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화개동에서 햇차를 맛보다

작성자
maha
작성일
2018-02-06 18:23
조회
211
내가 기대고 있는 이 산골은 일년 사계절 중에서 봄철이 가장 메마르고 삭막하다. 2월에서 5월에 이르기까지 산골짝에 내려 꽂히면서 회오리를 일으키는 영동 산간지방 특유의 바람 때문에 부드러운 봄기운을 느낄 수가 없다. 이 고장 사람들의 무표정하고 건조한 때로는 무지막지한 인심이 이런 바람에 연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로 남녘에서 살아온 나는, 해안선을 따라 올라오는 바닷바람에 섞인 봄기운과 산자락을 굽이굽이 휘감고 불어오는 부드러운 바람에 익숙하다. 그러기 때문에 산골짝을 훑으며 휘젓는 거친 회오리는 낯설기만 하다. 3,4월은 오두막을 자주 비우고 남쪽으로 떠도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엊그제는 지리산 자락에 있는 다원(茶園)을 여기저기 어슬렁거렸다. 곡우절을 전후한 요즘이 한창 첫물 차를 딸 때다.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차나무를 심고 가꾸어 온 연고지답게, 쌍계사가 있는 화개동 일대에는 근래 많은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40여 년 전 내가 이 골짝에서 살 때는 야생 차나무 외에 다원은 따로 없었다. 그 무렵에는 절에서 차를 마시는 스님들도 아주 드물었다.

요즘에 견주어보면 말 그대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든다. 경사진 차밭에서 삼삼 오오 아주머니들이 흰수건을 쓰고 차를 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어떤 일보다도 보기 좋은 풍경이다. 차를 따는 그 모습이 결코 노동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만치서 바라보면 다른 세상 사람들이 차밭에 내려와 진양조 가락에 너울너울 춤을 추는 것 같다.

야생차라고 해서 다 좋을 수는 없다. 차나무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육에 따른 알맞은 토양과 기상이 받쳐주어야 제대로 된 맛과 향기와 빛을 지닐 수 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차의 산지에 가서 보면 기온차가 심한 고지에서 생산된 차를 으뜸으로 친다.

동인도 다질링에서는 표고 9백에서 2천4백미터의 고지에서 차를 수확한다. 해발 8천6백 미터의 칸첸중가 히말라야, 장엄한 설산을 배경으로 차를 따고 있는 모습은 이 세상 풍경 같지 않다. 나는 몇 해 전 그곳을 여행하면서 차 따는 풍경을 하루 종일 바라보았다. 설산 앞에서 안복(眼福)을 누리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풋풋하게 간직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주로 홍차를 만드는데, 차의 수확기간이 1년 중 약 2백일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고급차는 봄 여름 가을 중에서도 각기 10일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채취된 어린 잎으로 만든다.

뉴델리의 네타지 수바쉬 거리에 있는 '압 키 파산드(Aap Ki Pasand)'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고급 홍차 판매점이다. 이 가게에 있는 차 감정인은 와인의 세계에서 말하는 와인 테이스터와 비교할 만하다. 이 가게에서는 고급 홍차만을 선별해 놓았는데 그 종류와 브랜드가 아주 다양해서 20여 종이나 된다.

가게 주인이 가장 향기로운 차로 권한 '스프링 버드(Spring Bird)'는 그 맛과 향기에 눈이 번쩍 띄었다. 아하, 이게 바로 히말라야의 맛이요, 향기로구나 싶었다. 내 생애 중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좋은 홍차였다.

이런 차는 아무 것도 가미하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셔야 한다. 우리가 익숙하게 마시는 향기로운 녹차에 가까운 맛이다. 뉴델리에 가면 이 가게만은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그런 찻집이다.

10년 전 처음으로 인도 대륙에 발을 딛고 두어달 남짓 나그네 길에서 지칠대로 지친 끝에 인도양의 진주라고 하는, 혹은 눈물방울이라고도 하는 스리랑카에 갔었다. 실론티의 산지로 유명한 '누아라 에리아'는 해발 1천5백 고지에 있다. 경사진 차밭은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아름답다. 산중턱은 거의 차밭으로 가꾸어졌는데 정상으로 올라가니 구비구비마다 검은 피부색을 한 여인들이 무리 지어 차바구니를 메고 차를 따고 있었다. 그때 처음 본 풍경이라 두고두고 인상적이었다.

그때 한 제다공장에 들렀는데, 때마침 차잎을 말리는 그 구수한 차향기가 어찌나 좋던지, 인도 평원에서 지칠대로 지친 심신에 생기가 돌았다. 긴 항해로 멀미를 하다가 육지에 닿아 흙향기를 맡았을 때의 그런 느낌이었다.

화개동에는 차밭만이 아니라 차와 다기를 파는 가게가 줄줄이 이어져 있다. 차 고장다운 풍물이 아닐 수 없다. 몇 군데 기웃거리면서 햇차 맛도 보고 다기 구경도 했는데, 대부분 차를 건성으로 마시는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차일지라도 다루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차가 그 맛을 제대로 낼 수 없다. 모처럼 마시는 귀한 햇차인데 그 맛은 한결같이 맹탕이었다.

차의 덕이 맑고 고요함(淸寂)에 있다면 차를 다루는 사람 또한 그런 기품을 지녀야 차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것이다.

차를 마시려면 거기에 소용되는 그릇이 필요하다. 가게마다 다기들로 가득가득 쌓여 있지만 눈에 띄는 그릇을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 차를 모르는 사람들의 손으로 빚어진 그릇들이기 때문이다.

차를 마시기 위해 그릇이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릇의 아름다움이 차를 마시도록 이끌기도 한다. 그릇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마음에 맑음과 고요를 구하는 것과 같다.

차를 건성으로 마시지 말라. 차밭에서 한 잎 한 잎 따서 정성을 다해 만든 그 공을 생각하면서 마셔야 한다. 그래야 한 잔의 차를 통해 우리 산천이 지닌 그 맛과 향기와 빛깔도 함께 음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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