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5~8권

고승전1~4, 5~8, 9~12, 13~14

고승전 제5권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2. 의해 ②

1) 석도안(釋道安)
도안의 성은 위(衛)씨이다.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이름난 선비집안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외사촌형인 공(孔)씨가 도안을 양육하였다. 일곱 살에 책을 읽었으며, 두 번 보면 외울 수 있었다. 고을의 이웃 사람들이 감탄하고 기이하게 여겼다.
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정신과 지혜는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그러나 형상과 모습은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도안은 농사짓는 집의 노역으로 불려나가 3년이 되도록 부지런히 일하였다. 그러나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이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여, 재계(齋戒)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몇 해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아뢰어 경을 구하였다. 스승은 『변의경(辯意經)』한 권을 주었다. 이 책은 5천 글자 가량의 분량이었다. 도안은 경을 가지고 논에 들어갔다가, 쉬는 틈에 이것을 다 읽었다. 해가 저물어 돌아와서는 경을 스승에게 되돌려주며, 다시 다른 경을 찾았다. 이에 스승이 물었다.
“어제 준 경도 아직 읽지 못하였을 텐데, 지금 또 다른 것을 찾느냐?”
도안이 대답하였다.
“이미 암송하였습니다.”
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를 아직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한 권을 주었다. 그것은 일만 글자[一萬言]에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가지고 갔다.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되돌려주었다. 스승이 그를 잡고 이 경을 되풀이하게 하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이에 스승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달리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이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대로 사방을 떠돌아 다녔다. 업도(鄴都)에 이르렀다. 중사(中寺)에 들어가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다. 불도징은 만나자 감탄하여, 하루 종일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의 모습이 뛰어나지 않음을 보고, 모두가 함께 그를 가볍게 보아 괴이하게 여기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머나먼 식견은 너희들이 짝할 바가 아니다.”
이로 인하여 불도징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불도징이 강론하면 도안이 늘 거듭 강술하였다. 그러나 대중들은 아직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가 말하였다.
“다음 차례를 기다렸다가 곧 어려운 질문을 합시다. 그래서 저 곤륜자(崑崙子: 얼굴이 까맣고 몸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기를 죽여 버립시다.”
곧 도안이 뒤에 다시 거듭 강술하였다. 질의와 논란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안은 그 날카로운 칼날을 꺾고 시끄러운 문제를 해소하였다. 그러고도 행동에 남은 힘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얼굴이 새까만 도인[漆道人]이 사방 이웃을 놀래키는구나.”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자기가 듣고 본 것만을 고수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에 도안은 탄식하였다.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아무리 멀어졌다지만 현묘한 종지는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마땅히 그윽한 진리를 끝까지 궁구해야 한다. 멀리 미묘하고 오묘한 종지를 찾아 생멸 없는 진리를 말세에 선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떠돌아 숨어 다니는 무리들로 하여금 근본으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사방으로 떠돌아다니며 도를 묻고, 경전과 계율을 고루 살펴보았다.

그 후 난을 피하여 확택(濩澤)에 숨어살았다. 태양(太陽)의 축법제(竺法濟)와 병주(幷州)의 지담(支曇)이 『음지입경(陰持入經)』을 강의하였다. 도안은 뒤늦게 이들을 따라 수업하였다.
얼마 안 되어 동학인 축법태(竺法汰)와 함께 비룡산에서 휴식하였다. 승선(僧先)과 도호(道護)가 이미 그 산에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하였다. 곧 함께 글을 펴보고 생각을 기탁하니, 미묘함이 정신[神情]에서 우러나왔다.
그 후 도안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항산(恒山)에 절과 탑을 창립하였다. 옷을 바꾸어 입고 교화를 따르는 사람이 하북(河北) 일대를 반으로 나눌 정도였다.
그때 무읍(武邑)의 태수 노흠(盧歆)이 도안이 맑고 빼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민견(敏見)을 시켜 간절히 설법을 요청하였다. 도안이 아무리 사양하여도 면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요청을 받아들여 강의를 열었다. 그 내용이 명실상부하자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며 사모하였다.

45세가 되자 다시 기부(冀部:河北省)로 돌아와 수도사(受都寺)에 머물렀다. 문도 대중 수백 명에게 늘 법의 교화를 베풀었다.
이때 석호(石虎)1)가 죽자, 팽성왕(彭城王) 석준(石遵)이 그 정통성을 이어받아 후사를 세웠다. 중사(中使: 궁중의 사신) 축창포(竺昌蒲)를 파견하였다. 도안을 화림원(華林園)에 들어오도록 초청하고 널리 승방과 요사를 수리하였다.
도안은 석씨들의 말기에 나라 운세가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알았다. 곧 서쪽 견구산(牽口山)으로 갔다. 염민(冉閔)의 난이 일어나 인정이 어수선하였다. 도안은 이에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하늘의 재앙으로 가뭄과 메뚜기떼가 심하고 노략질하는 도적들이 종횡한다. 모여도 안 되지만 흩어져서도 안 된다.”
마침내 다시 대중들을 거느리고 왕옥산(王屋山) 여상산(女牀山)으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황하를 건너 육혼산(陸渾山)으로 들어갔다. 나무열매를 먹으면서 배움을 닦았다.

이윽고 모용준(慕容俊)2)이 육혼 땅을 핍박하였다. 드디어 남쪽 양양(襄陽) 땅에 투신하였다. 길을 가다가 신야(新野)에 이르렀다. 도안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흉년을 만났으니, 나라 임금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불법의 일을 세우기 어렵다. 더욱이 교화의 바탕은 모름지기 널리 퍼뜨리는 데 있다.”
모두가 말하였다.
“법사의 가르침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법태(法汰)로 하여금 양주(楊州)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곳에는 군자(君子)가 많아 풍류를 좋아하고 숭상한다.”

법화(法和)가 촉(蜀:泗川省)으로 들어가니, 그곳의 산수가 한가함을 닦을 만하였다. 도안과 제자 혜원 등 4백여 명은 황하를 건넜다. 밤길을 가다 우레와 소낙비를 만나, 번개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에 먼저 가던 사람이 인가를 발견하였다. 문 안에 두 필의 말이 있으며, 처마 기둥 사이에 한 섬의 곡식이 들어갈 만한 말 덮개가 매달려 있었다.
문득 도안이 불렀다.
“임백승아.”
주인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다. 과연 이름이 임백승(林百升)이었다. 주인은 그를 신인(神人)이라 생각하고 후하게 접대하였다. 이윽고 제자들이 어떻게 주인의 이름을 알았는지를 물었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나무가 둘이면 임(林)자이고, 말 덮개의 용량이 백 되[百升]이다. 그러니 이름이 임백승인 것이다.”

양양에 도달한 뒤에는 다시 불법을 베풀었다. 과거부터 불경을 번역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번역이때로 틀린 것이 있기에, 깊은 뜻이 은몰되어 아직 두루 통하지 못하였다. 매양 강설에 이를 때마다, 오직 그 대략의 뜻을 이야기하고는 읽어 넘길 뿐이었다. 도안은 경전을 읽으면서 궁구하여 깊고 먼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주석한 것으로 『반야도행경』ㆍ『밀적경(密跡經)』ㆍ『안반경(安般經)』등 여러 경전이 있다. 모두가 본 문장을 찾아 문구를 비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다 수록하였다. 이어 의심나는 곳을 분석하고 훤하게 풀이하여, 전부 스물두 권의 책이 되었다.
주석서는 서두에서 깊고 풍부한 내용을 이루어, 미묘하게 깊은 종지를 다하였다. 앞뒤의 조리가 일관되며 문리가 회통하였다. 경전의 내용이 극명해진 것은 도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온 것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경을 번역한 사람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후세 사람들이 추적하여 찾아보았으나 연대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도안은 곧 명목(名目)을 모두 모아 그 시대와 사람의 이름을 표시하고, 품(品)의 새 것과 옛 것을 가려내었다. 그래서 지어진 것이 『경록중경(經錄衆經)』이다. 경전에 근거가 있게 된 것은 실로 그의 공적으로 말미암은 일이다. 그러자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가서 그를 스승으로 삼았다.

당시 정서장군(征西將軍) 환랑자(桓朗子)가 강릉(江陵)에서 주둔하였다. 도안에게 요청하여 잠시 머물렀다. 주서(朱序)가 서쪽으로 가서 주둔하면서 다시 청하였다. 양양으로 돌아가 서로 깊이 인연을 맺고 받아들였다. 주서는 늘 찬탄하였다.
“도안 법사는 도학(道學)의 나루를 건너는 징검다리이자, 마음을 맑게 다스리는 주점이다.”

도안은 백마사(白馬寺)가 협소해지자, 다시 절을 세우고 단계사(檀溪寺)라 이름 지었다. 곧 청하(淸河) 장은(張殷)의 집이었다. 큰 부자와 장자들이 모두 찬조를 하였다. 5층탑과 4백 개의 승방을 세웠다. 양주자사(凉州刺史) 양홍충(楊弘忠)은 만 근의 구리를 보내서 승로반(承露盤)3)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승로반은 이미 태공(汰公)에게 맡겨 만들기를 끝마쳤습니다. 이 구리를 회향하여 불상을 주조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양홍충은 기뻐하며 공경히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대중들이 함께 재물을 추려내 희사해서 불상을 조성하였다.
광배가 1장 6척이고, 신령한 상호가 밝게 드러났다. 매일 저녁 빛을 발하여 전당(殿堂)이 환하게 빛났다. 또한 뒤에 불상이 스스로 걸어가서 만산(萬山)에 이르렀다. 온 고을 사람이 찾아가 우러러 예를 올리고, 옮겨서 절로 돌아왔다.
도안은 이미 큰 서원이 성취되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저녁에 죽는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부견(符堅)이 사신을 보내었다. 외국의 금박(金箔)을 입힌 높이 일곱 자의 기댄 자세의 불상과 금불좌상과 구슬로 꿰어 만든 미륵상, 금실로 수놓은 불상, 직물로 만든 불상을 각기 하나씩 보내왔다.
강회(講會)나 법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존상들을 나열하고, 당기(幢旗)와 번기(幡旗)를 배치하였다. 구슬과 노리개가 번갈아 가며 빛나고, 장식한 꽃들이 활짝 피어났다. 계단을 오르고 문턱을 밟는 사람들로 하여금 엄숙하게 경의를 다하게 하였다.

외국에서 건너온 구리로 만든 불상이 있었다. 제작의 형식이 예스럽고 기이하였다. 당시 대중들은 그렇게 공경하고 존중하지 않았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의 형태는 아름답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육계(肉髻)의 형태가 맞지 않습니다.”
곧 제자로 하여금 그 육계를 화로에 녹여서 고치게 하였다. 그런데 광명의 불꽃이 빛나게 뻗어 나와 법당 안에 가득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살펴보니 육계 속에 한 사리가 보였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부끄러워 감복하였다. 도안이 말하였다.
“불상이 이미 신령하고 기이하니 다시 번거롭게 고칠 필요가 없겠습니다.”
그리고는 곧 그 일을 중지하였다. 이에 알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도안은 사리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짐짓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당시 양양에 습착치(習鑿齒)란 사람이 있었다. 날카로운 말솜씨는 하늘에서 타고난 듯 뛰어나서, 당시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였다. 그가 먼저 도안의 높은 명성을 듣고 일찌감치 편지를 보내 호감을 표하였다.
“듣건대 진실에 응하여 바른 길을 밟아 밝고 환하게 명백하게 안으로 밝으신 분이며, 자비의 가르침을 거듭 비춰주시어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음덕을 입는다 합니다.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4백여 년입니다. 변방의 왕이나 거사들이때로 받든 사람이 있고, 중국[眞丹]의 숙천(宿川)에서 이보다 더 앞선 시대에 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도의 운행은 시대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서, 세속에서는 아직 모두들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도업의 융성함에는 모두가 짝을 이룰 길이 없습니다. 이른바 달빛이 나오려 할 때 신령한 발우(鉢盂)가 감응하여 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법사의 임무는 홍범(洪範)4)에 해당하며, 그 교화는 그윽이 깊은 곳을 적셔줍니다. 이곳의 모든 승려들에게는 다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약 경사로운 구름[慶雲]이 동쪽으로 흐르듯, 마니주(摩尼珠)의 빛남을 돌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 7보의 자리에 오르시어, 잠시 명철한 등불을 밝히시고, 풍성한 초목[豊草:衆生]에 감로의 비를 내려주십시오. 양자강 기슭에 전단(旃檀)나무를 심으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다시 드높아질 것이며, 현오한 물결이 일렁이고 넘쳐서 거듭 한 시대를 휩쓸 것입니다.”
이 편지의 글은 많아서 여기에 모두 싣지 않는다.

그 후 도안이 그곳에 이르러 머문다는 말을 들었다. 습착치는 곧 도안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하였다.
“사해(四海) 습착치요.”
도안이 말하였다.
“하늘 가득[彌天] 석도안(釋道安)이요.”
당시 사람들은 명답이라 하였다.
그 후 습착치는 배[梨] 열 개를 선물로 보냈다. 마침 대중들의 식사 때에 전해졌으므로, 도안은 손수 배를 쪼개어 나누었다. 배가 다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되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고평(高平)의 극초(郄超)는 심부름꾼을 시켜 천 섬의 쌀을 보냈다. 여러 장의 편지를 써서 깊이 은근한 마음을 전했다.
도안은 회답편지를 보냈다.
“쌀을 희사하시니 기다리는 분께 번뇌를 끼쳤음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습착치는 사안(謝安)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서 석도안을 만났습니다. 멀리까지 뛰어나서 평범한 도사가 아닙니다. 문도 수백 명이 재를 올리고 강의함에 게으르지 않습니다. 변화하는 기교와 방술로 보통 사람들의 귀와 눈을 미혹하는 일이 없습니다.
위세를 중시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일 없이도, 군소(群小) 종문들의 천차만별을 정돈하는 인물입니다. 그리하여 문도들이 엄숙하고 숙연하게 각자 서로 존경하여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이는 내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품은 이론은 간결하면서도 대부분 넓게 섭렵한 것이어서, 내외(內外)의 뭇 서적들을 대략은 두루 보았습니다. 음양ㆍ산수(算數)에도 모두 빼어납니다. 불경의 오묘한 이치[妙義]에는 자유자재로 능란하여, 논리의 펼침이 우법란(法蘭)과 법도(法道)와 비슷합니다.
한스러운 일은 그대와 같이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도 한 번 만나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늘 말합니다.”
당시의 현인들에게 중히 여겨진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번천(樊川)ㆍ면천(沔川:陜西省)에 있던 15년 동안에 해마다 늘 두 번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을 강의하였다. 한 번도 그만두거나 빠트린 일이 없었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는 그의 도풍을 듣고, 덕을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 문안을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보냈다.
“도안 법사는 기량과 식견이 도리에 통(通)한다. 도풍의 운치가 사물의 말단에도 밝다. 도에 살면서 속인들을 훈도하여 아름다운 공적을 아울러 쌓았다. 그러니 어찌 오직 현재의 세상만을 바로잡아 제도하겠는가? 바야흐로 미래의 세계까지 나루터를 구축한 분이다. 봉급은 모두 왕공(王公)과 같은 대우로 지급하고, 공물은 계신 곳에서 내도록 하라.”
당시 부견은 평소 도안의 명성을 듣고 늘 말하였다.
“양양에 석도안은 참으로 신령한 큰 그릇[神器]이다. 이 분을 모시어 짐을 보좌케 하고자 한다.”

그 후에 부비(符丕)를 파견하여 남쪽 땅 양양을 공략하였다. 도안과 주서(朱序)가 모두 부견에게 사로잡혔다. 이에 부견은 복야(僕射)인 권익(權翼)에게 말하였다.
“짐이 십만의 군사로 양양 땅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얻은 것은 오직 한 사람 반뿐이다.”
권익이 말하였다.
“누구누구입니까?”
부견이 말하였다.
“도안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가 반 사람이다.”
도안은 장안에 이르러 오중사(五重寺)에 머물렀다.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여 크게 법화를 넓혔다.
과거 위(魏)나라와 진나라(晋)의 사문들은 스승에 의거하여 자신의 성명을 지었다. 그런 까닭에 성씨(姓氏)가 각기 달랐다. 도안은 큰 스승의 근본으로서 석가모니를 따를 수 있는 이는 없다고 여겼다. 마침내 승려들의 성을 석(釋)씨로 지었다.
그 후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얻었다. 과연 그곳에서도 일컬었다.
“사방의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면, 다시 강물의 이름은 없어진다. 네 개의 성씨가 사문이 되었지만, 모두가 석씨의 종족으로 일컫는다.”
이렇게 경전의 말씀과도 부합되니, 마침내 영원한 법식으로 삼았다.

