가난하고 병든 어머니를 버리고 도를 닦는다기에 내가 말했습니다. ‘도를 닦아 비록 불조
의 경계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불효하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불효하거나 이익을 따지는
이들은 모두 내 도반은 아닙니다."
지화스님은 그의 현명함을 존경하여 드디어 같이 행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옛날
은산 (隱山) 화상을 본받아 우뚝한 산꼭대기에 띠풀 암자를 짓고 구름과 하늘을 내려다보면
서 세상 바깥 사람이 될 것이며, 세속에 떨어지지 말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보교스
님은 맹세를 어기고 천동사 (天童寺) 의 주지가 되었다. 보교스님이 지화스님을 찾아갔으나
돌아보지도 않았다. 정언 (正言) 진숙이 (陳叔異) 가 그의 서실을 암자로 만들어 주어 그곳
에서 이십 년을 혼자 살았는데, 너절한 물건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호랑이 두 마리만이 시
봉할 뿐이었다. 스님께서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대나무 홈통에는 두서너 되의 찬물이 흐르고
창문 틈새로는 몇 조각 구름이 한가롭다
도인의 살림살이 이만하면 될 뿐인 걸
인간에 머물러 보고 듣고 할 것인가.
竹 二三升野水 間七五片閑雲
道人活計只如此 留與人間作見聞 「설창기 (雪 記)」

29. 조산 (曹山) 의 가풍 /조산 탐장 (曹山眈章) 선사

조산 탐장 (曹山耽章:840∼901) 선사는 천주 (泉州) 사람인데, 동산 양개 (洞山良介) 선사에
게서 비밀스런 종지를 받았다. 청을 받고 무주 (撫州) 조산 (曹山) 에 처음 머물게 되었는
데, 도가 널리 퍼져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 스님이 물었다.
“이 나라에서 칼 만지는 이가 누구입니까?"
“나 조산이다."
“누구를 죽이시렵니까?"
“닥치는 대로 다 죽인다."
“홀연히 낳아주신 부모를 만나면 어찌하시렵니까?"
“무엇을 가리겠는가?"
“자기 자신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누가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
“어째서 죽이지 않습니까?"
“손 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지의 도자 (紙衣道者) 라는 사람이 동산 (洞山) 에서 찾아왔는데 스님이 물었다.
“지의 (紙衣) 안에 있는 일은 어떤 것인가?"
“한 조각 가죽을 겨우 몸에 걸쳤으나 만사가 다 그럴 뿐이요."
“그 지의 속에서는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지의 도자는 가까이 다가서더니 옷을 벗어 던지고 차수 (叉手) 한 채 떠났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면서 “그대는 이렇게 갈 줄만 알았지 이렇게 올 줄은 모르는구나" 하였다. 그러자 그
가 갑자기 눈을 뜨고 말하였다.
“신령스러운 진성 (眞性) 이 여자의 뱃속을 빌리지 않고 태어난다면 어떻소?"
“아직 묘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묘한 것이요?"
“빌리지 않으면서 빌리는 것이요 〔不借借."*
그러자 그는 법당에 내려와 죽었다.
당시 홍주 (洪州) 의 종씨 (鍾氏) 가 여러 차례 청하였으나 가지 않고 단지 대매 법상 (大梅
法常) 선사의 산거시 (山居詩) 한 수로 답을 보냈다.
천복 신유 (天復辛酉:901) 년 6월 여름밤에 소임자에게 오늘이 몇일이냐고 물어 그가 유월
보름이라고 대답하자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평생 행각에서 반드시 90일로 한 철을 났으니 내일 진시 (辰時) 에 행각길에 나서련다."
그러고는 때가 되자 향을 사르고 입적하였다. 「승보전 (僧寶傳) 」

