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다

작성자
busong
작성일
2018-02-06 19:04
조회
334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오다

지난 동안거 결젯날, 절에서 늦게까지 일을 보고 내 거처 로 돌아올 때였다. 오전에 비가 내렸다가 오후에는 개었는 데,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 접경에 들어서자 예전 표현으 로 맷방석만한 보름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을 안고 돌아오 는 길이 너무 충만해 마치 달을 향해 우주비 행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늦은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그와 같은 환상적인 우주비행 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피곤이 말끔히 가실 만큼 산뜻한 귀로였다.

늦은 시간에 돌아오니 적막강산에도 달빛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뜰은 달빛으로 인해 눈이 하얗게 쌓여 있는 것 같 았다. 서둘러 난로에 장작을 지펴 잠든 집을 깨웠다. 이 넓은 세상에서 내 몸 하나 기댈 곳을 찾아 이런 산중에 까지 찾아드는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든다. 이 또한 내가 일 찍부터 익힌 업이 아닐까 싶다. 다리 밑에서 거적을 뒤집어 쓰고 사는 거지도 제 멋에 산다고 하니까.

한 어머니는 가로, 세로 1미터 80센티미터 한 평의 공간에 서 요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아들이 공부하러 떠나 고 난 뒤 그가 거처하던 방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보니 눈 을 번찍이게 하는 틈새공간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소 그토 록 가지고 싶었던 '나만의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맨 먼저 기도실을 만들어 불화를 걸고 향로와 촛대를 올려 놓고 화병에 꽃을 꽂아 아침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한다. 시간과 남의 이목에 신경쓸 것 없이 기도하면서, 시시각각 으로 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염불이나 독경 소리에 담아 삭 여버린다.

두 번째는 화실 만들기, 컴퓨터 프린터가 있는 책상의 한 쪽을 이용해서 화판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스케치북과 화 구를 놓아두니 열 평의 화실이 부럽지 않은 공간이 된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남겨 준 한 평의 공간에서 이렇듯 조 촐한 행복을 만들어가고 있다. 작고 비좁은 곳에서도 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북인도의 오지인 라다크지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한 티베트 노인은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에 대해서 이와같이 말한다.

'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 와 재산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 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없 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 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의 가슴을 찌르는 명언이다. 물건과 재산만으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까.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많은 물 건과 편의시설 속에서 영양분도 많이 섭취하면서 잘 먹고 잘 입고 번쩍거리면서 산다. 그러나 만족할 줄도, 행복할 줄도 모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율도 높다.

티베트 노인의 말처럼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모자라서 가 아니라 너무 많아 넘치지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 는 데 어째서 그토록 넓고 크고 많은 것이 필요한가. 넘치 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오늘 우리 는 다시 배워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내 자신의 인간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 마나 높은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 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결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 람됨이다.

새 천년이 온다고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벌집을 쑤셔 놓 은 것처럼 떠들썩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한 장밖에 남지 않은 12월이다. 저마다 오던 길이 되돌아 보이는 길 목.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는가 를 스스로 묻는 그런 계절이기도하다. 그래서 12월을 가리 켜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이라고도 한다.

나를 필요로 하는 몇몇 곳에 다녀온 일이 떠오른다. 몽골 의 황량한 사막지대와 동토의 땅,시베리아를 지나 우랄산맥 을 넘고 볼가강을 건너는 길을 봄, 가을 두 차례 오고 갔 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태평양을 건너 옛 인디언의 땅 미 대륙의 동부를 다녀오기도 했다.

가는 데마다 우리말과 우리 음식과 우리 생활습관이 있어 지구가 한 동네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 고 움츠려 살고 있다. 어째서 그런지 그 까닭이 화두처럼 다가선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고 평소에 생 각해 온 바이지만 우리는 신의와 애정이 모자란다. 그것도 수준이하로 많이 모자란다.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선뜻 신 뢰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 경제상태가 다시 어려워진 것 도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 가 신의와 예절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는데 그 까닭이 있 을 것 같다. 우리는 이 겨울, 겸허한 마음으로 다시 첫걸음 부터 내딛어야 할 상황에 이른 것 같다.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 이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왔었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의 대답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요." 자신의 발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서 왔단다. 그에게는 뚜 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 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 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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