도안은 밖으로 많은 책을 섭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장안에서 의관을 갖춘 집안의 자제로서, 시(詩)와 부(賦:文體의 하나)를 하는 사람은 모두 그에게 의지하여 붙어서 명성을 이루었다.
당시 남전현(藍田縣)에서 하나의 큰 가마솥을 얻었다. 용량이 곡식 27섬(한 섬은 열 말)을 담을 수 있었다. 가장자리에 전서(篆書)로 글자를 새겨 놓았다.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것을 보였더니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옛 전서(篆書)로 노(魯)나라 양공(襄公)이 주조한 것이다.”
곧 예문(隸文)으로 베꼈다.

또 어떤 사람이 구리로 된 10말들이 그릇을 가지고 시장에서 팔았다. 그 모양이 똑바로 둥근 형이었다. 아래로 향하면 말로 사용하고 가로 놓인 다리 위로 치켜 올라간 부분은 되로 사용하였다.
낮은 쪽에 있는 것이 홉[合]이고, 다리의 한쪽머리는 피리이다. 피리는 종(鍾)과 같았다. 용량은 반 홉을 담을 만하다. 가장자리에 전서로 글자를 새겼다. 부견이 도안에게 물어보자 도안이 말하였다.
“이것은 왕망(王莽, 9~20)이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순(舜)임금의 황룡(皇龍) 무진(戊辰)년 단위를 개정하였습니다. 양을 같은 비율로 하여 사방에 이를 유포시켜서, 작고 큰 그릇을 고르게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공평히 취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많이 듣고 널리 앎이 이와 같았다. 부견은 학사들에게 명령하여, 내외의 경전에 의문이 있으면 모두 도안을 스승으로 삼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경조(京兆)에서 말이 나돌았다.
“배움에 도안을 스승으로 삼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는 맞추지 못한다.”

과거 부견은 석씨(石氏)의 난리를 이어받았다. 그렇지만 이때에 이르러 백성들의 호구 수가 풍부해지고 사방을 거의 평정하였다. 동쪽은 동해바다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구자국(龜玆國)을 병합하였다. 남쪽으로는 양양을 싸잡고, 북쪽으로는 사막을 모두 점령하였다. 오직 건업(建業) 한 모퉁이만 아직 항복받지 못하였다.
부견은 매양 자신을 섬기는 신하들에게 이야기하였다.
“늘 강남 지방을 평정하여, 진나라 황제를 복야(僕射)로 삼고 사안(謝安)을 시중(侍中)으로 삼고자 한다.”

부견의 아우인 평양공(平陽公) 부융(符融)과 조정대신 석월(石越)ㆍ원소(原紹) 등이 모두 간절하게 간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이들은 부견이 도안을 믿고 공경함을 알아, 마침내 함께 도안에게 청하였다.
“주상께서 장차 동남 지방에 일을 일으키려 한다. 그렇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창생들을 위하여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는가?”

때마침 부견이 동쪽 뜰로 나가면서 도안에게 명하여 가마에 올라 같이 가고자 하였다. 복야 권익이 간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천자의 가마에는 시중이 함께 타 모셔야 합니다. 도안은 사람의 형상을 허문 자입니다. 어떻게 천자 옆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부견은 발끈 성을 내고 얼굴빛을 고쳤다.
“도안의 도와 덕은 존경할 만하다. 짐은 천하와도 바꾸지 않겠다. 가마를 함께 타는 영예 정도로는 그의 덕에 걸맞지 않다.”
곧 복야에게 명령하여 도안을 부축해서 가마에 오르게 하였다. 이윽고 도안에게 말하였다.
“짐은 장차 그대와 남쪽 오월(吳越) 지방으로 떠돌고자 한다. 군대를 정비하여 순수(巡狩)5)하면서 회계(會稽)를 건너 동해를 바라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이에 도안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천명(天命)에 응해서 세상을 거느리십니다. 여덟 고을에서 바치는 부유함이 있고, 중토에 자리 잡아 사해를 제압하셨습니다. 정신을 함이 없는 세계에 깃들이신다면, 요임금이나 순임금과 나란히 하는 융성한 제왕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백만의 대군으로 가장 질 떨어지는 토지를 구하고 계십니다. 또한 동남지방의 지형은 땅이 낮고 기운이 사납습니다. 예전에 순임금ㆍ우임금도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진시황도 한 번 갔다가는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보건대 저의 어리석은 마음으로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평양공은 훌륭한 친척이고, 석월은 중신(重臣)입니다. 그들이 모두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오히려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경솔하고 얕은 견해의 말도 결코 윤허하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후한 예우를 받는 까닭에, 참된 충성[丹誠]을 다할 따름입니다.”

이에 부견이 말하였다.
“땅이 넓지 않다거나 백성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장차 천심을 가려내서 나라 운수의 소재를 밝히고자 할 뿐이다. 시운에 순응하여 순수(巡狩)하는 것은 전대의 전적에도 드러나 있다. 부처님 말씀과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제왕이 지방을 성찰한다는 글은 없는가?”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만약 천자의 가마를 반드시 움직이고자 한다면, 먼저 낙양(洛陽)으로 행차해 위세를 높이어 정예로움을 비축하십시오. 격문(檄文)을 강남땅으로 전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그때 토벌하더라도 늦지 않습니다.”
부견은 이 말에 따르지 않았다. 평양공 부융 등 정예군 25만 명을 파견하여 선봉[前鋒]으로 삼았다. 부견이 몸소 보병과 기병 60만 명을 거느렸다.

이즈음 진(晋)나라는 정로장군(征虜將軍) 사석(謝石)과 서주자사(徐州刺史) 사현(謝玄)을 파견하여 이에 항거하였다.
부견의 선봉대가 팔공산(八公山) 서쪽에서 크게 무너졌다. 진나라 군사가 패배를 뒤쫓아 30리를 쫓아왔다. 죽은 사람이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다. 부융은 말이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부견은 홀로 말을 타고 도망치니, 도안이 간언한 말과 같았다.

도안은 항상 여러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혹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서원하였다.
“만약 말한 것이 이치로부터 그다지 멀어지지 않는다면, 상서로움이 나타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곧 꿈에 머리는 하얗고 눈썹이 긴 오랑캐 도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그대가 주석을 단 경전은 매우 이치에 합당하오. 나는 열반에 들 수 없어서 서역에 머물고 있오. 마땅히 서로 도와 불법을 널리 전하여야 하므로, 때때로 식사나 마련해 주셨으면 하오.”
그 후 『십송률(十誦律)』이 이르렀다. 원공(遠公:慧遠)이 이에 스승님[和尙]께서 꿈꾸신 분이 빈두로(賓頭盧:佛弟子)임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마련하고 공양을 올리자 곳곳에서 법칙이 되었다.

도안은 이미 도덕에서 대중의 종사가 되었다. 배움에서 삼장(三藏)을 겸하였다. 승니(僧尼)들의 의궤와 규범과 불법의 헌장(憲章)을 조목 별로 나누어, 세 가지 사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행향(行香)ㆍ정좌(定座)ㆍ상경(上經)에 대한 법이고, 둘째는 평일의 육시행도(六時行道)와 음식(飮食)ㆍ창시(唱時)에 대한 법이며, 셋째는 포살(布薩)에 사람을 보내서 참회하고 허물을 뉘우치게 하는 따위의 법이다.
천하의 사찰에서 마침내 이것을 법칙으로 삼고 따랐다.

도안은 늘 제자인 법우(法遇) 등과 미륵불 앞에서 서원을 세워,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그 후 진(晋)의 건원 21년(364) 1월 27일에 갑자기 기이한 승려가 나타났다. 형상은 실로 평범하고 누추하였다. 그가 절을 찾아와 기숙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절의 승방은 이미 가득 차 잘 곳이 없으므로 강당에서 거처하였다.
당시 유나(維那)가 불전에서 숙직을 하였다. 밤에 이 승려가 창문 틈으로 출입하는 것을 보았다. 급히 이 사실을 도안에게 아뢰었다. 도안이 놀라 일어나서 예를 갖추어 문안을 드렸다. 그가 찾아온 뜻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서로를 위해서 왔노라.”

도안이 말하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죄가 깊습니다.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참으로 제도할 만하군. 그러나 잠간 성승(聖僧: 부처님)을 목욕시킨다면, 원하는 대로 반드시 결과가 있으리라.”
그리고는 자세히 목욕시키는 법을 보여주었다. 이에 도안은 다음 세상에 왕생할 곳을 물어보았다. 그가 하늘의 서북쪽 허공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 구름이 열리면서 도솔천의 미묘하고 뛰어난 세계가 보였다. 이 날 저녁 대중 수십 명이 모두 같이 이 광경을 보았다.
그 후 도안은 목욕도구를 마련하였다. 비상한 어린아이가 수십 명의 벗들과 나타났다. 절 안으로 들어와 놀다가 잠깐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과연 이것은 성스러운 응보라 하겠다.

그 해 2월 8일에 갑자기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는 떠날 것이다.”
이 날 식사를 마친 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성 안쪽 오급사(五級寺)에서 장사지냈다. 진(晋)의 태원(太元) 10년(382)의 일이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왕가(王嘉)
세상을 마치기 전에 은둔하는 선비인 왕가가 그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도안이 말하였다.
“세상일이란 이와 같은가 봅니다. 떠나려 함에 그대와 같은 분이 오셨습니다. 어떻습니까? 함께 떠나시겠습니까?”
왕가가 답하였다.
“참으로 그 말씀과 같지만은 먼저 떠나시구려. 나는 해결하지 못한 약간의 빚이 남아 있어서, 함께 떠날 수가 없구려.”
요장(姚萇:後秦의 王, 384~417)이 장안을 점거했을 때, 왕가는 일부러 성안에 남았다. 그때 요장은 부등(符登)과 매우 오랫동안 대치하였다. 요장이 왕가에게 물었다.
“짐이 곧 부등을 사로잡을 수 있겠는가?”
왕가가 대답하였다.
“거의 그럴 것이외다.”
요장이 진노하였다.
“그러면 그렇다 하면 될 것이지, 거의 그럴 것이란 다 뭐냐?”
마침내 왕가의 목을 베었다. 이것이 왕가가 말한 빚이다.

요장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마침내 부등을 죽였다. 요흥의 자(字)가 자략(子略)이다. 이것이 곧 왕가가 말한 ‘거의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왕가의 자(字)는 자년(子年)이며 낙양 사람이다. 형상과 모습이 비루하여 마치 모자라는 사람 같았다. 본래 익살스러워 남 웃기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며, 맑게 텅 비어 기(氣)를 마시고 살았다.
사람들은 모두 종사[宗]로 그를 섬겨, ‘운수가 좋을까, 나쁠까’를 찾아와 묻곤 하였다. 왕가는 사람에 따라 응답하였다. 그의 말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모습은 광대[調戱]와 같았다. 말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과 비슷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이 지나가고 나면 대부분 증명되었다.

처음에는 가미산(加眉山)에서 문도를 양성하였다. 부견(符堅)이 대홍려(大鴻臚:禮接官)를 파견해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부견이 남방을 정벌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 길흉을 물었으나 말해주지 않았다. 이어 사신의 말을 타고 거짓으로 동쪽으로 수백 보를 갔다. 신발과 모자를 땅에 떨어뜨리고 옷을 벗어 버리면서 말을 달려 돌아왔다. 이것으로써 수춘(壽春)에서 있을 부견의 패배를 암시하였다. 그의 선견지명이 이와 같았다.
요장이 왕가를 살해하던 날의 일이다. 어떤 사람이 언덕 위에서 왕가를 보았다는 글을 요장에게 보냈다. 도안의 왕가 같은 신인(神人)과의 은근한 계합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도안은 앞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서쪽 나라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함께 강론하고 분석하기를 염원하였다. 늘 부견에게 그를 모셔오기를 권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멀리서 도안의 풍모를 듣고, ‘이 사람은 동방의 성인이다’라고 생각하여, 항상 멀리서 그에게 예배하였다.
과거 도안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도안이 세상을 마친 16년 후에야 구마라집이 비로소 중국에 이르렀다. 도안과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한탄이 끝이 없었다.

도안은 일찍부터 경전을 독실하게 좋아하고, 뜻한 바가 법을 베푸는 데 있었다. 초청한 외국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ㆍ담마난제(曇摩難提)ㆍ승가발징(僧伽跋澄) 등이 수많은 경전을 번역한 것이 백만여 글자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법화(法和)와 더불어 소리와 글자를 가려내서 정하고, 글 뜻을 상세하게 파헤쳤다. 새로 나온 수많은 경전들이 이때에 바로잡혔다.
손작이 쓴 『명덕사문론(名德沙門論)』에 전한다.
“석도안은 사물에 너르고 재주가 있으며, 빼어나게 경전의 이치에 뛰어났다.”
또한 그를 위한 찬(贊)에 전한다.

만물이 넓고 넉넉하다면
사람은 본래 많은 것을 주재하는 법
깊고 깊은 석도안은
오로지 이를 겸하여 갑절로 더할 수 있어서

명성을 연과 농[汧隴:陜西]지방에 드날렸고
이름은 회수와 동해까지 치달렸으니
그의 형체는 비록 풀로 변하였으나
아직도 항상 살아 있는 것 같아라.

또 다른 기록에 전한다.
“하북지방에 따로 축도안(竺道安)이 있어 석도안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습착치가 편지를 축도안에게 보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도안은 본래 스승을 따른 축(竺)이란 성을 후에 석(釋)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세간에서는 그의 두 가지 성을 보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잘못이다.

2) 석법화(釋法和)
법화는 영양(榮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안과 같이 공부하여 공손과 겸양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논리의 벼리를 훌륭하게 표명하고, 의문 나고 막힌 점은 슬기롭게 풀이할 수 있었다.
석씨(石氏)의 난으로 인하여 문도들을 거느리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덕을 사모하는 파한(巴漢)의 선비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양양(襄陽)이 함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에서 관중으로 들어가 양평사(陽平寺)에 머물렀다. 그 후 금여곡(金輿谷)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도안과 더불어 산마루에 올라가, 눈길이 닿는 끝까지 두루 바라보다가 슬퍼하였다.
“이 산은 높이 솟아, 노닐며 바라보는 사람이 많네. 세월이 흘러 한 번 변화하면, 마침내 누가 이 산임을 헤아리겠나?”
이에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마음에 지닌 것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뒷사람들을 걱정하는가? 만약 지혜로운 마음이 싹트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퍼할 만한 일이다.”

그 후 도안과 함께 새로 나온 경전을 자세히 정리하고 글 뜻을 참작하여 바로잡았다.
이 무렵 위진(僞晋)의 왕 요서(姚緖)가 초청하여, 포판(蒲坂)에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그 후 조금 지나 제자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세속 안에서의 번뇌와 고루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라.”
곧 의복을 바로 하고 불상을 빙 돌아 예배하였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3) 축승랑(竺僧朗)
승랑은 경조(京兆)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떠돌면서 도를 물었다. 오랫동안 관중(關中)으로 돌아가 오로지 강설만을 맡았다.
어느 날 몇 사람과 함께 초청 받은 곳을 갔다. 도중에 문득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절 안에 옷과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의 말에 따라 곧 절로 돌아와 보니, 과연 도적이 있었다. 그의 전갈로 말미암아 잃은 것은 없었다.
승랑은 항상 푸성귀를 먹고 무명옷을 입었다. 뜻은 인간 세상 밖에서 즐겼다. 위진(僞秦)의 황시(皇始) 원년(384)에 태산(泰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사(隱士) 장충(張忠)과 숲 속에서 은둔하자는 기약을 맺고, 늘 함께 그곳에서 노닐었다. 후에 장충은 부견(符堅)의 부름을 받았다. 서울로 가다가 화음산(華陰山)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

이에 승랑은 금여곡(金輿谷) 곤륜산에 따로 정사를 세웠다. 아직도 이곳은 태산의 서북에 있는 하나의 암곡이다. 산봉우리가 높고 험준하며 수석(水石)이 굉장하다. 승랑은 처음 이곳에 승방을 축조할 때, 산의 아름다움을 다하도록 설계하여 절 안팎에 집 수십여 채를 지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이 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랑은 쉬지 않고 이들을 가르치면서, 힘들어도 피로해 하지 않았다.