30. 독설로 불사를 짓다 / 법운 법수 (法秀) 선사

법운사 (法雲寺) 법수 (法秀:1027∼1090) 선사는 진주 (秦州) 사람인데 전생에 노화상 (魯
和尙) 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노화상에게, 자신이 죽거든 대밭 언덕 아랫집으로
찾아오라고 하였다. 그 집에 아기가 태어나자 노화상이 찾아가서 보았더니 아이가 한번 웃
음을 지어 보였으며, 세살 때 노화상을 따라가겠다고 하여 출가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인물
이 남달랐고 온 대중 가운데 있으면 그려놓은 듯 우뚝하고 훤칠하였다.
스님은 늘 독설 〔怒罵〕 로 불사를 지었다. 당시 사마온공 (司馬溫公:光) 이 등용되었는데,
불법이 너무 성하다 하여 이를 억제하려 하자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상공 (相公) 은 총명하여 사람 중에 영걸이오. 불법 인연으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
까지 왔겠소.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부처님의 부촉을 저버린단 말이오?"
그러자 공은 마음을 돌렸다.
또 이백시 (李伯時) 는 말 그림으로 잘 그려 한간 (韓幹:당 현종 때의 화가) 에 뒤지지 않게
그림값을 받았는데 스님은 그를 꾸짖었다.
“그대는 사대부로서 그림으로 이름이 났는데, 하물며 말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사람들에
게 묘를 얻었다고 자랑하며 봐 주기를 기대하겠지만, 묘하게도 그대는 말 뱃속에 들어갈 것
이다."
이백시는 이에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또 황정견 (黃庭堅:노직) 은 저속한 시를 즐겨 짓고 사람들은 다투어 그것을 전하니, 스님이
이렇게 말하였다.
“묘한 문장을 내게도 좀 끌러 놓으시죠."
그러자 황노직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도 말 뱃속으로 집어넣을 참입니까?" 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저속한 말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음난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어찌 말 뱃속에 그
치랴.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31.자기 제문을 짓다 고산 지원 (孤山智圓) 법사

고산 지원 (孤山智圓:976∼1022)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경론에 대하여 수많
은 저술을 남겼다. 서호 (西湖) 가에 높이 누웠으니, 권세로도 부귀로도 스님을 꺾을 수 없
었으므로 속된 무리들은 스님과 벗할 수 없었다.
이때 문목왕공 (文穆王公) 이 전당 (錢塘) 에 오게 되었는데, 군 (郡) 의 스님네들이 모두
관문까지 마중을 나가자고 하자, 스님은 몸이 아프다면서 가지 않고는 심부름꾼을 보고 웃
으며 말하였다.
“자운법사 (慈雲法師) 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전당 땅에 중이 하나 있다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일이라고 찬탄하였다.
스님은 늘 비장 (脾臟) 에 병이 있어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는 가운데서도 침상에 붓과 벼
루를 깔아놓고 저술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 나이 마흔아홉인데 이미 오래 못 살 것을 안다. 내가 죽거든 땅을 골라 후하게 장례치
르노라 내 허물을 더 불리지 말고 너희들이 항아리를 합쳐서 장사 지내다오."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 제문 (祭文) 을 지어 부탁하였다.

삼가 강산과 달과 구름을 차려놓고 중용자 (中庸子:지원법사의 호) 의 영을 제사 지내노라.
그대는 본래 법계의 원상 (元常) 이며 보배롭고 완전한 묘성 (妙性) 으로서, 아직까지 동정
의 조짐이 없었으니 어찌 오고 감에 자취가 있겠는가. 이제 일곱 구멍 (七穴:사람 얼굴에 나
있는 구멍) 을 뚫으니 혼돈 (混沌) 이 죽고 6근이 나뉘어 정명 (精明:一心) 이 흩어지게 되
었도다. 그리하여 그대 스스로의 마음을 보건대 바깥 경계와 다른 바가 있도다. 생존과 사멸
두쪽을 집착해서 항상 흔들려 쉴 날이 없으며 깜깜하여 비출 줄을 모르는구나.
내 혼돈 (混沌) 을 회복하여 정명 (精明) 으로 돌아가려 하노라. 그리하여 허깨비 아닌 〔非
幻〕 법에서 허깨비 언설을 지어내는 것이니, 허깨비 아님도 없거늘 어찌 허깨비라는 법이
있으랴. 그대 중용자도 묘하게 이 뜻을 알아들을지어다. 그대가 이미 허깨비 생을 받았으니
허깨비 죽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허깨비 몸이 있어서 허깨비 병이
있게 되었고, 입으로는 허깨비 말을 빌어 허깨비 제자에게 허깨비 붓을 잡아 허깨비 글을
쓰게 하노라. 그리하여 미리 그대 허깨비 중용자를 제사 지내고 끝없는 뒷사람들에게 모든
법이 허깨비 같음을 알게 하고자 하노라.
이렇게 하면 허깨비삼매 (如幻三味) 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 삼매,그것도 허깨비로다. 잘
받아 먹으라.

그리고는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드셨다. 「한거편 (閑居編)」



32. 소동파의 옥대 / 요원 (了元) 스님

소동파 (蘇東坡:1036∼1101) 가 말하였다.
“어머니께서 나를 가졌을 때 꿈에 비쩍 마른 애꾸스님 한 분이 문 앞에 오셨다는데, 열살
남짓 되어서는 내 꿈에 자주 보였다. 그러니 나는 전생에 스님이었던가 보다. 또 내 아우 자
유 (子由) 가 진정 극문 (眞淨克文) , 수성 상총 (困聖常總) 스님과 함께 고안 (高安) 에 있
을 때 그들이 사계 (師戒) 스님 만난 꿈 이야기를 똑같이 했으니 아우가 사계스님의 후신
(後身) 임에 틀림없다."
소동파는 진정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전생에 이미 법을 만난 듯하니 바라옵건대 더욱 채
찍질하여 자신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였다.
그가 금산사 (金山寺) 에 갔을 때 마침 방에 들어가는 불인 (佛印了元:1032∼1098) 스님과
마주쳤는데 불인스님이 말하였다.
“여기에는 단명전학사 (端明殿學君:소동파의 직명) 께서 앉을 자리가 없소."
“스님 몸 〔四大〕 을 빌려서 선상 (禪滅) 을 만들지요."
"내가 한마디 물을테니 대답을 하면 내 몸을 선상으로 쓰되, 대답을 못하면 옥대 (玉帶) 를
끌러놓고 가시오."
소동파가 옥대를 책상에 풀어놓으면서 물어보라 하니 스님께서 물었다.
“내 몸 〔四大〕 은 본시 공 (空) 하고 5음 (五陰) 도 있는 것이 아닌데 그대는 어디에 앉
겠다는 것이오?"
소동파가 대답을 못하자 스님은 시자를 불러 옥대를 산문의 가보로 길이 간직하게 하고 대
신 중 바지 하나를 내 주었다. 이에 소동파는 절구 (絶句) 두 수를 읊었다.

병든 몸은 허리의 옥대를 감당키 어려웠고
둔한 근기는 날랜 기봉에 나가 떨어졌다네
마침 가비원 (歌婢院) 에 걸식할 판에*
구름 덮인 산에서 승복과 바꿔 입었네.
病骨難堪玉帶圍 鈍根闖落箭鋒機
會當乞食歌婢院 換得雲山舊納衣

객사에 사람 들르듯 많은 사람 거쳐온 이 옥대가
흘러 흘러 나까지 온 지도
벌써 오랜 세월이로다
비단 도포를 잘못 떨어뜨려
딴 것과 혼동하여
거짓 미치광이 만회 (萬回) 에게 빌어다 주었네.*
此帶閱人如傳舍 流傳到我赤悠哉
錦袍錯落渾相稱 乞與 狂老萬回 「주파시 (注坡詩) 」

33. 원력의 영험 / 현장 (玄藏) 법사

삼장법사 현장 (玄藏:622∼684) 스님은 27세에 서역으로 법을 구하러 갔다. 진주 (秦州)
난주 (蘭州) 양주 (?州) 를 거쳐 과주 (瓜州) 에 이르러 옥문관 (玉門關) 을 나서니 관문
밖에는 정탐꾼들이 살고 있었다. 점점 가다가 사막에 이르니 악귀와 온갖 짐승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였으나 그때까지는 멀리 달아나지 않다가 반야
심경을 외우자 그 소리에 모두 사라졌다.
갠지즈 강가에 왔을 때 도적떼를 만났는데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문은 단정하고 아름답게 생겼으니 신에게 제사 지내면 길하지 않겠느냐."
그러고는 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휘두르려는데 스님이 말하였다.
“내 이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안다. 마음을 편안히 하고 죽음을 맞도록 조금만 기다
려다오."
마침내 미륵보살을 염하였다.
“원컨대 그 곳에 나서 묘한 법문을 듣고 신통 지혜를 성취하여 이 땅에 도로 하생하여 먼
저 이 도적들부터 제도하고 그들에게 훌륭한 수행을 닦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는데, 그
발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천둥 번개가 치고 회오리바람에 나무가 부러지니 도적들이 깜짝
놀라 사죄하고 흩어졌다. 「본전 (本傳) 」