진(秦)의 임금인 부견은 그의 덕을 평소에 흠모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랑은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으로써, 마침내 부름을 중지시켰다. 그러자 달마다 편지와 선물을 보내왔다. 부견이 후에 대중 승려를 숙청할 때, 곧 별도로 조서(詔書)를 내려 전하였다.
“승랑 법사는 지계와 도덕이 얼음이나 서리 같다. 배우는 무리들은 맑고 빼어나다. 곤륜산 한 곳만은 관례대로 수색하지 말라.”
그 후 후진(後秦)의 요흥(姚興)도 찬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연(燕)나라의 임금 모용덕(慕容德)도 승랑의 명성과 행실을 흠모하였다. 임시로 동제왕(東齊王)이라 부르게 하고, 두 고을의 조세(租稅)를 공급하였다. 승랑은 왕의 지위는 사양하고, 조세만을 취하여 복업을 일으켰다.

진(晋)의 효무황제(孝武皇帝, 373~396)는 편지를 보냈다. 북위(北魏)의 척발규(拓跋珪, 武帝, 386~409)도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그가 당시 사람들에게 공경 받음이 이와 같았다.
이 골짜기 안에는 예전부터 호랑이에 의한 재난이 많아, 항상 지팡이를 짚고 무리지어 다녔다. 승랑이 이곳에 자리 잡자 맹수들이 귀의하여 복종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돌아와도, 중도에 가로막히는 일이 없었다. 백성들이 감탄하여 끝없이 칭송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금여곡을 낭공곡(朗公谷)이라 부른다.

무릇 승랑을 찾아올 사람이 있으면, 몇 명이건 간에 손님이 당도하기 하루 전에 미리 알아, 제자들을 시켜 음식을 준비토록 하였다. 반드시 그의 말과 같은 결과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의 미리 내다보는 밝은 지혜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그는 나이 85세로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승돈(支僧敦)
당시 태산에는 또 지승돈이 있었다. 본래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릴 때 연롱(汧隴) 지방을 떠돌았다. 오랫동안 형주(荊州)와 옹주(雍州)에서 지냈다. 대승에 오묘하게 통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났다.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을 지었는데, 역시 세상에 전한다.

4) 축법태(竺法汰)
법태는 동완(東莞) 사람이다. 어려서 도안과 같이 배웠다. 비록 재능과 말솜씨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태와 풍모는 도안을 넘어섰다.
도안과 함께 난을 피하여 신야(新野)로 갔다. 도안이 무리를 나누어 법태에게 서울로 내려갈 것을 명하였다. 헤어질 때 도안이 말하였다.
“법사는 서북 지방에서 의식과 궤범으로써 펼치시오. 나는 동남쪽에서 교화를 넓히겠소. 그렇게 한다면 강호의 도술이 서로 바라보게 될 것이오. 청정한 인연으로 높은 모임에 이르는 것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나 기대할 수 있을 것이오.”
이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곧 제자 담일(曇一)ㆍ담이(曇二) 등 40여 명과 함께 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질병에 걸려 양구(陽口)에서 멈추었다.

당시 환온(桓溫)이 형주에 주둔하였다. 사람을 보내어 그곳을 지나가는지를 묻고는 탕약을 공급하였다. 도안도 또한 제자인 혜원(慧遠)을 형주로 내려보내어 문병하였다.
법태는 병이 조금 치유되자 환온을 찾아갔다. 환온은 법태와 함께 오래 이야기하고자 하여, 먼저 다른 여러 손님을 상대하였다. 그래서 아직 법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법태는 병세가 아직 완쾌되지 않았기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였다. 곧 가마를 타고서 곁방[廂]을 거쳐 돌아 나오며, 환온에게 알렸다.
“풍담(風痰)이 갑자기 발작하여 오래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곧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환온이 총총히 일어나 밖으로 나와서 법태를 접대하고 돌아갔다.

법태는 키가 8척으로 풍모와 자태가 볼 만하였다. 뱉어내는 말과 쌓은 학식으로, 문장이 난초의 향기와 같았다.
당시 사문인 도항(道恒)도 자못 재주와 힘이 있었다. 항상 마음이 없다는 논리[心無義]에 집착하여 그 논리가 크게 형주 땅에 행하였다. 이에 법태가 말하였다.
“이는 삿된 주장이다. 반드시 이를 타파해야만 한다.”
곧 크게 이름난 승려들을 모으고, 제자인 담일을 시켜 이를 비판하게 하였다. 경전에 근거하여 이끌고 어지럽게 분석하고 공박하였다. 그러나 도항은 그의 말솜씨에 힘입어 굴복하지 않았다. 해가 이미 저물어서 이튿날 아침에 다시 모였다.
혜원이 자리에 나아가 수 차례 비판하자, 관련된 문책[關責]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도항은 스스로 논리의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빛이 약간 달라지면서 털이개로 책상을 두드릴 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이에 혜원이 말하였다.
“빨라야 할 때 빠르지 않은 베틀의 북[杼軸]이라니, 그것을 어디에 쓰는가?”
좌석에 있던 사람이 모두 웃었다. 이에 마음이 없다는 논리가 여기에서 멎었다.

법태는 서울로 내려와 와관사(瓦官寺:在南京)에 머물렀다. 이에 진(晋)의 태종 간문제(簡文帝)가 깊이 공경하고 중히 여겨, 『방광반야경』을 강의하기를 청하였다. 대회를 연 날에 황제가 몸소 납시니, 왕후와 공경(公卿)들이 모두 모이지 않음이 없었다.
법태는 모습이나 이해력에서 보통 사람을 넘어섰기에,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개강하는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구경하고, 법문을 들으려는 선비와 아녀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문도들은 차례대로 줄지어 앉았다. 삼오(三吳: 지금의 江蘇省ㆍ浙江省 일대) 지방에서 보따리를 싸매고 찾아온 사람도 천여 명을 헤아렸다.
이 와관사란 절은 본래 하내(河內)의 산완공(山玩公)의 묘 근처에서 도자기를 굽던 곳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사문 혜력(慧力)이 나라에 요청하여 절로 삼았다. 오직 법당과 탑만이 있었다. 법태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다시 승방과 전우(殿宇)를 개척하였다. 뭇 일을 닦고 세웠다. 또한 중문(重門)을 세워서 땅의 형세에 어울리게 하였다.

여남왕(汝南王)의 세자인 사마종(司馬綜)의 저택이 절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마침 그가 절 옆으로 굴을 뚫어서 중문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법태는 개의치 않았다. 사마종이 깨달아 몸소 찾아와서 참회하고 사과하였다. 법태는 누워서 그를 맞으며,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행동하였다.
영군(領軍)인 왕흡(王洽)과 동정왕(東亭王) 사마순(司馬珣), 태부(太傅) 사안(謝安)도 모두 끝없이 그를 흠모하고 공경하였다.
죽음에 이르기 며칠 전에 문득 몸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곧 떠난다.”
진(晋)의 태원(太元) 12년(387)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는 68세이다.
열종(列宗) 효무황제(孝武皇帝)는 조서를 내렸다.
“법태는 도를 팔방에 퍼뜨렸고, 은택(恩澤)이 후예들에게 흘러 넘쳤다. 그러나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므로, 아픔이 가슴을 꿰뚫는다. 부의(賻儀)로 돈 십만 냥을 보낸다. 장사에 필요한 물자를 수요에 따라 갖추어 마련하라.”
손작은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처량한 바람이 숲을 흔들고
거문고 울음소리는 계곡에 아련하다.
시원하고 밝으신 법태여,
덕을 비교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담일(曇壹)ㆍ담이(曇二)
법태의 제자인 담일과 담이도 모두 경전의 논리를 널리 익혔다. 또 『노자(老子)』와 『주역』에도 빼어났다. 풍류를 좋아하여 혜원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담이는 젊어서 세상을 떠났다. 법태가 통곡하였다.
“하늘이 안회(顔回:孔子의 首弟子)를 데려갔구나.”
법태가 지은 의소(義疏)와 극초(郄超)에게 보낸, 본래 없음의 뜻을 논한[論本無義] 편지는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혹 세상에서는 말한다.
“법태는 도안의 제자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5) 석승선(釋僧先)
승선은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상산(常山)의 승연(僧淵)의 제자이다. 성품이 순수하고 소박하며 곧은 지조가 있었다. 사미 때 도안과 여관(旅館)에서 서로 만났다. 도안도 당시 아직 구족계를 받지 않았을 때이다. 서로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일들을 피력하였다. 그 정신과 기개가 강개(慷慨)하였다. 헤어질 때 서로 말하였다.
“만약 서로 커서 어른이 되더라도 함께 노닌 일을 잊지 말자.”
승선은 계를 받은 이후 정성껏 수행에 힘쓰고, 배움은 경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석(石)씨의 난을 만나 비룡산(飛龍山)에 숨어살았다. 생각은 바위와 골짜기에 노닐고, 뜻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얻는 데 두었다. 도안도 그 후 다시 그를 따라왔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자 흐뭇해하고 기뻐하면서 생각하였다.
‘예전의 맹서를 비로소 따랐구나.’
이로써 함께 글을 펴놓고 생각을 모으니, 새로운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이때 도안이 말하였다.
“선인들이 예전에 불경을 번역할 때에 도가 경전을 빌린 논리[先舊格義]는 이치에 대부분 어긋나네.”
승선이 말하였다.
“다시 분석하고 소요(逍遙)해야 마땅하지. 하지만 어찌 옛 선배들을 시비할 수 있겠는가?”
도안이 말하였다.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밝히려면, 마땅히 진리와 올바르게 일치되도록 하여야 하네. 진리의 북을 다투어 울림에 있어서, 어찌 앞서고 뒤서고 할 게 있겠는가?”
승선은 이에 법태 등과 함께 남쪽으로 갔다. 진평(晋平) 지방을 떠돌면서 도를 강의하고, 교화를 넓혔다. 그 후 양양으로 돌아와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호(道護)
도호도 기주(冀州) 사람이다. 그는 곧은 절개가 있고 지혜와 이해력이 있었다. 역시 비룡산에 숨어살았다. 도안 등을 만나자 함께 말하였다.
“조용한 곳에 살면서 속세를 떠나 늘 불법을 바로잡고 싶기는 하네. 하지만 어찌 산문에서 홀로 걸어 다니며 법륜의 수레바퀴를 그치게 해서야 되겠는가? 마땅히 각자 힘에 미치는 대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세.”
대중들이 모두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각기 교화를 행하였다. 그 후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6) 축승보(竺僧輔)
승보는 업군(鄴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행을 지키고 집념과 의지가 곧았다. 배움은 여러 논(論)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아울러 경전과 불법에 밝았다. 도가 이락(伊洛:伊水ㆍ洛水로 지금의 洛陽 지방) 지방에 떨쳤으며, 온 서울이 종사로서 그를 섬겼다.
서진(西晋)의 기근과 난리를 만나자, 승보는 석도안 등과 함께 확택(濩澤)에 은거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하여, 그윽하고 은미한 진리를 모두 훤하게 알았다.
그 후 형주의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간단한 푸성귀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높은 정성으로 예참을 수행하여,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불을 우러러 뵙기를 서원하였다.

당시 낭야왕(瑯琊王) 사마침(司馬忱)이 형주자사가 되었다. 승보의 곧고 소박한 정신에 의지하여 계사(戒師)가 되어달라고 청하여, 온 가문이 으뜸으로 받들었다.
그 후 죽기 이틀 전에 문득 말하였다.
“내일은 세상을 떠날 것이다.”
임종에 즈음하여서는 묘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게 감돌고, 범패소리가 울리며 어우러졌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달려오니, 찾아온 사람이 만 명을 헤아렸다.
이 날 오후가 되자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절 안에서 장사지내고, 승려들이 그를 위하여 탑을 세웠다.

7) 축승부(竺僧敷)
승부의 씨족은 아직 자세하지 않다. 배움은 뭇 경전에 뛰어나고, 특히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에 빼어났다.
서진(西晋) 말기의 난리에 강남으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성대하게 강석을 여니, 건업(建鄴)의 옛 승려들 치고 추대하고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같은 절에 있던 사문 도숭 역시 재능과 이해력이 버금갔다.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의 그윽함을 더듬어서 빼어나게 드러내는 능력에는 우리들이 미칠 바가 아니네.”

당시 외도의 학문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가 생각하였다.
‘마음과 정신에는 형상이 있으며[心神有形], 한낱 만물보다 묘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빼어난 말솜씨로 상대방을 꺾어 제압하였다. 이에 승부는 곧 『신무형론(神無形論)』을 지어 주장하였다.
“형상이 있으면 작용이 있다. 작용이 있으면 다함이 있다. 그러나 정신은 일찍이 다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형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말재간에 기대는 무리들은 서로 어지럽게 논쟁하였다. 그러다가 이치가 돌아갈 곳을 찾자 흡족하게 그를 믿고 복종하였다.
그 후 다시 『방광반야경』과 『도행반야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그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축법태가 도안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부 상인(上人)을 추억할 때마다 돌아다니던 일이 어제 같군. 그런데도 세상을 떠난 지 문득 여러 해가 되었네. 그와 맑게 이야기 나눈 날들을 생각할 때마다,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다네.
그대와 함께 그의 아름다움을 되새길 수 있기를 기대하였지. 그렇건만 어찌 하루아침에 영원히 세상을 달리할 줄 알았겠나? 깊은 통한의 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서 터득한 것과 경서를 펴서 찾아낸 공부는 참으로 도모하기 어려운 것이네.”
법태가 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주 승부의 논리를 진술하곤 하였다. 지금 미루어 찾건대, 그가 지은 글이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슬픈 일이라 하겠다.

8) 석담익(釋曇翼)
담익의 성은 요(姚)씨이다. 강(羌: 서쪽 오랑캐. 지금의 티베트) 지역 사람이다. 혹 기주(冀州) 사람이라고도 한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어려서는 계율 있는 행실로 칭찬을 받았다. 배움은 삼장에 뛰어나 문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촉군(蜀郡: 지금의 成都)을 경유(經遊)하자, 자사(刺史) 모거(毛璩)가 깊이 그를 중히 여겼다. 점심 공양을 마련하고 몸소 우러러 받들었다.
이때 담익이 밥 속에 한 톨의 곡식이 있는 것을 보고는 먼저 그것을 취하여 먹었다. 그러자 모거가 마음속으로 몰래 존경하고,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반드시 신심으로 바치는 보시를 저버릴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 천 섬의 쌀을 선물하였다. 담익은 이를 받아 나누어 보시하였다.

담익은 일찍이 도안을 따라 단계사(檀溪寺)에 있었다. 진(晋)의 장사태수(長沙太守) 등함(騰含)이 강릉에서 자기 집을 희사하였다. 절로 만들기 위해 도안에게 강령(綱領)이 될 승려를 구하였다. 도안이 담익에게 말하였다.
“형주(荊州)와 초나라의 백성들이 처음으로 스승을 찾는다. 교화를 이룩할 사람이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담익은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절을 만들어 세웠다. 곧 장사사(長沙寺)가 그것이다.

그 후 도적들이 번갈아 날뛰면서 한남(漢南) 땅을 침략하였다. 강릉 경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상명(上明)으로 피난하였다. 담익은 그곳에 절을 다시 세웠다. 도적 무리들이 소탕되자 다시 강릉으로 돌아왔다. 장사사를 수리하고, 참된 정성으로 기원하고 청하였다.
드디어 감응이 일어나서 사리가 나타났다. 금병에 담아 재(齋) 올리는 자리에 안치하였다. 담익은 곧 그 앞에 이마를 땅에 대어 예배하며 서원하였다.
“만약 이것이 금강(金剛)이 남긴 음덕[餘蔭]이라면, 원하옵나니 광명이 빛나게 하여주십시오.”
한밤중에 이르렀다. 오색의 광채가 병 속에서 점차 밖으로 나와 온 법당을 가득히 비추었다. 모든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여, 담익의 신령한 감응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음이 없었다. 부처님 당시와 마찬가지로 다시 비록 부란(富蘭) 등의 이교도들이 있다 할지라도, 이러한 상서를 본다면 역시 거짓됨을 되돌려 진실함에 귀의했을 것이다.

그 후 파릉(巴陵)의 군산(君山)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었다. 이곳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이른바 동정산(洞庭山)이라 하는 곳이다. 산 위에는 구멍이 있어서 오(吳)나라의 포산(苞山)과 통한다. 산이 일찍이 영묘하고 기이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몹시 그곳을 꺼려하였다.
담익이 사람들을 거느리고 그 산으로 들어갔다. 길에 수십 마리의 흰 뱀이 누워서,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담익은 물러나 머물던 곳으로 돌아왔다. 멀리 산신령을 청하여 예참을 올리면서 신에게 말하였다.
“나는 절을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는 것입니다. 원컨대 공덕을 함께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그 날 밤 곧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담익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삼보를 위하여 사용하신다면, 특별한 도움을 드리는 것이 기쁠 따름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이튿날 다시 산을 찾아가니, 길이 매우 깨끗하고 평탄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서 강의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왔다. 그 가운데 벌목하는 사람이 몰래 나무를 훔쳐가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돌아와 절 위에 이르니, 담익의 재목은 이미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몰래 훔쳐 사유물로 취한 것은 모두 관가에서 거두어갔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담익은 항상 한탄하였다.
“절을 세워 승려들은 충족되었으나 부처님의 형상이 아직도 적다.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부처님 모습의 신비한 상서로움은 여러 지방에 두루 깔려 있다. 그렇거늘 어찌 그런 감응이 없어 그 불상들을 모셔올 수 없단 말인가?”
이에 오로지 간절하고 측은하게 정성스러운 감응을 빌었다. 진(晋)의 태원(太元) 19년(393) 갑오해 2월 8일에 문득 한 불상이 성의 북쪽에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하늘에 충천하였다. 당시 백마사(白馬寺)의 승려들이 먼저 그곳에 가서 영접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담익이 그곳에 가서 공경하게 예불하고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아마도 아육왕의 이 불상은 우리 장사사(長沙寺)에 내려주신 것이리라.”
곧 세 사람의 제자를 시켜 받들어 영접하였다. 그러자 가볍게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일어나서 본사로 맞아 돌아왔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와 말의 굉음이 거리를 메웠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禪師)인 승가난타(僧伽難陀)가 촉(蜀)에서 내려와, 절에 들어와서 예배하였다. 불상의 광배 위에 범어로 새겨진 글자가 있음을 보고 곧 말하였다.
“이것은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입니다. 언제 이곳에 왔습니까?”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담익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던 날, 불상의 둥근 광배가 갑자기 신령스럽게 변화하더니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담익과 감응이 통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승위(僧衛)
당시 장사사(長沙寺)에는 또한 승위(僧衛)란 사문이 있었다. 학업이 매우 뛰어나 은중감(殷仲堪)6)이 소중히 여겼다. 특히 『십주론(十住論)』에 뛰어나서 그 논의 주해(注解)를 달았다.

9) 석법우(釋法遇)
법우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배움을 좋아하여 뜻이 고전문헌에 두터웠다. 그러나 성품이 멋대로 자랑하고 큰 소리를 쳐서, 옆에 아무도 없는 듯이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도안을 만나자 문득 믿고 굴복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깎고 도에 들어, 도안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윽한 교화에 씻기어 슬기로운 이해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본래의 마음을 꺾고서 겸허하게 덕을 이루었다. 의양태수(義陽太守) 완보(阮保)가 이 소식을 듣고 흠모하여 멀리서 좋은 벗의 의리를 맺고자 하였다. 편지로 서로의 사귐을 나누고, 보시를 보내는 것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양양(襄陽)이 침략을 당하자, 법우는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니, 수업하는 사람이 4백여 명이었다.
당시 어떤 승려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향공양을 올리는[燒香] 소임을 하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법우는 다만 그에게 벌만 내리고 내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도안이 멀리서 들었다. 대나무 통에 곤장 하나를 담아 손수 봉함을 하고, 글을 써서 법우에게 보냈다. 법우가 봉한 것을 열었더니, 그 속에 곤장이 있음을 보았다. 곧 말하였다.
“이는 술을 마신 승려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나의 주의를 일깨우는 명령이 부지런하지 못하여, 먼 곳에 계시는 스승께서 근심을 담은 선물을 보내신 것이다.”

곧 유나에게 명하여 건추(犍槌)를 울려 대중을 모아놓고는, 곤장이 든 통을 향등(香橙) 위에 안치하였다. 행향(行香: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친 다음, 법우는 곧 일어났다. 대중 앞에 나가서 통(筒)을 향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에 땅에 엎드려 유나(維那: 절의 사물을 맡아 지휘하는 소임을 맡은 승려)에게 명하여 곤장을 세 번 내리치게 하였다. 곤장을 대나무 통 안에 넣고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를 꾸짖었다. 당시 경내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탄식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일에 힘쓰는 사람이 더욱 많아졌다.
조금 지나 혜원(慧遠)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사람됨이 미미하여 어둡고 모자라서 대중들을 잘 거느리지 못하였네. 스승님[和尙]께서 비록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계시지만, 오히려 먼 곳까지 근심과 염려를 드렸으니 나의 죄가 깊다네.”
그 후 그는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10) 석담휘(釋曇徽)
담휘는 하내(河內) 사람이다. 12세에 도안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도안이 그의 고상한 풍채를 가상히 생각하였다. 우선 책을 읽게 하니, 2ㆍ3년 안에 배움이 경전과 역사를 겸하였다. 열여섯 살에 비로소 머리 깎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오로지 불교의 논리에 힘썼다. 그윽이 엉킨 진리를 거울에 비추어보듯 헤아려서,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설할 수 있었다. 뜻하는 일이 높고 깨끗하였다. 또한 공손함과 양보함으로써 존중을 받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양양에 있었다. 부비(符丕)가 경내를 침범하였다. 곧 동쪽 형주로 내려가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도인과 속인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다. 늘 근본이 있음을 뒤돌아보았다. 마침내 도안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잊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이에 강릉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印手)보살7)에게 공경을 드렸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의 도에 의한 교화를 그대 스승[和上:道安]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담휘가 말하였다.
“스승님의 내부 행실이야 그 깊고 얕음을 쉽게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외부 인연에 미친 바는 대부분 모두가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한 방울의 물로 어찌 강이나 바다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진(晋)의 태원(太元) 20년(395)에 세상을 마쳤다. 죽음을 맞이한 날에도 몸에 별다른 병이 없었다. 당(堂)에 올라가 대중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이어 고별을 하고 식사를 끝냈다. 그런 뒤 방으로 돌아와, 오른편 겨드랑이를 대고 모로 누워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입본론(立本論)』 아홉 권과 「육식지귀(六識旨歸)」 12수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1) 석도립(釋道立)
도립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어려서 출가하여 도안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방광반야경』에 뛰어났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삼현학8)이 불교의 이론과 약간 상응한다 하여, 그것의 뜻을 자못 귀속시켰다. 성품이 맑고 텅 비어 세상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 후 도안을 따라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복주산(覆舟山:當陽東南玉泉寺의 뒷산)에 은거하였다. 홀로 바위굴에 거처하며 공양을 받지 않았다.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선정에 들어가면, 곧 7일 동안을 일어서지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자주 있었다.
그 후 초여름에 담휘는 문득 산에서 내려왔다. 대중 승려들을 모아놓고 스스로 『대품경(大品經)』을 강의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가을까지만 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품던 생각을 거칠게나마 끝마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자일(自恣日:陰 7월 16일) 뒤 며칠이 지나서, 과연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당시 사람들은 천명을 아신 분이라고 일컬었다.

12) 석담계(釋曇戒)
담계는 일명 혜정(慧精)이라고도 한다. 성은 탁(卓)씨이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진(晋)의 외병부(外兵部) 극양(棘陽) 수령 잠(潛)의 동생이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배움에 힘써서 마음을 고전 서적에서 노닐었다.
후에 법도(法道)가 『방광반야경』을 강의한다는 말을 들었다. 옷을 빌려 입고 가서 한 번 들었다. 마침내 불교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속인 생활을 그만두었다. 도를 따라 도안에게 엎드려 스승으로 섬겼다. 삼장에 해박하게 뛰어나며, 5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평일에도 하루 5백 배로 예불하였다.

진(晋)의 임천왕(臨川王)이 몹시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후에 병이 위독해지자 항상 미륵불의 명호를 외웠다. 입에서 미륵불이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제자인 지생(智生)이 간호하다가 물었다.
“왜 안양정토(安養淨土)에 태어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담계가 말하였다.
“나는 스승님[和尙:道安]등 여덟 사람과 다 같이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였다. 스승님과 도원(道願) 등은 이미 모두 그곳에 왕생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 가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에 오직 염원할 뿐이다.”
말이 끝나자 광명이 그의 몸을 비추었다. 얼굴에 더욱 기쁨이 넘쳐흘렀다. 드디어 문득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그를 도안의 묘지 오른편에 장사지냈다.

13) 축법광(竺法曠)
법광의 성은 역(睪)씨이며 하비(下邳) 사람이다. 오흥(吳興)에 살았다. 일찍 부모를 잃고 양어머니를 섬겼다.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집이 가난하고 비축한 재산이 없어서 늘 몸소 밭을 갈아, 그것으로 어머니를 보양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상을 치를 때 예절을 다하였다. 그리고 복을 마치자 출가하였다.
축담인(竺曇印)을 스승으로 섬겼다. 담인은 밝고 슬기로우며 도의 행실이 있었다. 법광은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때까지, 머금은 기풍과 세운 지조가 우뚝하여 여느 사람들과 달랐다.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고 일을 편안히 여겨, 뜻과 행실이 깊고도 깊었다.
한 번은 담인의 병이 위독하였다. 법광이 곧 7일 밤낮을 정성으로 기도하며 예참하였다. 그러더니 7일째 되던 날, 문득 오색의 광명이 나타나 담인이 거처하는 방문을 비추었다. 담인은 마치 어떤 사람이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로써 괴롭던 병이 마침내 나았다.

그 후 스승 곁을 떠나 먼 곳으로 떠돌면서, 널리 경전의 요점을 찾았다. 돌아와 잠청산(潛靑山)의 석실에 머물렀다. 매양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뜻과 『무량수경(無量壽經)』의 정토의 인연으로써 늘 이 두 부의 경을 읽으면서, 대중이 있으면 강론하고, 혼자 있을 때는 암송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을 다스리자, 짐짓 그를 찾아와 공경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산중이 그윽이 깊고 막혀서 수레가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마를 산초(山椒) 나무 밑에 풀어놓고 봉우리를 넘어 걸어서 찾아왔다.

진(晋)의 간문황제(簡文皇帝)는 당읍태수(堂邑太守) 곡안원(曲安遠)을 파견하여 조서를 보내 일상생활을 위문하였다. 아울러 요상한 별이 나타난 일을 여쭈어, 법광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법광은 조서에 답신을 보냈다.
“예전에 송(宋:前宋)의 경제(景帝)가 복덕을 닦았더니, 요사한 기운의 별이 자리를 옮겼습니다. 폐하께서 등극하신 이래 정치와 형벌을 참으로 잘 닦으시고, 천하의 무거운 임무를 맡아 모든 일을 풍부하게 잘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나 털끝만큼만 잘못하여도 결과는 천 리의 차질이 생기는 법입니다. 마땅히 부지런히 덕(德)으로 다스림을 닦으시어, 하늘의 견책을 막아야 할 것입니다. 빈도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주상에게 보답하여야 하오나, 실로 마음은 있어도 힘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곧 제자들과 더불어 재(齋)를 올리고 예참을 하였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재난이 소멸되었다.

진(晋)의 흥녕 연간(363~365)에 동쪽 우혈(禹穴:會稽山)로 노닐며 산수를 관람하였다. 비로소 약야(若耶)의 고담(孤潭)에 머물렀다. 고개 옆 잿마루를 의지하여, 한적함에 깃들어 뜻을 기르고자 하였다. 극초(郄超)ㆍ사경서(謝慶緖) 등과 모두 세속 밖의 사귐을 맺었다.
당시 동쪽 나라 대부분에 돌림병이 휩쓸었다. 법광은 이미 어려서부터 자비를 익힌 데다, 아울러 신령한 주문[呪]에도 뛰어났다.
마침내 산촌 마을을 유행하면서 위급한 환자들을 구제하고, 곧 고을로 나와 창원사(昌原寺)에 머물렀다. 백성들 가운데 병이 있는 사람은 자주 이곳에서 기도하여 효험을 보았다. 이때 귀신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법광이 걸어가고 머무는 곳에는 항상 수십 명의 귀신이 그의 앞뒤를 호위한다.”

당시 축도린(竺道隣)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阿彌陀佛像)을 조성하였다. 법광은 곧 그와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큰 불전을 세웠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나무를 베다가 가뭄을 만났다. 법광이 주문을 외워 물이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진(晋)의 효무(孝武)황제가 바람결에 전하는 소문을 들었다. 흠모하여 서울로 나오라고 요청하였다. 스승의 예로 섬기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흥(元興) 원년(40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산기상시(散騎常侍) 고개지(顧愷之)가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고 한다.

14) 축도일(竺道壹)
도일의 성은 육(陸)씨이며 오(吳:江蘇省)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고 바르며 학업의 소양이 있었다. 그러나 자취를 감추고 지혜를 숨겨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와 함께 오래 거처하여야만 그가 신과 같이 빼어남을 알았다.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 형제도 깊이 공경을 더하여 섬겼다.
진(晋)의 태화(太和) 연간(366~370)에 서울로 나가서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법태에게 수학하였다. 몇 년 사이에 생각이 깊고도 깊은 곳까지 꿰뚫었다. 그러므로 강론할 때면 서울이 기울도록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법태의 제자 담일(曇一)도 우아한 도풍과 지조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담일을 대일(大一)이라 부르고, 도일을 소일(小壹)이라 불렀다.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서 당시에 강론의 종사가 되었다. 진의 간문(簡文)황제도 깊이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황제가 붕어할 무렵 법태도 죽었다. 그러자 도일은 곧 동쪽으로 돌아와 호구산(虎丘山:左蘇州)에 머물렀다. 학도들이 간절히 만류하였으나 멈추지 않았다. 이에 단양(丹陽)의 윤이(尹移)로 하여금 도일을 서울로 모셔오게 하였다.

도일이 회답하였다.
“무릇 제가 듣기로, 크나큰 도의 행실은 은둔을 아름답게 생각하여 그 뜻을 마음대로 펼치는 것이라 합니다. 요순의 태평성대에도 은둔자들에게서 그 본성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방편을 넓히는 일이야 바깥에 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먼 곳까지 이른 것에서는 세속을 밟지 않으려는 그들의 의지를 대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진(晋)나라의 광명이 밝아져서 덕의 가피는 소외된 곳이 없습니다. 불법에 높이 경례하여, 이를 넓히고 자라나게 하는 일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지역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만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장삼을 걸치고 석장을 흔들면서 달려와 천자의 도읍에 가득합니다.
모두가 애욕을 자르고 욕망을 버려, 맑고 그윽하게 마음을 씻고서, 멀리 텅 빈 세상을 기약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가 깊으면 항상 숨어살면서 뜻을 자비구제에 두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행하되 한 지방에 머물지 않으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되 오직 도에만 힘쓸 따름입니다. 비록 만물이 날짜 헤아림으로 유혹하여도 식자들은 해마다의 공적을 깨닫습니다.

지금 만약 그 속한 승적(僧籍)을 옮겨서 편호(編戶: 가난한 백성의 호적)에 들어가게 한다면, 아마도 사방을 떠도는 사람들이 성인의 세상에서 절벽을 바라보듯 할 것입니다. 거동을 가볍게 하는 무리들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아, 성대하고 밝은 기풍을 훼손하고 주상의 뜻을 잘못되게 할 것입니다.
또한 황복(荒服:邊方)의 손님은 궁궐[天臺]과 무관하며, 그윽한 풀숲 속에 사는 사람은 왕부(王府)에 글을 올리지 않는 법입니다. 다행히 시절을 살피시어 날아오르게 하시면, 훗날 모일 것입니다.”
도일은 이에 그윽한 언덕에 한가하게 머물러서 궁벽한 골짜기에 그림자를 숨겼다.

∙백도유(帛道猷)
당시 약야산(若耶山)에 백도유(帛道猷)란 사람이 있었다. 본래의 성은 풍(馮)씨이며 산음(山陰)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알려졌다. 성품이 진솔하고 소박하여 은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읊고 짓는 시편(詩篇)마다 호상(濠上: 세상을 벗어난 仙人)의 풍모가 있었다. 도일과 강론하는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후 도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비로소 느긋하게 산림 아래에서 노닐면서 공자ㆍ석가의 글에 마음을 풀었습니다. 흥취에 부딪치면 시가 되고, 봉우리를 넘어가 약을 캐서 복용하면 오래된 병이 덜해집니다. 그러니 즐거움에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대와 날을 함께 하지 못하여 한이 될 뿐입니다.”
이어 시를 지어 보냈다.

이어진 봉우리 수천 리
빼어난 숲은 평평하게 나루터를 휘감네.
지나가는 구름에 먼 산 그늘지고
바람이 다가오니 황량한 잡목 숲이 시끄럽구나.

초가집은 가려져 보이지 않고
닭이 울어야 사람 있음을 아네.
그 좁은 길 한가로이 걸어가면
곳곳에 버려진 땔감이 보이네.
비로소 알았노라. 백 대 뒤에도
짐짓 상황(上皇: 요순)의 백성이 있음을.