34. 고승의 진영 / 상국 배휴 (相國裴休)

상국 (相國) 배휴 (裴休) 는 하동 (河東) 사람인데, 신안 (新安) 태수 (太守) 로 있을 때
희운 (黃岫希運) 스님을 만났다. 희운스님은 처음에 황벽산에서 대중을 버리고 대안정사 (大
安精舍) 로 들어가 노역하는 무리들과 섞여 숨어 살았다.
공이 절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다가 소임자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슨 그림입니까?"
“고승의 진영 (眞影) 입니다."
“진영은 볼 만한데 고승은 어디 있습니까?"
소임자가 대답을 못하자 다시 물었다.
“이곳에 선 (禪) 닦는 사람은 없습니까?"
“요즘에 한 스님이 절에 들어와 막일을 하고 있는데 자못 선승같은 데가 있습니다."
공이 모셔오라 하여 스님이 이르자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였다.
“내게 마침 한 가지 물을 말이 있는데 스님네들이 말씀을 아끼시니, 대신 한말씀 해주십시
오."
스님이 물으십시오 하니, 공은 앞에 했던 질문을 똑같이 하였다. 스님이 “배휴!" 하고 낭랑
한 소리로 부르자 공이 “예!" 하는데 “어디 있느냐?" 하였다. 공이 당장에 그 뜻을 깨닫고
마치 상투 속 구슬을 찾은듯 기뻐하며 말하였다.
“스님께선 진짜 선지식이십니다. 이렇게도 분명하게 법을 보여주시면서 어째서 이런 데 숨
어 계십니까?"
이때부터 제자의 예를 올리고 다시 황벽산에 머무시기를 청하였다.
공은 조사의 심법을 훤히 깨치고 교학까지도 두루 꿰었으니, 제방 선사들은 모두 배상국은
황벽스님 문하에서 헛 나온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전등 (傳燈)」

35. 백련결사에서 공부한 거사 / 유정지 (劉程之)

진 (秦) 나라 유민 (遺民) 인 유씨 (劉氏) 는 이름이 정지 (程之) 이며 팽성 (彭城) 사람이
다. 한 (漢) 나라 초원왕 (楚元王) 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는 진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
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승상 환현 (桓玄) 과 태위 사안 (謝
安) 이 조정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여산 (廬山) 의 혜원 (慧遠) 스님을 찾아뵈
었다. 그 후 뇌차종 (雷次宗) 과 주속지 (周續之) 가 함께 와서 혜원스님과 살게 되었다.
혜원스님은 “여러분 모두는 아마도 정토에 노닐기 위해 여기에 왔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
내 그에게 결사문을 짓도록 명하여 이 일을 알리도록 하였다. 이 결사 〔白蓮社〕 의 인원
은 백여 명이나 되었고 그 중에 훌륭한 사람이 18명이었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
난 인물이었다.
그가 염불을 할 때면 언제나 자주색 금빛 몸을 한 아미타불이 그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부끄럽고 행복하여 슬피 울면서 말하였다.
“여래께서는 저의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고 저에게 옷을 덮어주십시오."
그러자 갑자기 부처님께서 나타나 이마를 어루만져주고 가사를 끌어다 그의 몸을 덮어주었
다.
뒷날 그는 또 꿈에 자기 몸이 칠보로 된 큰 못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못에는 백련
화 청련화가 어우러져 피어 있었으며 물은 맑고 맑아서 끝간 데가 보이지 않았다. 못 가운
데 한 사람이 있어서 못물을 가리키며, 8공덕수 (八功德水) 이니 마셔보라하기에 물을 마셔
보니 맛이 감미로왔다. 이윽고 꿈을 깨고 나서도 털구멍에서 신비한 향기가 나는 듯하였다.
그는 말했다. “이는 나에게 정토의 인연이 다가온 것이다. 누가 육화중 (六和衆:스님들을
가리킴) 을 위해 나를 증명해줄 수 있겠는가?" 조금 있으니 대중들이 모두 모여 들었다. 그
는 불상 앞에서 향을 사루고 재배한 뒤 축원하였다.
“제가 석가모니불께서 남기신 가르침으로 아미타불이 계심을 알게 되었으니 이 향은 마땅
히 먼저 석가모니부처님께 공양하고 다음에 아미타불께 공양하고 아울러 시방의 불보살님들
께 공양하옵니다.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정토에 가서 나게 하여 주십시오."
축원을 마치고 이 부딪치는 소리를 세번 내더니 장궤 합장한 채 죽었다. 「여산집(廬山集)」