도일이 편지를 받고는 자신의 포부에 들어맞는 바가 있었다. 곧 동쪽 야계(耶溪)로 가서 도유와 서로 만났다. 숲 아래에 자리를 정하였다. 이에 티끌세상 밖으로 정신을 마음대로 하면서 경서(經書)로 스스로를 즐겼다.
이 무렵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사마회(司馬薈)가 고을 서쪽에 가상사(嘉祥寺)를 일으켰다. 도일의 기풍과 덕이 드높다 하여 초청해서 승려의 우두머리로 앉혔다. 이에 도일은 곧 6물(物:三衣와 鉢盂ㆍ坐具ㆍ甁)을 거둬 절로 보냈다. 그것을 팔아 금첩천상(金牒千像)을 조성하였다.
도일은 이미 내외의 고전에 해박하게 뛰어났다. 또한 계율의 행실이 깨끗하고 엄정하기에 사방 먼 곳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였다. 묻고 명을 받드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구주도유나(九州都維那)라 불렀다.
그 후 잠시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다가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곧 산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을 지었다.
문장을 달리고 말씀을 설한
그 인연 헛되지 않아
유독 우리 도일만은
여유로운 남음이 있노라.

비유하면 봄날의 뜰과 같아서
향기 높고 명예로워
줄기와 잎새 아름답고 무성하며
가지의 기둥들은 빽빽하면서도 성글도다.

∙도보(道寶)
그의 제자인 도보는 성이 장(張)씨이며 역시 오나라 사람이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일찍부터 성취하였다. 더욱이 강석 위에서 능란하였다. 장팽조(張彭祖)ㆍ왕수담(王秀琰) 등으로부터 모두 추앙과 존경을 받았다. 아울러 거슬림이 없는 사귐으로 알려졌다.

15) 석혜건(釋慧虔)
혜건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계율 있는 행실을 받들어 지켜서 지조가 확고하였다. 여산(廬山)에 십여 년 가량 머물렀다. 도인과 속인들 중에 수승한 도리에 뜻을 둔 자들은 모두 그의 풍채에 의탁하여 사모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여러 경전을 새로이 번역하여 내놓았다. 혜건은 그것을 부연하고 밝히는 것에 뜻을 두어 덕 높은 가르침을 선양하였다. 혜원(慧遠)이 산자락에서 그윽한 교화의 바람을 크게 떨쳤다. 그러자 혜건은 곧 동쪽 오월(吳越) 땅으로 유행하다가 그 지역에 몸을 맡기고,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산음(山陰)의 가상사(嘉祥寺)로 들어와 자기 욕망을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중생들을 인도하고 몸으로 고행하면서 대중들을 거느렸다. 모든 새로 나오는 경전은 다 베껴 써서 강설하기를 거의 5년 가까이 하였다. 문득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얼마 후 스스로 반드시 목숨이 다할 것을 알았다. 생각을 안양정토에 두고 성심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기원하였다.

산음의 이웃 절에 정엄(淨嚴)이란 비구니가 있었다. 오래도록 쌓은 덕망과 계행이 있었다. 밤에 꿈을 꾸니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서 서쪽 성곽의 문[西郭門]으로 들어왔다. 맑고 빛나는 묘한 형상으로 광명이 해와 달처럼 비추었다. 당기ㆍ번기와 꽃으로 만든 일산[蓋]은 모두 7보로 장엄했다. 관세음보살을 보자 곧 예배를 드리고 물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대답하셨다.
“혜건을 영접하려고 가상사로 가는 길이다.”
곧 이어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병은 비록 오래도록 위독하긴 했지만, 얼굴빛은 평안하여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시자들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으며, 한참 후에야 멎었다. 혜건 스스로 반드시 세상 끝날 날을 헤아리고, 또한 상서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듣고 본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찬탄하고 그리워하였다.

주석
1 석륵(石勒)의 아들. 후조(後趙)의 초대 제왕.
2 5호 16국 연(燕)나라의 국주(國主).
3 탑의 꼭대기에 얹는 두터운 바퀴[輪]이다.
4 중국 우(禹)임금 때 천하(天下)를 다스리던 대법(大法).
5 천자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민정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6 동진(東晋)의 무장(武將)으로 청렴하고 청담(淸談)을 잘 하였으며 효무제(孝武帝)가 중용함.
7 과거 도안(道安)이 태어났을 때, 왼쪽 팔뚝에 넓이 한 치 가량의 가죽이 붙어 있었다. 잡아당기면 위아래로 움직였으나 손만은 꺼낼 수 없었다. 또한 팔꿈치 바깥쪽으로 네모난 살점이 붙었다. 그 위에 통자 무늬가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인수(印手)보살이라 일컬었다.
8 삼현학(三玄學)은 『노자』ㆍ『장자』ㆍ『주역』의 총칭이다.

『고승전』 5권(ABC, K1074 v32, p.805c01-p.814b01)

고승전 제6권

2. 의해 ③

1) 석혜원(釋慧遠)
혜원의 성은 가(賈)씨이며 안문(雁門)의 누번(婁煩)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주옥같은 문장 솜씨가 뛰어났다. 열세 살에 외삼촌인 영호(令狐)씨를 따라 허ㆍ락(許洛:許昌과 洛陽)에 유학하였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여러 서생들을 위하여 널리 6경(經)을 종합해 연구하였다. 게다가 『노자』와 『장자』에도 빼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넓으며 기풍과 조감(照鑑)이 밝고 빼어났다. 비록 오래 공부한 선비로서 뛰어난 이라 할지라도, 그의 깊은 조예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물한 살에 강남을 건너 범선자(范宣子)에게 나아가, 함께 세상을 피해 숨자고 약속하려 하였다. 마침 석호(石虎)는 이미 죽었고 중원은 난리가 일어나, 남쪽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에 사문 도안(道安)이 태행산맥의 항산(恒山)에 절을 세웠다. 불법을 널리 찬양하여 명성이 매우 뚜렷하게 알려졌다. 혜원은 마침내 그를 찾아가 귀의하였다. 한번 만나자마자 공경을 다하여 진정한 나의 스승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툭 트이면서 깨달아 곧 탄식하였다.
“유학이나 도가 등의 구류(九流)는 모두가 쌀겨와 술지게미에 지나지 않는다.”
곧 아우인 혜지(慧持)와 함께 비녀[簪: 선비의 상투에 꽂는 비녀]를 팽개치고, 머리를 깎고서 목숨을 바쳐 수업하였다. 이미 불도의 문에 들어와서는 우뚝 드러나 무리에서 벗어났다. 항상 불법의 벼리를 모두 거둬들이고자 대법(大法: 대승법)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외우며 간직하기를 밤으로 낮을 이었다.
가난한 나그네라 자본이 없어 늘 따뜻한 비단옷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혜원과 혜지, 두 형제가 삼가하고 공손하여 시종 게으르지 않았다. 사문 담익(曇翼)이 늘 등불과 촛불의 비용을 공급해 주었다. 도안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담익도사는 참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인물이다.”

혜원은 지혜가 전생의 인연에 바탕을 두었고, 수승한 마음을 오랜 세월[曠劫]토록 일으켰다. 그러므로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넘고, 근기의 조감(照鑑)은 멀고도 깊었다. 도안은 항상 그를 찬탄하였다.
“우리 동쪽 중국에 도를 유통하게 하는 것은 아마도 혜원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나이 스물네 살에 곧 강설의 자리에 나아갔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강론을 듣다가 실상(實相)의 뜻을 질의하여, 혜원과 문답을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그 손님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 나고 어두운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혜원이 곧 『장자(莊子)』의 내용을 인용하여 비슷하게 연계시켰다. 이에 의혹을 품던 이가 환하게 깨달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도안은 세속의 책을 덮어두지 않았으면 하는 혜원의 바람을 특별히 들어주었다.

도안의 제자에 법우(法遇)ㆍ담휘(曇徽)가 있었다. 모두 풍채와 재주가 환하게 빛나고, 지조와 업이 맑고 민첩하였다. 둘 다 혜원을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 후 도안을 따라 남쪽 번면(樊沔)지방을 떠돌아다녔다.
위진(僞秦, 符堅이 세운 나라)의 건원(建元) 9년(373)에 진(秦)의 장군 부비(符丕)가 양양(襄陽)을 침략하여 합병하였다. 도안은 주서(朱序)에게 끌려가서 길을 떠날 수 없었다.
이에 마침내 대중을 나누어 각기 갈 곳을 따라 떠났다. 떠나는 길에 임하여 모든 장로대덕[長德]들은 도안으로부터 가르침과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혜원은 한 마디의 가르침도 받지 못하였다. 이에 꿇어앉아 말씀드렸다.
“저에게만 홀로 훈계와 도움의 말씀이 없으십니다. 저는 사람의 예가 아닌 성싶어 두렵습니다.”
도안은 말하였다.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어찌 다시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혜원은 이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荊州)로 가서 상명사(上明寺)에 머물렀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으로 가고자 심양(潯陽)에 이르렀다. 여산(廬山)의 봉우리가 맑고 고요해 마음을 쉴 만하다 싶어서, 비로소 용천정사(龍泉精舍)에 머물렀다. 이곳은 물과의 거리가 크게 멀었다. 혜원이 곧 지팡이로 땅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만약 이곳이 우리가 깃들어 머물 만한 곳이라면, 곧 썩은 땅에서라도 샘물을 뽑아 주십시오.”
말이 끝나자 맑은 물이 솟아 나와 금방 개울을 이루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심양 땅에 큰 가뭄이 들었다. 그가 멀리 못 옆으로 가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읽었다. 그러자 갑자기 거대한 뱀이 못에서 공중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큰 비가 내렸다.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 그러므로 그대로 거처하던 곳의 호로 삼아 ‘용천정사(龍泉精舍)’라 하였다.

당시 사문 혜영(慧永)이 서림(西林)에 자리 잡았다. 혜원과는 동문제자로 예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가 혜원에게 요청하여 마침내 함께 머물렀다. 이때 혜영은 자사(刺史) 환이(桓伊)에게 말하였다.
“혜원은 바야흐로 불도를 널리 펼칠 만한 인물입니다. 지금 문도의 권속들이 이미 광범해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바야흐로 많습니다. 그러나 빈도가 깃들어 있는 곳은 비좁아서 서로 거처할 만한 곳이 못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환이는 곧 혜원을 위하여 다시 여산(廬山)의 동쪽에 승방과 불전을 건립하였다. 동림사(東林寺: 여산의 東南方에 있는 大刹ㆍ淨土宗의 本據地)가 그곳이다.
혜원이 처음 정사를 조성할 때 산수의 아름다움을 훤히 다하였다. 뒤로는 향로봉(香爐峯)을 등에 업고, 옆으로는 폭포가 떨어지는 구렁을 끼었다. 바위에 의지하여 기단을 쌓고, 소나무로 집을 마름하고 얽었다. 맑은 개울물이 섬돌을 에워싸고, 흰 구름이 방에 가득하였다.
다시 절 안에 따로 선림(禪林)을 설치하였다. 빽빽한 숲에는 아지랑이가 엉키고, 널찍한 바위자리에는 이끼가 꼈다. 보고 밟는 모든 사람들은 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엄숙해졌다.

혜원이 듣기에 천축국에 부처님의 영상(影像)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께서 예전에 독룡(毒龍)을 교화하실 때 남기신 영상이다. 북천축국(北天竺國) 월지국(月氏國) 나갈가성(那竭呵城)의 남쪽 옛 신선의 석실 속에 있으며, 지나는 길은 고비 사막에서 서쪽 15,850리에 있다. 매양 기쁜 감회가 가슴에 교차하여, 뜻을 세워 우러러 그 영상을 늘 한번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서역의 도사가 있어 그 빛나는 모습을 말해 주었다.
혜원은 이에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곳에 감실(龕室)을 만들어 지었다. 미묘한 솜씨를 지닌 그림쟁이를 시켜 담담한 채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빛깔이 허공을 쌓은 듯하고, 바라보면 연가나 안개와도 같았다. 빛나는 형상이 밝고 아름다워, 숨어 있는가 하면 뚜렷이 나타났다. 혜원이 이에 곧 명(銘)을 지었다.

하나
넓고도 크도다. 부처님이여,
진리는 현묘하나 이름이 없어라.
신이 되어 변화하시어
그림자 떨어져 몸을 떠났네.

층층바위에 빛으로 돌아와
빈 정자에 그림자로 엉킨다.
그늘졌어도 어둡지 않고
어둘수록 더욱 밝아져

하늘하늘 허물 벗은
모든 신령의 조종이라
감응 같지 않아
자취 아득하게 끊어졌네.


아득하게 빈 우주에
권하거나 장려하지도 않아
맑고 빈 듯한 모습 그려내어
허공을 쓸어 모습을 전하네.

상호 갖추어지고 몸은 미묘하여
치솟는 자태 스스로 밝다.
흰 터럭은 빛을 토해
어두운 밤중에도 상쾌하다.

정성이 사무치면 곧 응하고
정성으로 두드리면 메아리 일으키네.
남기신 음성 산굴에 머물러 있어
깨달음의 나루에서 남몰래 완상하네.
만남의 기약이야 있다지만
전생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공덕이런가.


발꿈치 돌려 공경함을 잊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아
해와 달과 별은 빛을 감추어
온갖 모습들 한 빛깔이라네.

뜰과 집에는 어둠이 자욱하여
돌아갈 길 헤아릴 수 없어라.
텅 비움으로 이를 깨닫고
힘으로 이를 열어

지혜의 바람 비록 멀어도
티끌 번뇌 쉬게 하니
성인의 그윽한 살핌이
누가 그 극치로 부채질하나


희유한 음성 멀리 흘러와
마침내 동방을 돌아보시니
기풍을 기뻐하고 도를 사모하여
우러러 현도를 모범으로 삼는다.

붓끝의 오묘함 다하여
흰 비단에 미묘하게 운용하고
텅 비운 경지 기탁하니
하늘의 안개처럼 어리어리.

자취는 참모습을 본떴으니
진리는 그럴수록 깊어간다.
기묘한 흥취에 옷깃을 열고
상서로운 바람 길을 인도하네.

맑은 기운 마루처마를 돌고
어둠이 교차한 아직 먼 새벽
흡사 신묘한 용모를 빼닮으니
공경한 만남을 방불케 하네.

다섯
이에 명하고 이를 그려서
무얼 영위하고 무얼 구하겠냐만
신께서 들어주시어
그대 닦음 비추어

이 티끌세상의 자욱에다
저 그윽한 흐름 비추기를 바라노라.
맑고 신령한 못에서 양치질하고
화기를 마셔 부드러움에 이르리.

허공을 비추고 가려 감응하여
지혜 내리시어 마침내 두루하리.
깊은 그리움 남몰래 전하며
신의 노님 그윽이 상상하여
목숨 다하도록 뵐 수만 있다면
온갖 근심 길이 떠날 터인데.

또한 예전에 심양의 도간(陶侃:東晋의 名將)이 광주(廣州)에 주둔하러 지나갈 때의 일이다. 어떤 어부가 바다 가운데서 저녁마다 신비한 광명이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열흘이 지나자 더욱 그 광명이 크게 일어났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도간에게 아뢰니, 도간이 그곳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바로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불상에서 일어나는 광명이었다.
이에 그는 이 불상을 영접해 돌아와서 무창(武昌)의 한계사(寒溪寺)로 보냈다. 한계사의 주지인 승진(僧珍)이 어느 날 하구(夏口)에 갔다가 밤에 꿈을 꾸니, 절이 화재를 만났다. 이 불상을 모신 집만 홀로 용신(龍神)이 에워쌌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승진이 달려서 절로 돌아와 보니, 절은 이미 모두 불타버리고, 오직 이 불상을 모신 집만 남았다.
그 후 도간이 주둔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이 불상에 위엄스러운 영험이 있다고 하여 사자를 보내어 영접하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불상을 들어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려놓자, 배가 거푸 뒤집혀 침몰하였다.
이에 사자는 무섭고 두려워 돌아왔고, 끝내 불상을 싣고 오지 못했다. 도간은 어려서부터 씩씩한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으나, 평소에 신심이란 거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형주와 초나라 일대에서 이를 빗대어 노래가 불려졌다.

도간은 오직 검의 영웅
불상은 신령함을 드러내네.
구름이 진흙땅 위로 날아가니
아득함이 어찌 그리도 멀고 멀까?
정성으로는 이룰 수 있어도
힘으로 부르기는 어렵다네!

그 후 혜원이 절을 창건하여 이미 이루어지자, 마음으로 받들고자 기원하며 청하였다. 곧 바람에 날리듯 불상이 저절로 가벼워져서, 가고 오는데 지장이 없었다. 이에 사람들은 비로소 혜원에게 신령한 감응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 증거가 민간을 떠도는 노래에 남은 것이다.
이에 대중들을 거느리고 밤에서 새벽까지 끊임없이 불도에 정진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부처님이 남기신 교화가 여기에서 다시 일어났다.
이윽고 부지런히 계율을 지키며 번뇌의 마음을 쉬려는 선비와, 티끌세상을 끊고 맑은 믿음을 지닌 손님들이 모두 기약 없이 찾아왔다. 멀리서도 도풍을 바라보고 모여들었다.

팽성(彭城)의 유유민(劉遺民)ㆍ예장(豫章)의 뇌차종(雷次宗)ㆍ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ㆍ신채(新蔡)의 필영지(畢穎之)ㆍ남양(南陽)의 종병(宗炳)ㆍ장래민(張萊民)ㆍ장계석(張季碩) 등도 모두 세속과 영화를 버리고, 혜원에 귀의하여 노닐었다.
이에 혜원은 곧 정사의 아미타불앞에 재(齋)를 건립하였다. 서원을 세워 함께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빌었다. 그리고는 유유민(劉遺民)에게 그 글을 짓게 하였다.

“유세(維歲) 섭제격(攝提格:古甲子의 寅年) 칠월(七月) 무진삭(戊辰朔: 초하루날의 日辰) 28일 을미(乙未)일에, 법사 석혜원은 곧은 감흥이 그윽하고 멀게, 묵은 심회가 특별히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목숨을 이으려는 동지와 번뇌를 쉬게 한, 곧은 신심의 선비 123명과 여산의 북쪽 반야대정사(般若臺精舍) 아미타불 불상 앞에 모였습니다. 다 함께 향화를 올리면서 공경히 서원하옵니다. 오직 이 한 모임의 대중들이 무릇 시주하는 이치가 밝다면, 삼세(三世)의 이어짐이 드러날 것입니다. 감응을 옮길 수 있는 운수와 부합한다면, 선악의 보응도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공경히 손을 잡고 숨겨져 가라앉은 이치를 미루어, 무상(無常)의 시기가 절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삼보(三報)의 서로 무너짐을 살펴, 험한 세계에서 몸을 뽑아내기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이곳의 여러 뜻을 같이하는 현인들은 그런 까닭에 저녁에는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부지런히 하여, 우러러 제도할 것을 생각하나이다.

무릇 신(神)이라는 것은 감응으로는 교섭할 수 있어도, 자취로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에 감응하는 사물이 있으면 어두운 길도 지척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를 찾더라도 주체가 없다면, 멀고 아득한 황하의 나루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다행히 도모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이 마음을 서방정토에 두었습니다. 책을 두드리고 믿음을 열어서, 밝은 마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기연의 모습은 꿈에 그리던 것에 통하고, 흐뭇한 기쁨은 집 나간 아들이 찾아온 것보다 백 배나 더 합니다.
이에 신령한 그림은 빛을 드러내고, 그림자는 신의 조화와 짝을 이루었습니다. 공덕은 진리로 말미암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람이 운용한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하늘이 그 정성을 열어서 보이지 않는 운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내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거듭하여, 그러한 생각들을 모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크고 빛나는 업적은 들쑥날쑥하며 공덕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비록 새벽의 기원은 같았다 하더라도, 저녁에 돌아가는 곳은 현격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스승과 벗들이 돌아보아 참으로 슬퍼할 만한 일이니, 이 때문에 강개함에 젖습니다.
운명을 기다리며 법당에서 옷깃을 바로잡고, 다같이 한 마음을 베풉니다. 그윽함의 극치에 회포를 머물고서, 이 동지들이 멀리 떨어진 세계에서 함께 노닐기를 맹세하옵니다.
놀랍게도 무리에서 뛰어난 사람이 나와 가장 먼저 신령한 세계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구름 위 높은 산에서 홀로 거룩하여, 그윽한 골짜기에서 함께 보전하자는 맹세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서 나아간 이들이라면, 뒤에 오는 이들과 더불어 힘써 채찍질하여 나아가는 도리를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미묘하게 부처님의 자태를 관하여, 마음을 열어 곧게 비출 수 있습니다. 그런다면 깨달음으로 알음알이가 새로워지고, 교화로 말미암아 몸이 바뀔 것입니다. 연꽃을 흐르는 물 속에 깔개로 삼거나, 옥구슬 나뭇가지 그늘에서 시를 읊으며, 구름옷을 팔방에 표표히 나부끼거나, 향기로운 바람에 떠다니면서 삶을 다 미칠 것입니다.
몸은 편안함을 잊되 더욱 편안하고, 마음은 즐거움을 뛰어넘되 저절로 기쁠 것입니다. 3도(途)에 다다르더라도 멀리 그곳을 떠나고, 하늘 궁전에서 오만하게 속세와는 길이 이별할 것입니다. 뭇 신령의 뒤를 따라, 그 법도를 이어 태식(太息: 궁극의 休息)을 지향하기를 기약할 것입니다. 이 도리를 궁구하는 일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혜원은 고상한 풍모에다 엄숙하고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바라보는 이들 누구나 마음과 몸이 떨려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었다.
한번은 어느 사문이 대나무로 만든 여의(如意:講說에 쓰는 僧具)를 가지고, 그것을 혜원에게 바치고자 산에 들어와 이틀 밤을 묵었다. 그러나 끝내 말을 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구석자리에 머물다가 말없이 그곳을 떠났다.
혜의(慧義)란 법사는 강직하고 올바른 이로서 두려워하는 일이 적었다. 산에 찾아가면서 혜원의 제자인 혜보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범용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라서, 혜원의 풍모만 바라보고도 추대하여 복종한다. 이제 시험 삼아 내가 어떻게 하는지 한번 보라!”
산에 이르러 혜원이 『법화경』을 강의하는 때를 만나, 늘 어려운 질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이 떨리고 땀이 흘러내렸다. 끝내 감히 말하지 못했다. 산에서 나와 혜보에게 말하였다.
“정녕코 놀라운 분일세.”
그가 남들을 굴복하고 대중을 덮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은중감(殷仲堪)이 형주로 가는 길에 이 산을 지나다가 공경을 표시하였다. 혜원과 더불어 북쪽 개울에서 『주역』의 바탕을 논하였다. 해가 저물도록 싫증내지 않았다. 이에 찬탄하였다.
“식견이 진정 깊고도 밝구나. 참으로 그와 같이 되기란 거의 어려운 일이다.”
사도(司徒) 왕밀(王謐)과 호군(護軍) 왕묵(王黙) 등도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고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으로 공경하는 예를 보내었다. 왕밀은 편지를 보냈다.
“나이는 이제 막 40줄에 접어들었지만, 노쇠하기는 60세 노인과 같습니다.”
혜원이 회답하였다.
“옛사람들은 사방 한자나 되는 구슬을 아끼지 않고, 극히 짧은 순간 순간을 무겁게 여겼습니다. 그대가 품고 계신 바를 살피건대, 나이 들도록 살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 같군요. 시주께서 순리를 밟아 본성에 노닐거나, 부처의 이법을 타고 마음을 부려서, 이와 같이 하기를 미루어 간다면, 다시 어찌 나이가 더하기를 부러워하겠소이까? 애오라지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기를 오래하노라면, 어느새 깨달음을 터득할 것입니다. 부쳐 오신 소식에 답장 드릴 뿐입니다.”

노순(盧循)이 처음 남쪽으로 내려와 강주성에 있을 때, 산에 들어와 혜원을 찾았다. 혜원은 어릴 때 노순의 부친인 노하(盧瑕)와 함께 서생으로 지냈다. 그리하여 노순을 만나자 기뻐하면서 옛 이야기를 나눴다. 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이에 어떤 승려가 혜원에게 간하였다.
“노순은 나라의 외적입니다. 그와 교분을 두터이 나누시면 의혹을 사지 않겠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우리 불법에는 감정으로 취하고 버리는 법이 없다. 어찌 알 만한 이들이 살피지 못하겠는가?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 후 송의 무제(宋武帝, 420~422)가 노수를 토벌하고자 뒤쫓아 와서, 상미(桑尾)에 장막을 설치하였다. 측근들이 말하였다.
“혜원은 평소 여산의 주인인데, 노순과 교유가 두터웠습니다.”
송의 무제가 말하였다.
“혜원은 세상 밖의 사람이다. 반드시 나와 남이란 차별은 없는 이이다.”
곧 사신을 파견하여 편지를 보내 공경의 뜻을 표시하였다. 아울러 돈과 쌀을 보냈다. 이에 멀고 가까운 곳에서 비로소 그의 밝은 견해에 굴복하였다.

처음 경전이 강동 지방에 전해질 때에는 대부분 미비한 점이 많았다. 선법(禪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 또 율장은 듬성듬성 빠져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혜원은 불교의 도에 결함이 있는 것을 개탄하였다. 마침내 제자인 법정(法淨)ㆍ법령(法領) 등을 시켜 멀리 여러 경전을 찾았다. 그들은 사막과 설산을 넘어, 오랜 세월 후에 비로소 돌아왔다. 모두가 범어(梵語) 원본을 가져 왔으므로 번역할 수 있었다.
예전에 도안 법사가 관중(關中)에 있을 때, 담마난제(曇摩難提)를 초청해서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을 세상에 내놓았다. 중국말에 빼어나지 못하여 자못 의심나고 막힌 곳이 많았다. 그 후 계빈국(罽賓國)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가 여러 경전에 박식하였는데, 진(晋) 태원(太元) 16년(391)에 심양(潯陽)을 찾아왔다. 혜원은 그를 초청하여 다시 『아비담심론』과 『삼법도론(三法度論)』을 번역하였다. 이에 두 가지 배움이 곧 일어났다. 아울러 서문을 짓고 종지를 드러내어 학자들에게 남겼다. 부지런히 도를 위하고 불법을 펴기에 힘썼다.

매양 서역에서 오는 손님을 만나기만 하면,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묻고자 방문하였다.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관중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보내 인사[通好]하였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자세히 덕스런 분의 물음에 받들어 봅니다. 어진 분께서는 전에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의 경계선을 넘어 오셨습니다. 이때는 통역[音譯]을 주고받을 형편이 못되었지만, 소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다만 강호가 어렵고 어두워 형세가 어그러진 것을 한탄할 따름이었습니다.
요즘 크게 막힌 것을 회통하려는 모임을 이르시려, 보배를 품고 이곳에 오시어 머물고 계신 것을 압니다. 질문이 있으면 하루에 아홉 번 달려간다 하니, 문도들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맛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모두가 찾아갈 길이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을 바라보면서 우두커니 바라보는 고단함만 더할 따름입니다.
저는 늘 불법이 베풀어지고 유포되어, 3방(方)이 함께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합니다. 비록 시운은 말세에 모여 있다 하더라도 불법의 종취는 옛날과 마찬가지로 고르다 하겠습니다. 참으로 아직 깨달음의 나루터를 미묘한 문에서 두드려, 부처님께서 남기신 신령함과 사무치게 교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슴을 비우고 기약을 남기기에 이르러서는, 하루도 그 생각을 품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무릇 전단(旃檀)을 옮겨 심으면, 다른 물건도 함께 향기가 몸에 배입니다.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빛남을 토해내면, 뭇 보배들이 스스로 쌓여집니다. 이것이 오직 가르침에 들어맞는 도리라서,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가르침의 근본은 하나의 형상도 없는데다, 응험은 정으로써 하지 않는 데에 있어서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불법을 짊어진 사람은 반드시 보답을 바라지 않는 것으로 마음을 삼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벗을 사귀는 사람은 공덕을 자기 것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만약에 법륜이 8정도(正道)에서 수레바퀴를 멈추지 않고, 삼보가 세상이 다하는 시기에도 소리를 멈추지 않는다면, 만원(滿願: 부루나존자)이 시대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독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수(龍樹)보살이 어찌 전시대의 발자취에서 유독 홀로 거룩하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해서 마름한 옷을 보내니, 높은 자리에 오르실 때 이를 입기 원합니다. 아울러 빗물을 여과(濾過)시키는 그릇은 이미 법물(法物)입니다. 이것으로 애오라지 나의 마음을 표시합니다.”

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구마라집은 공경하게 절하옵니다. 아직 만나서 말한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글과 문장도 지나치게 막혀서 인도하는 마음을 통할 길이 없거니와, 뜻을 얻을 인연도 무너져 끊겼습니다. 역마(驛馬)로 전해온 정황으로, 거칠게나마 덕스런 풍모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덮을 수 있는 재능을 갖추셨다고 들었습니다. 불경에 ‘말세에 동방에 반드시 호법보살이 있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빛나도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훌륭히 그 일을 넓히셨습니다.

무릇 재물을 얻으려면 다섯 가지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계율, 너른 견문, 말솜씨, 깊은 지혜[福ㆍ戒ㆍ博聞ㆍ辯才ㆍ深智]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이라야 도를 융성하게 하지만, 갖추지 못한 사람은 의심으로 막힙니다. 어진 분이시여, 그대는 이것을 갖추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탁하여 우호를 교통하고, 통역을 통해[因譯]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가 어찌 그 뜻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만, 거칠게나마 보내오신 뜻에 보답할 따름입니다.
짐작하여 마름하신 옷을, 조금 손보아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오신 뜻에 맞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물건에 맞지 않는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전에 늘 사용하던 놋그릇으로 만든 쌍구조관(雙口澡灌:入口가 둘인 세숫대야)을 보내오니, 법물의 수에 갖추셨으면 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이미 더럽게 물든 즐거움을 버린다면
마음을 훌륭히 거두지 않겠는가?
만약 치달려 흩어지지 않음을 얻는다면
깊이 진실한 모습에 들어서지 않겠는가.

필경공의 상 가운데서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 없어라.
만약 선의 지혜 즐긴다면
이는 법성이라서 비출 곳조차 없으려니

허망한 거짓 등은 참이 아니라서
또한 마음을 머물 곳이 아닐러라.
어진 분께서 터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 바란다오.

혜원은 다시 구마라집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날이 서늘한데 요즘은 또 어떻게 지내십니까? 지난달 법식(法識)도인이 이곳에 와서 그대가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소식을 전하길래 마음이 서글퍼집니다.
앞서 듣기로는 그대가 바야흐로 크게 여러 경전을 번역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시면 서로 묻고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만약 지금 전하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수많은 한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문득 수십 조의 일을 묻사오니, 여가가 있으면 한두 가지라도 풀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록 경전 가운데 나오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그대의 결정을 취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구마라집의 게송에 회답하였다.

근본과 말단은 필경 무엇으로부터
일어남과 스러짐이 있음과 없음의 즈음이라
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를 건넌다면
이것은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이루리.

미혹된 생각이 거듭 서로를 탄다면
부딪치는 이치마다 절로 막힘이 생겨나리.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지만
길을 여는 것은 한 세간만으로는 안 되어라.

때마다 깨달은 종사 없다면
누가 장차 그윽한 만남을 쥘 수 있으리.
찾아가 묻을 것 아직도 아득하오니
남은 생을 서로 더불길 기약했으면.

그 후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중국에 건너와 관중(關中)으로 가서는 『십송률(十誦律)』의 범본을 외웠다. 구마라집이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3분의 2를 마쳤다. 바로 그때 불야다라가 세상을 떠났다.
혜원은 항상 그것이 미비한 것을 개탄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로 들어와, 다시 이 부(部)를 훌륭히 외운다는 말을 들었다. 곧 편지를 써서 제자인 담옹(曇邕)으로 하여금 요청하여, 관중(關中)에서 다시 남은 부분을 번역하게 하였다. 그런 까닭에 『십송률』의 전부가 갖추어져 빠진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진(晋)나라 땅에서 얻은 원본은 지금까지 서로 전수한다. 파미르 고원의 현묘한 경전이 관중에서 빼어나게 번역하여, 남쪽의 이 땅까지 오게 된 것은, 혜원의 힘 덕분이다.
외국의 승려들이 모두 중국 땅에 대승 도사가 있다 칭송하였다. 매양 향 피워 예배할 때마다, 곧 동방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서 마음을 여산의 묏부리에 바치기에 이르렀다. 그의 신령한 이법의 자취는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앞서 중국 땅에는 아직도 ‘열반상주(涅槃常住)’의 학설이 없었다. 다만 수명이 길다는 말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에 혜원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부처란 지극함이다. 지극하면 변화가 없다. 변화가 없는 이법에 어찌 다함이 있겠느냐?”
이로 인하여 『법성론(法性論)』을 지었다.
“지극함은 변함 없음을 본성으로 삼는다. 본성을 얻음은 지극함을 이룸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구마라집이 논을 보고 찬탄하였다.