36. 정토수행을 한 거사 / 왕일휴 (王日休)

왕일휴 (王日休) 거사는 용서 (龍舒) 사람인데 품행이 단정하여 젊어서 국학 (國學) 에 임
명되었다. 그러나 문득 “서방정토에 귀의함이 최고의 일이로다" 하고 탄식하였다. 이때부터
베옷에 채소밥을 먹으며 매일 천배 (千拜) 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정토에 날 과업을 장엄하
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마음이 순일한데 더 고행을 할 것까지야 없지
않습니까?" 하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경에 말하기를 적은 복덕을 닦은 인연으로는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 하였으니 한 마음으
로 고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생한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거사는 집에 있을 때에도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으며 앉아서는 반드시 좌선을 하고 누
울 때는 의관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얼굴과 눈에서는 빛이 났으므로 보는 사람들은 그를
도인이라고 믿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두루 친지들과 작별하면서 정토수행을 힘써
닦으라고 부탁하였다. 밤이 되자 소리를 가다듬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다가, “부처님께서
나를 맞으러 오신다!"고 외치며 우뚝 선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운병섭윤적기 (怡雲幷 允迪記)」

37. 좌선의 요법 / 정상좌 (靜上坐)

정상좌 (靜上坐:國淸師靜) 는 처음에 현사 (玄沙師備:825∼905) 스님을 뵙고 오묘한 종지를
얻은 뒤 천태산에 살았다. 30년 동안 한번도 산을 내려오지 않고 3학을 폭넓게 공부하여 깨
끗한 수행으로 고고하게 살았다. 한번은 선을 닦는 이가 물었다.
“좌선할 때면 생각 〔心念〕 이 갈래갈래 흩어집니다. 스님께서 지도 좀 해주십시오."
정상좌가 대답하였다.
“그대는 생각이 흩어지는 그 때, 흩어져 달아나는 바로 그 생각으로 흩어져 가는 곳을 찾
아 보아라. 찾아 보아도 가는 곳이 없다면 흩어지는 생각이 어디 있겠느냐? 찾는 그 마음을
돌이켜 찾는다면 찾는 그 마음은 또 어떻게 있겠느냐?
또한 비추는 지혜 〔能照之智〕 도 본래 공 (空) 하며 연 (緣) 이 되는 대상 〔所綠之境〕
도 고요한 것이다. 따라서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음은 고요한 주체가 없기 때문이며, 생
각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음은 비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주관과 대상이 다 고요하면 마음
이 편안해지니 이것이 마음 근원으로 돌아가는 긴요한 방편이다."

38. 노자의 도를 닦다가 불법을 만나다 / 오설초 (吳契初)

도사 (道君) 오설초 (吳契初) 는 주 (州) 주양 (朱陽) 사람이다. 하청 (河淸) 군수로 있
다가 중앙관서에서 보낸 사자의 탄핵을 받고 숭산 (嵩山) 에 숨었는데 거기서 석태 (石泰)
선생을 만났다. 오설초가 묻기를 “노자의 가르침 〔虛無之道〕 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하
니 석태선생이 말하였다.
“선각 (先覺) 의 말씀에 의하면 다섯 가지 무루법 〔五無庄法〕 이 있다. 첫째 눈으로 보지
않으면 혼 (魂) 이 간장에 있게 되고, 둘째 귀로 듣지 않으면 정기 (精氣) 가 신장에 있게
되며, 셋째 혀로 말을 하지 않으면 정신 (精神) 이 심장에 있게 되고, 넷째 코로 냄새를 맡
지 않으면 넋 〔魄〕 이 폐에 있게 되며, 다섯째, 사지를 움직이지 않으면 의지 〔意〕 가
비장에 있게 된다. 이 다섯 가지가 서로 융합하여 하나의 기 (氣) 가 되어 3관 (三關, 人體
의 3대 요소) 에 모이면 이것을 연홍 (鉛汞) 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연홍은 몸안에서 구해
지는 것이어서 다른 데서 구할 필요가 없다."
오설초는 이 비결을 전해받고 나서 오랜 노력 끝에 공부가 성취되었다. 한번은 우연히 서악
(西岳) 에 갔다가 자양진인 (紫陽眞人) 을 만났다. 자양진인이 말하기를, “그대가 얻은 바
가 훌륭하기는 하나 만일 성품도리를 밝히지 못하면 헛수고일 뿐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하니, 오설초가 말하였다. “나는 2기 (二氣:음양) 를 황도 (黃道:태양이나 인체음양의 운행
법칙) 에서 추적할 수 있고 3성 (三性, 心中의 三精) 을 원궁 (元宮, 단전) 에 모을 수 있어
서 어떤 경계를 대하여도 여여하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데 더 이상 무슨 성품도리를 운운
하는가." 그러자 자양진인이 원각경 (圓覺脛) 을 보여 주면서 “이것이 불교의 심종 (心宗)
인데 깊이 음미해 본다면 뒷날 나아갈 길을 알게 될 것이고 내 말이 빈 말이 아님을 믿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설초는 마침내 그 말을 믿고 받았는데, 하루는 “적정 (寂靜) 하기 때문에 시방 여래의 마
음이 거울 속에 상이 비치듯이 그 가운데 뚜렷이 드러난다" 한 대목을 읽다가 문득 감탄하
면서 “이제까지는 내가 문을 닫고 살아 왔는데 오늘에사 팔을 휘저으며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선 법회를 두루 돌아다니며 의심을 묻고 결택하곤 하였는데 나중에 동선 법종 (東
禪法) 선사를 뵙고 물었다.
“불성이 엄연히 드러나 있건만 상 (相) 에 집착하여 미혹한 생각 〔情〕 을 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우니 만약 본래 ‘나'가 없음을 깨달으면 내 얼굴은 부처님의 얼굴과 어찌됩니까?
학인들이 깨달았다고 하면 깨달은 것이겠지만 어찌해서 부처님 얼굴을 보지 못합니까?"
그 말을 듣자 동선선사는 주장자를 뽑아들고 오설초를 두들겨 내쫓아 버렸다. 오설초가 막
문을 열고 나서는데 활짝 깨닫고는 송 (頌) 을 지었다.

조사의 기봉을 단번에 간파하니
눈을 뜨고 감음이 한결같도다
이로부터 성인이고 범인이고 다 없어져
대천세계는 원래 털끝 만한 거리도 없다.
驀然 破祖師機 開眼還同合眼時
從此聖凡俱喪盡 大千元不隔毫魄 「선원유사 (仙遺遺事)」

39. 목선암 (木禪艤) / 대수 법진 (大隋法眞) 선사

대수사 (大隋寺) 법진 (法眞 834∼919) 선사는 신주 (梓州) 사람이며 염정왕씨 (亭王氏)
자손으로 원래 벼슬이 높은 집안이었다. 젊어서 숙세 인연을 깨닫고 뜻을 세워 스승을 찾아
나섰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약산 도오 (藥山道吾) 선사를 뵌 뒤, 대위산 (大山) 영우 (靈祐)
선사를 찾아 뵙고 대중 속에 끼어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배불리 먹지 않고 따뜻한 곳에 잠
자지 않으면서 맑은 고행과 철저한 수행으로 실천과 지조가 남달랐으므로, 영우선사가 늘
그의 근기를 인정하였다. 하루는 대위선사가 물었다.
“자네는 이곳에 와서 왜 한 마디 법도 묻지 않는가?"
“무엇에다 입을 열어야 하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무엇이 부처냐고 묻지 그러느냐?"
진 (眞) 선사가 손으로 대위선사의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자 대위선사는 “그대는 참으로
도의 진수 (眞髓) 를 얻었구나"하고 감탄하였다.
그후 서촉 (西蜀) 으로 돌아가 도수 ( 水) 가에서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그들
모두에게 차를 끓여주곤 하면서 3년을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뒷산에 올라가 옛절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름이 대수사 (大隋寺) 였다. 그 산에는 둘레가 네 길 〔丈〕 되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남쪽으로 문이 하나 나 있어 도끼나 칼을 빌리지 않고도 그대로가 암자였다.
선사가 마침내 이곳에 살게 되니 세상 사람들은 그 곳을 글자 그대로 ‘목선암 (木禪庵) '
이라고 불렀다.
혼자 그곳에 살기 십여 년에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서 촉왕 (蜀王) 이 세번이나 불렀으나 들
어주지 않으니, 왕은 선사의 고고한 도풍을 우러러볼 뿐 한번 만나볼 길이 없었다. 내시를
보내 스님에게 호와 사액 (寺額) 을 하사하였지만 받지 않았고 무려 세번을 보냈으나 확고
부동하게 거절하였다. 촉왕은 다시 사람을 보내면서 칙명을 내려 이번에도 전처럼 받지 않
는다면 그대를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가 다시 찾아가 간절히 절하면서 “스님께서 받지 않
으시면 제가 죽습니다"라고 하니 선사는 그제서야 받았다.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하였다.
“나는 명리를 위해서 여기 온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얻고자 할 뿐이다. 백운청산 속에
서 시비를 쫓지 말지니 업보로 받은 이 몸을 벗어버리면 풀 한 포기도 먹지 못할 것이다.
선승들이여, 내가 행각할 때에 여러 총림에 가 보면 많게는 천명, 적어도 2백명의 대중이 있
었다. 그곳에서 동안거, 하안거를 보냈으나 깨닫지 못하고 공연히 시간만 보내다가, 위산스
님 회중에 가서 7년 동안 밥을 짓고 동산 (洞山) 스님 회중에서 3년 나무를 했다. 그 중에서
나를 중하게 대하는 곳이 있으면 얼른 떠나 버렸으니, 그 때는 오직 나 자신이 깨달을 생각
뿐 남의 일은 상관하지 않았다.
불보살 같은 분들도 모두 오랜 세월을 각고해서야 비로소 성취하였는데, 오늘날의 여러분들
은 얼마만큼 각고했길래 ‘나는 출세간법을 깨달았노라'고 하는가. 세간법도 아직 깨닫지
못한 처지에 조그마한 경계라도 경험하면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어쩔 줄을 모르
니, 무슨 해탈법을 설하겠는가? 길다란 선상에 앉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신도들의
시주물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내가 수행한 영험이 이와 같다' 하니, 이는 자
기를 속일 뿐 아니라 모든 부처님까지도 속이는 것이다.
이미 가사 〔三衣〕 를 입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해서 생사대사를 해결해야지, 또 다시 6
도윤회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재한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무슨 화탕지옥, 노탕지옥에
들어가느니 혹은 말 뱃속, 당나귀 뱃속에 들어가느니를 논할 것이 있겠느냐. 이런 경지에는
맛난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맛이 있겠지만 아직 이러한 경지를 얻지 못했다면 정말로 이런
과보를 받는다. 한번 사람 몸을 잃어버리면 다시 오늘같이 인간에 태어나고자 해도 만에 하
나도 어려운 일이다. 듣지 못했는가? 옛 스님이 어느 스님에게 묻기를, ‘무슨 일이 가장 괴
로운 일이냐?"라고 하니 「지옥업보를 받는 일이 가장 고통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그 스님
은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아직 고통이라 할 수 없다. 출가하여 도를 밝히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런 일이다'라고 하셨다. 옛 스님의 이런 말씀은 참으로 간절한 말씀이니 명심하
고 때때로 경책해서 후회없도록 해야 한다." 「어록 (語錄)」

40. 수도자는 가난해야 한다 / 광혜 원련 (廣慧元璉) 선사

광혜 원련 (廣慧元璉:951∼1036,, 임제종, 수산성념의 법사) 선사가 대중에게 설법할 때면
늘 사람들에게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간소하게 하라고 하였다. 또 언젠가
는 “만약 도를 배우려거든 먼저 가난과 고생 속에서 힘써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
고는 도를 이루려고 하여도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다.
원련선사는 입적할 때 대중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내가 평소 너희에게 재물과 이익을 멀리하고 먹고 입는 것을 소박하게 하면 반드시 도업
(道業) 을 이룰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무슨 까닭인가? 모든 죄업은 재물 때문에 생겨나고 모
든 더러움은 입과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 동안 재물을 모으지 않았고 대중들
과 따로 밥을 먹지 않았으니, 그것이 내 분수 밖의 일이어서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어버이를 작별하고 출가하여 마음을 알고 근원을 통달해서 무위법 (無爲法) 을 깨닫고자 하
면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걸식으로 만족하며 하루 한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