변두리나라 사람들이라 아직 경전을 지니지도 못했거늘
문득 모르는 사이에 이 법과 합치하니
어찌 절묘하지 않은가.

후진(後秦)의 주인인 요흥(姚興)은 덕과 명성을 흠모하고, 그의 재치 있는 생각을 찬탄하였다. 정중한 편지를 보내고, 믿음의 선물이 연이어졌다. 구자국(龜玆國)의 가는 실을 섞어 짠 변상(變像)을 증정하여, 그것으로 자기의 간곡한 마음을 표시하였다. 또 요숭(姚嵩)을 시켜 구슬로 만든 불상을 바쳤다.
『석론(釋論)』을 처음 번역하자, 요흥은 이 논을 보내고 아울러 편지를 보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새로운 번역을 마쳤다. 이는 이미 용수보살이 지은 것이며, 또한 대승 경전의 지귀(旨歸)이다. 그러니 한편의 서문을 지어서 지은이의 뜻을 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이곳의 여러 도사들은 모두 서로 다른 사람을 추천하고 사양하여 감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법사가 이를 위하여 서문을 지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남겨주는 것이 좋겠다.”

이에 혜원은 회답편지를 썼다.
“저에게 『대지도론』의 서문을 짓게 하여 지은이의 뜻을 펴게 하시려 합니다. 그러나 빈도가 듣기에 큰 것을 품으려면 작은 솜옷으로는 싸안기조차 할 수 없고, 깊은 샘물을 길으려면 짧은 두레박줄로는 어림조차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내리신 글을 펴보던 날, 높은 명령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 부딪치는 일마다 그만두어, 다시 뜻을 내지 못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내려 보내 알리시는 인연의 중함으로, 대략 품은 생각만을 엮을 따름입니다. 연구의 아름다움에 이르려면, 마땅히 다시 여러 눈 밝은 대덕들에게 기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의 명성이 높고도 멀리 알려진 것이 본래 이와 같았다.
혜원은 항상 『대지도론』이 문구가 번다하고 광범위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뜻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곧 그 요점만을 초록하여 20권의 책을 썼다. 차례대로 드러낸 이치는 깊고 청아하여, 무릇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들이는 일을 절반이 넘게 쉴 수 있게 하였다.

그 후 환현(桓玄)이 은중감(殷仲堪)을 정벌하였다. 군사가 여산을 지나가면서 혜원에게 호계(虎溪) 밖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혜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에 환현이 스스로 산에 들어왔다. 측근들이 환현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은중감이 산에 들어가 혜원에게 예를 갖추었습니다. 공은 그를 공경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환현이 대답하였다.
“어찌 그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은중감은 근본부터가 죽은 사람일 뿐이다.”
산에 이르러 혜원을 보자 모르는 사이에 공경을 표시하였다. 환현이 물었다.
“부모에게서 받은 몸은 함부로 헐거나 다칠 수 없다. 그렇거늘 어찌하여 수염을 깎고 머리를 잘랐는가?”
혜원이 대답하였다.
“몸을 세워 도를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환현이 훌륭하게 여겨, 품었던 어려운 질문을 감히 다시 묻지 못하였다. 이어 은중감을 토벌하는 뜻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현이 물었다.
“어떡하기를 바라십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나의 소원은 시주께서도 안온하시고 그[은중감]도 다른 탈이 없는 것입니다.”
환현이 산에서 나와 측근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태어나서 아직 보지 못한 인물이다.”
환현은 그 후 임금을 두려워 떨게 하는 위엄으로써 모시려고 애썼다. 초청하는 편지를 보내어 벼슬에 오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혜원의 대답이 견고하고 바르며 확고부동하여, 그 지조가 단석(丹石)보다 굳어 끝내 되돌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은 승려들을 숙청하고자 관료붙이들에게 명령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을 펴서 진술하고 의리를 유창하게 설법할 수 있거나, 혹 계율의 행실[禁行:戒行]을 반듯하게 닦아 큰 교화의 베풂에 기여할 수 있는 사문들이 있다. 여기에서 어긋나는 자들은 그만두게 하여 돌려보내라. 오직 여산만은 도덕이 있는 사문이 머무르는 곳이다. 수사 간택의 예에 두지 말라.”

혜원은 환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불교가 허물어지고 더럽게 뒤섞여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하나 찾아질 때마다, 분개하는 마음이 가슴에 가득하였습니다. 항상 뜻하지 않은 운수가 나타나서 불교가 가라앉는 일이 닥칠까 두려웠습니다.
가만히 보건대, 청정한 여러 도인들의 가르침은 진실로 그들의 본심과 호응합니다. 무릇 경수(涇水)와 위수(渭水)가 갈라지면, 맑은 물과 탁한 물의 형세가 달라집니다. 굽은 마음을 곧은 마음으로 바로잡으면, 어질지 않은 것은 스스로 멀어집니다. 이 명령이 행해지면 반드시 한결같은 이치를 여기서 얻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거짓으로 꾸민 사람에게서는 거짓으로 통하던 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진실한 생각을 품은 사람에게서는 세속의 기대를 저버리는 혐의가 없어져, 도인과 세속이 번갈아 일어나서 삼보가 다시 융성할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널리 승단의 조례와 규제를 세우자, 환현은 그의 말에 따랐다.

예전에 진(晋)나라 성제(成帝, 326~334)가 어렸을 때 유빙(庾氷)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그는 ‘사문들이 마땅히 왕자를 공경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때 상서령(尙書令) 하충(何充)과 복야(僕射) 저욱(褚昱)ㆍ제갈회(諸葛恢) 등이 아뢰어, ‘사문은 왕자에 경례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의 논의도 모두 이와 같았다.
그러나 하충의 문하생들이 유빙의 뜻을 받들어 반박하였다. 같거나 다른 의견이 어지럽게 일어나서 끝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 후 환현이 고숙(姑熟)에 있을 때 공경을 다하고자, 곧 혜원에게 편지를 보냈다.
“사문이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감정에 충실하지 않으며, 이치에 있어서도 밝지 않다. 한 시대의 국가 대사란 그 바탕을 진실하게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간 여덟 사문에게 편지를 띄웠고, 이제 그대에게도 부친다. 그대는 왕자를 공경하지 않는 입장에 대해 진술하도록 하라. 이것은 곧바로 실행해야만 할 일이니, 낱낱이 생각하는 바를 자세하게 진술하여, 반드시 그에 대한 의심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혜원이 답장을 썼다.
“무릇 사문이라 칭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두운 세속의 캄캄함을 열어주고, 세상을 교화하는 그윽한 길을 트여주어, 바야흐로 나와 남을 잊는 겸망(兼忘)의 도로써, 천하와 더불어 같이 갈 수 있는 존재를 일컫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를 희구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유풍에 고개 숙이게 합니다. 개울물에서 양치질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남은 진액을 맛보게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비록 나라의 큰 일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초연한 발걸음의 자취를 볼 것입니다. 깨달은 것도 진실로 이미 넓어질 것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정과 종묘에서 입는 옷이 아닙니다.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에서 쓰는 그릇이 아닙니다. 사문은 티끌세상 밖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왕자에게 공경하지 않아야 합니다.”

환현은 비록 구차하게 앞서의 자기 뜻을 고집하고, 곧바로 남을 따르기를 부끄럽게 생각하였지만, 혜원의 말뜻을 직접 보고는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얼마 안 되어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곧 교서를 내렸다.
“불법은 크고 위대하여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상의 마음을 미루어 받들었으므로 공경심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이미 내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마땅히 겸양하는 빛을 다하겠다. 그러므로 모든 도인들은 다시 왕자에게 예를 올리지 말도록 하라.”

혜원은 이에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지었다. 모두 다섯 편이다.
첫 번째 편은 재가(在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집안에 있으면서 법을 받드는 사람은 임금의 교화에 순종하는 백성이다. 그들의 심정은 아직 속인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들의 자취는 사방테두리 안의 사람들과 같다. 그런 까닭에 천륜에 대한 애정[天屬之愛]과 주상을 받드는 예절[奉主之禮]이 있어야 한다. 이 예법과 공경에는 근본이 있기에, 마침내 이것에 인연하여 가르침을 이룬다.’

두 번째 편은 출가(出家)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출가라 하는 것은 세속을 등짐으로써 자기 뜻을 구하고, 속인에서 변하여 그 도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풍속이 변하면 복장도 세상의 전례(典禮)와 같은 예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등지면 마땅히 그 자취를 고상하게 하여야 한다. 대덕은 그런 까닭에 번뇌 빠진 속인들을 번뇌의 흐름 속에서 구제할 수 있으며, 거듭되는 겁(劫)에서 어두운 근기를 뽑아 올릴 수 있다. 멀리는 삼승의 나루와 통하고 가깝게는 인천세계의 길을 열어준다.
그의 도가 육친(六親)에 젖어들고, 그 은택이 천하에 흐른다. 비록 왕후(王侯)의 자리에 처하지 않더라도, 본래부터 이미 천자의 도리와 일치하여 생민을 너그럽게 용서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륜(天倫)의 무거운 의리와 어긋나지만, 그 효도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는 임금을 받드는 공손함이 없지만, 그 공경심을 잃은 것이 아니다.’

세 번째 편은 구종불순화(求宗不順化)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근본으로 돌아가 가르침을 구하는 이는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 속세의 경계를 초월한 이는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 마음 때문에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 삶을 멸할 수 있다. 삶 때문에 정신이 괴롭지 않다면 그 정신이 명합할 수 있다.
정신과 명합하면 경계가 끊어지는 까닭에 이를 열반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사문은 비록 만승(萬乘) 천자에게 절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그 일을 높이 숭상한다. 왕후(王侯)의 벼슬을 하지 않지만 그 혜택에 젖는다.’

네 번째 편은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부처님과 주공(周公)ㆍ공자는 비록 출발점은 다르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출처(出處: 세상에 나가는 것이 出이고,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것이 處이다.)는 모두 다르나, 마지막 기필코 하려 한 곳은 같다. 그런 까닭에 비록 길이 다르다고 말하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불겸응(不兼應)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불교와 유교를 겸하여 받아드릴 수 없음을 말한다.’

다섯 번째 편은 형진신불멸(形盡神不滅)이다. 그 내용은 ‘인식작용과 정신작용이 치달리면, 이를 따라 우리 몸도 동이니 서로 치달린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논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이때부터 사문들은 세상 밖에서의 자취를 온전히 할 수 있었다.

환현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진(晋)의 안제(安帝)가 강릉(江陵)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보국대부(輔國大夫) 하무기(何無忌)는 이때 혜원에게 권유하여 황제를 뵈옵고, 문후를 드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혜원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위로하고 안부를 물었다. 혜원은 편지를 썼다.
“저 혜원은 머리 조아려 아뢰옵나이다.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陽月和暖], 수라가 입맛에 잘 맞기를 비옵니다. 빈도는 전에 무거운 병에 걸렸습니다. 나이가 들자 쇠약해져 병이 심해졌습니다. 분수에 넘치게 자비하신 조서(詔書)를 받아보았습니다. 곡진하게 영광스러운 위문을 드리우셔서, 온갖 두려움의 깊음이 실로 가슴에 백 배나 더합니다. 요행히 경사스러운 모임을 만났으나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마음과 감개를 자못 그 무엇으로도 비유할 수가 없사옵니다.”
황제는 조서로 회답하였다.
“봄기운을 느끼면서도[陽中感懷] 그대가 앓는 병이 아직 좋아지지 않았음을 알고는 마음에 어리어서 잊을 수가 없다. 지난달에 강릉을 떠났지만, 도중에 온갖 좋지 않은 일이 많아 더디기가 보통 때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遲兼常]. 본래는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만나기를 바랐다. 그대가 이미 산림에서 원기를 보양하는 터이고, 게다가 앓는 병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 아득히 다시는 인연이 없을 듯하여 한탄함만 더할 뿐이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은 재주를 믿고 세상에서 멋대로 굴어서, 추앙하거나 숭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번 만나자 숙연히 마음으로 감복하였다.
혜원은 안으로는 불교의 이치에 뛰어나고, 밖으로는 뭇 서적에 빼어났다. 무릇 그의 문하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의지하고 모방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혜원은 『상복경(喪服經)』을 강의하였다. 뇌차종(雷次宗)ㆍ종병(宗炳) 등이 모두 책을 잡고 그의 취지를 이었다. 그 후 뇌차종은 따로 『상복경의소(喪服經義疏)』를 지어 책머리에서 뇌씨(雷氏)를 일컬었다. 이에 종병이 이를 조롱하는 편지를 보냈다.
“예전에 그대와 함께 스님 스승[釋和尙: 혜원을 가리킴] 사이에서 얼굴을 마주하여 이 내용의 강의를 받았었지. 그렇거늘 어찌하여 지금 곧 책머리에다 뇌씨(雷氏)를 일컫는다 말인가?”
그의 교화가 도인과 속인에 아울러 행해진 이러한 사례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혜원이 여산의 언덕에 자리잡고부터, 30여 년 동안 그의 그림자가 산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의 발자국을 세속으로 들여 밀지 않았다. 매양 손님을 보내거나 노닐고 밟는 땅은 호계(虎溪)로 한계를 삼았다.
진(晋) 의희(義熙) 12년(416) 8월초에 움직임이 흐트러졌다. 6일째가 되자 괴로움이 더욱 심했다. 이에 대덕과 나이 많은 노승들이 모두 이마를 조아리며 된장을 넣은 술을 마시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았다. 쌀즙이라도 마시기를 청하였으나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꿀물을 타서 장(漿)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니, 곧 율사(律師)에게 명해 책을 펼쳐 글에서 마셔도 되는지를 찾게 하였다. 책의 절반도 넘기지 않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나이는 83세이다.

문도들이 통곡하니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오고, 수레바퀴가 이어져서, 어깨와 어깨가 서로를 뒤따랐다.
혜원은 범부들의 정을 자르기 어렵다고 여겨 7일장으로 치르게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소나무 밑에 드러내어 놓았다. 얼마 있다가 제자들이 시신을 거두어 묻었다.
심양태수(潯陽太守) 완보(阮保)는 여산의 서쪽 마루를 뚫어, 굴을 만들어 묘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사령운(謝靈運)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어, 남긴 덕을 새겼다. 남양(南陽)의 종병(宗炳)도 절 산문에 비를 세웠다.
본래 혜원은 문장을 잘 지어 글 분위기가 맑고 우아하였다. 법석에서의 담론은 내용이 정밀하고 간결하게 요점을 잘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채가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절에 걸어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지은 논ㆍ서(序)ㆍ명(銘)ㆍ찬(贊)ㆍ시(詩)ㆍ편지 등을 모아서, 열 권 오십여 편의 문집을 만들었다. 세상에서 중히 여겼다.

2) 석혜지(釋慧持)
혜지는 혜원의 아우다. 성품이 텅 비어 조용하며,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열네 살 때 책 읽기를 배웠다. 하루에 얻은 것이 다른 사람이 열흘에 얻은 것과 맞먹었다. 문장과 역사에 빼어나고, 재치 있게 글을 짓는 솜씨가 있었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형과 함께 도안 법사를 섬겼다.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워 삼장의 분석을 마음대로 구사하였다.
도안이 양양(襄陽)에 있으면서 혜원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할 때 혜지도 함께 갔다. 처음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에서 쉬었다. 후에 여산으로 가서 모두 혜원을 따라 함께 머물렀다.
혜지는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채가 빼어나고 시원하였다. 항상 가죽신을 신고 정강이 절반쯤 오는 옷을 입었다. 여산의 문도 권속들은 영명하고 빼어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드나드는 3천 명이 혜지를 우두머리로 쳤다.

혜지에게는 고모가 있었다. 비구니가 되어 도의(道儀)라 이름하였다. 강하(江夏)에 머물다가 서울에 불법이 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서울로 내려가 교화를 구경하고자 하였다. 이에 혜지는 곧 고모를 전송하여, 서울에 이르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진(晋)의 위군(衛軍)인 낭야왕(瑯琊王) 사마순(司馬珣)과 깊이 서로의 기량을 존중하였다. 당시 서역 사문 승가라차(僧伽羅叉)가 훌륭히 네 부의 『아함경』을 외웠다. 사마순이 요청해서 『중아함경(中阿含經)』을 번역했다. 혜지는 곧 그 글과 말을 교열하고 다듬어서, 소상하게 경문을 정하였다.
그 후 여산으로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예장(豫章) 태수 범영(范寧)이 초청해서 『법화경』과 『아비담(阿毘曇)』을 강론하였다. 이에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리 밖 멀리에서도 찾아와 모였다.

낭야왕 사마순이 범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과 혜지 가운데 누가 더 나은가?”
범영이 회답하였다.
“참으로 현명한 형제입니다.”
사마순은 거듭 편지를 보냈다.
“다만 형과 같은 이만 하더라도 참으로 쉽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거늘 하물며 다시 아우까지 현명할 수 있는가?”

연주자사(兗州刺史) 낭야왕 사마공(司馬恭)은 사문 승검(僧檢)에게 편지를 보냈다.
“혜원ㆍ혜지 형제의 지극한 덕은 어떠한가?”
승검이 회답하였다.
“혜원ㆍ혜지 형제는 여유작작하여 참으로 도풍이 있습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 멀리서 서로 흠모하고 존경하여, 편지를 보내 좋은 관계를 맺어 훌륭한 벗이 되었다.

그 후 혜지는 성도(成都)가 땅이 비옥하고 백성들이 풍족하다는 말을 듣고는 가서 교화할 뜻을 세웠다. 아울러 아미산(峨嵋山)을 구경하려고, 지팡이를 떨치며 민수(岷岫:蜀山)로 가려 하였다. 이에 진(晋) 융안(隆安) 3년(399)에 혜원의 곁을 떠나 촉(蜀)으로 들어갔다. 혜원이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니 혜원이 탄식하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모이는 것을 사랑하는 법이다. 그런데도 너는 헤어지는 것을 즐거워하는구나. 어찌된 일인가?”
혜지도 역시 슬퍼하였다.
“만약 정에 막혀 모이는 것을 사랑한다면, 본래 출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욕망을 잘라버리고 도를 구하고자 하니, 바로 서방으로 가는 것을 바랄 따름입니다.”
이에 형제는 눈물을 거두고 말없이 안타까워하며 이별하였다.

길을 떠나 형주(荊州)에 도달하였다. 형주자사 은중감(殷仲堪)이 기뻐하고 존중하며 예우하였다. 당시 환현(桓玄)도 그곳에 있었다. 환현은 비록 학문에 관련된 공부는 소홀하였지만, 그런 한편으로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었다. 혜지를 만나보니, 거의 인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홀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고금에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다고 더욱 감탄하여, 크게 기쁜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혜지는 이미 그 사람됨을 의심하였다. 그러기에 마침내 그의 요청을 버리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은중감과 환현 두 사람은 간절히 그를 만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혜지는 더욱 그곳에 머물 뜻이 없었다. 형주를 떠날 즈음하여 환현에게 글을 보내었다.
“본래 병든 몸을 아미산 묏부리에 깃들여, 고비 사막 밖의 교화를 구경하려고 하였습니다. 처음 떠날 때의 생각을 버릴 수 없어, 곧 행장을 꾸려 그쪽으로 머리를 돌립니다.”
환현은 이 편지를 받고 슬퍼하며,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혜지는 마침내 촉(蜀)에 이르러 용연정사(龍淵精舍)에 머물렀다. 거기에서 불법을 크게 홍포하였다. 정낙(井絡:四川省)의 사방에서 그의 덕을 사모하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자사(刺史)ㆍ모거(毛璩)가 평소 덕을 숭상하여 공경했다.

∙혜암(慧巖)ㆍ승공(僧恭)
당시에 사문 혜암과 승공이 먼저 촉나라에 와서 사람들과 서로 정답게 지내고 있었다. 혜지가 그곳에 와서 머물자, 둘 다 멀리서 그의 풍모를 듣고는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그러니 모두들 혜지의 승당에 오른 이들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불렀다.
승공은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었다. 촉군(蜀郡:成都)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혜암은 내외의 경전에 아는 것이 많았으므로, 평소부터 모거가 존중하였다.
그 후 촉나라 사람 초종(譙縱)이 전쟁의 기회를 틈타 모거를 공격하여 죽였다. 촉나라 땅을 나누어 갖고서, 스스로 성도왕(成都王)이라 이름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법회를 마련하고, 혜암을 핍박하여 요청하였다. 혜암은 마지못해 그곳을 찾아갔다.
이미 예전부터의 시주인 모거가 하루아침에 상하고 파멸되었기에, 이 일을 눈으로 보자 더욱 슬퍼하여 가슴아파하는 것이 얼굴빛에 나타났다. 마침내 초종이 그를 싫어하여 살해하였다. 그러자 온 고을이 어지러워져서, 도인과 속인들이 위태로워하고 두려워하였다. 혜지는 난을 피하여, 비현(陴縣) 가운데 있는 어느 절에 머물렀다.

초종의 조카 도복(道福)은 흉악함과 사나움이 매우 심하였다. 군병들을 거느리고 비현으로 가서 토벌하여 살육한 적이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나가다가 절에 들어왔다. 사람과 말들이 피로 목욕한 것 같았다. 대중승려들이 크게 무서워하여 한꺼번에 놀라 달아났다.
혜지는 승방 앞에서 세수를 하면서도, 얼굴빛에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도복이 곧바로 혜지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혜지는 손가락을 튀기며 물을 걸러내면서, 담담히 태연자약하였다. 도복이 부끄러워 후회하면서 땀을 흘리며 절문을 나왔다. 측근에게 말하였다.
“대인(大人)이라. 대중과는 다르더라.”
그 후 촉나라 경내가 맑고 편안해졌다. 다시 용연사로 돌아와 머물면서 강설하였다. 재(齋)를 지내며 예참(禮懺)하였다. 늙어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그는 진(晋)ㆍ의희(義熙) 8년(412)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임종에 명을 남겨, 계율 있는 거동을 힘쓰도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경에 이르기를 ‘계율은 평평한 땅과 같아서, 모든 착한 것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라고 하였다. 너희들은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일상생활에 마땅히 삼가야 하느니라.”

∙도홍(道泓)ㆍ담란(曇蘭)
우리 동방 중국에서 발간된 경전들은 제자인 도홍에게 부촉하고, 중국 서쪽나라에 있던 경전들은 제자인 담란에게 부촉하였다.
도홍은 일하는 행실이 맑고 민첩하였다. 담란은 정신의 깨달음이 천성적으로 뛰어났다. 이들은 모두 스승의 발자취를 이어받아, 그것을 법도로 삼았다.

3) 석혜영(釋慧永)
혜영의 성은 반(潘)씨이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여 사문 축담현(竺曇現)을 섬겼다. 후에 다시 도안(道安) 법사를 엎드려 받들었다.
평소 혜원과 함께 나부산(羅浮山) 굴에 집을 지어 살기를 기약하였다. 혜원이 도안의 만류를 받자, 혜영은 먼저 오령(五嶺)을 넘으려 하였다. 길을 떠나 심양(潯陽)을 지날 때에, 고을사람 도범(陶範)이 간절하게 그곳에 머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잠시 여산(廬山)의 서림사(西林寺)에 머물렀다. 그곳의 문도들이 조금씩 많아졌다. 게다가 혜원이 같은 산에 절을 짓자,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가졌다.
혜영은 곧고 검소하며 자연스러워, 마음이 맑아 욕망을 잘 이겨냈다.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어,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았다. 경전을 매우 좋아하여 경전에 푹 빠지고, 강설을 잘하였다. 푸성귀와 거친 베옷으로 거의 일생을 마쳤다.

또 따로 한간의 초가집을 산마루 위에 세웠다. 선정(禪定)에 들고자 생각할 때마다, 문득 그곳에 가서 지냈다. 당시 그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특수한 향내를 맡았다.
혜영의 집안에는 항상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혹 두려워하면, 곧 몰아내어 산에 올라가게 하였다. 사람이 돌아간 뒤에는 다시 되돌아와서, 길들인 것 같이 조아렸다.
어느 날 혜영이 고을로 나갔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 산으로 돌아와 오교(烏橋)에 이르렀다. 오교의 영주(營主:軍營의 首領)가 술에 취하여 말을 타고 길을 막아서, 혜영의 갈 길을 가로막고 보내주지 않았다. 날이 이미 너무 늦어져서 혜영이 지팡이로 멀리 말을 가리켰다. 말이 놀라 달아나서 영주는 땅에 넘어졌다. 혜영은 그를 두 손으로 일으켜서 위로하고 영으로 돌려보내니, 이로 인하여 병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절을 찾아가 뉘우치고 사과하였다. 혜영이 말하였다.
“빈도가 본래 뜻한 것이 아니었소. 그러니 아마도 경계하라고 신께서 하셨을 것이오.”
이 일을 도인과 속인들이 들어 알고는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그 후 진남장군(鎭南將軍) 하무기(何無忌)가 심양에 주둔하였다. 호계(虎溪)에 모여서 혜영과 혜원을 초청하였다. 당시 혜원은 이미 오랫동안 명망을 떨쳤다. 또한 평소부터 재주와 능력도 풍족하였다. 그리하여 따르는 사람 백여 명이 모두 거동이 깔끔하고 조용하며 풍모에 질서가 있었다. 고상한 말과 아름다운 논리를 펼치면, 거동들이 볼 만하였다.
혜영은 조용히 홀로 가서 갑작스레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누더기 옷에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발우(鉢盂)를 지녔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은 자연스러워, 맑은 기운을 흩뿌리며 자랑하는 빛이 없었다. 대중이 모두 그의 곧고 검소함을 존중하여, 도리어 다시 그를 아름답게 여겼다.

혜원은 어려서부터 그를 선배로 추앙하였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혜영의 뛰어난 행실에 고개 숙이고, 낮고 공손한 몸가짐으로 그의 은근한 복을 빌었다. 혜영은 정밀하고 엄격하게 고행하면서 서방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10년(414)에 병에 걸려 오랫동안 위독했다. 오로지 계율로 몸을 삼가하여, 지조를 지키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비록 병상에 누워 고통을 품었으나, 얼굴빛은 느긋하고 기뻐하였다.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옷을 여미고 합장하며, 신발을 찾아 일어나려 하면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서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부처님이 오셨다.”
말을 마치자 돌아가셨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산에 있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다. 7일이 되어서야 향기가 멎었다.

∙승융(僧融)
당시 여산의 승융 역시 굳은 절개로 신령함과 통하여 귀신들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한다.

4) 석승제(釋僧濟)
승제는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여산에 들어와서 혜원에게 수학하였다. 대승ㆍ소승의 여러 경전과 세속의 경전ㆍ수학ㆍ서법에 모두 마음으로 연마하고 노닐며, 그 깊은 요체를 꿰뚫었다. 30세가 넘자, 비로소 고을에 나가 개강하여 으뜸가는 강사의 자리를 맡았다. 혜원은 늘 그를 보고 말하였다.
“나와 함께 불법을 크게 퍼뜨릴 사람은 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그 후 잠시 여산에 머물다가 갑자기 병이 위독함을 느꼈다. 이에 서방 정토에 정성을 다하여 아미타불을 상상하였다. 이때 혜원은 하나의 촛불을 보내서 말하였다.
“너는 안양정토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투도록 하여라.”
승제는 촛불을 잡고 책상에 기대어, 생각을 멈추고 어지럽지 않게 하였다. 다시 대중 승려들이 밤에 모여, 그를 위하여 『무량수경』을 돌려 읽게 청하였다. 5경(更)에 이르자 승제는 촛불을 동학에게 주어, 승려들 가운데로 걸어가게 하고는 잠시 누웠다.
꿈에 자신이 촛불을 잡고 허공을 타고 갔다. 무량수불을 직접 만나 손바닥 위에 영접하여 얹어놓고, 두루 시방세계에 이르렀다가 모르는 사이에 갑자기 깨어났다. 이 사실을 모두 자세히 병을 간호하는 사람에게 설명하고는, 한편 슬퍼하고 한편으로 위안 받았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몸[四大]에는 아무런 병의 고통이 없었다.
다음날 저녁이 되자 갑자기 신발을 찾아 일어났다. 눈으로 허공을 거슬러서 마치 무엇인가 보는 듯하였다. 잠시 후 다시 누웠다. 얼굴은 더욱 즐거운 빛이었다. 이어 옆 사람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이에 몸을 돌려 오른쪽 겨드랑이 쪽으로 굽히고는 말과 기력이 다하였다. 그때 나이는 45세이다.

5) 석법안(釋法安)
법안은 일명 자흠(慈欽)이라 한다.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혜원의 제자로서 계율을 훌륭히 수행하고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아울러 선업(禪業)을 닦았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들을 잘 교화하고 개도(開導)하여, 사악한 것을 뽑아내어 바른 길로 돌아가게 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7) 신양현(新陽縣)에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있었다. 현에 큰 사당 나무가 있고, 나무 밑에는 신묘(神廟)가 있었다. 그 좌우에 사는 백성이 백 명을 헤아렸다. 호랑이를 만나 죽는 사람이 하루저녁에 한두 사람씩 있었다.
법안은 일찍이 그 현을 돌아다닌 일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그 마을에 묵었다. 마을사람들은 호랑이가 두려워 일찍 문을 닫아버렸다. 법안은 곧바로 나무 아래로 가서 밤새도록 좌선을 하였다.
새벽 무렵 호랑이가 사람을 업고 와서, 나무의 북쪽에 집어던지는 소리를 들었다. 법안을 보더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놀라는 것 같기도 하였다. 펄쩍 뛰어 법안 앞에 엎드렸다. 법안은 호랑이를 위하여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호랑이는 땅에 꿇어앉아 움직이지 않다가 얼마 후에 떠났다.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호랑이를 뒤쫓아 나무 밑에 이르렀다. 법안을 보고 크게 놀라고는 신인(神人)이라 생각하였다.
드디어 이 말이 온 현에 전해지니, 선비와 서민들이 종사로 받들었다. 호랑이의 재앙은 이로 말미암아 종식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묘를 고쳐 절을 세워 법안을 머물게 하였다. 좌우의 발과 정원을 모두 희사하여 대중의 복전으로 삼았다.

그 후 탱화와 불상을 만들고자 하여 구리의 녹[銅靑]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살림이 힘들어서 얻을 수가 없었다.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탁상 앞을 빙 돌면서 말하였다.
“이 밑에 동종(銅鍾)이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 곧 그곳을 파보았다. 과연 두 구의 동종을 얻어, 그 동종의 녹으로 불상을 이루었다. 그 후 구리는 혜원이 불상을 주조할 때에 도움을 주고, 나머지 하나의 종은 무창태수(武昌太守) 웅무환(熊無患)이 빌려 보다가, 마침내 그곳에 머물러 두었다. 그 후 법안이 세상을 마친 곳은 모른다.

6) 석담옹(釋曇邕)
담옹의 성은 양(楊)씨이며 관중(關中) 사람이다. 젊어서 위진(僞秦)에서 벼슬하여 위장군(衛將軍)에 이르렀다. 키가 8척이고 씩씩함과 강함이 보통사람을 뛰어넘었다. 태원(太元) 8년(383) 부견(符堅)을 따라 남방을 정벌하였다. 진(晋)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다시 장안으로 돌아와서, 도안을 좇아 출가하였다.
도안이 저 세상으로 가자, 마침내 남쪽 여산에 몸을 던져, 혜원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내외의 경서를 대부분 두루 섭렵하였다. 뜻이 법을 펴기를 숭상하여, 피로하고 괴로운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 후 혜원을 위하여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鳩摩羅什)에게 혜원의 편지를 드렸다. 심부름을 한 것이 거의 십여 년이다. 풍류를 고양시켜 격발하여 산봉우리를 흔들 만큼[搖動峰岫] 강하고 굳세며 과감하였다. 구마라집과 단독으로 마주하여서도 스승인 혜원을 욕보이지 않았다[專對不辱].

서울 도량사(道場寺)의 승감(僧鑒)이 그의 덕과 이해력에 고개 숙여, 양주(楊州)로 돌아오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혜원의 나이보다 많다 하여 마침내 과감하게 떠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혜원의 문하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마음 편하게 자는 부류가 적지 않았다. 혹 훗날 추대하여 사양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작은 인연을 빙자해서 담옹을 문하에서 쫓아냈다. 담옹은 명을 받들고 산에서 나왔으나, 얼굴에서 원망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곧 산의 서남쪽에 초가집을 세워 제자인 담과(曇果)와 맑게 선문(禪門)을 생각하였다.

어느 날 담과의 꿈에 산신(山神)이 나타나 5계(戒)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담과가 말하였다.
“스승께서 이곳에 계시니 가서 물어보고 계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오.”
얼마 뒤 담옹은 단의(單衣)를 입고 모자를 쓴 어떤 사람을 보았다. 풍채와 모습이 단아하였다. 종자(從者)는 스무 사람 가량 되었다. 그가 5계 받기를 요청하였다. 담옹은 담과가 앞서 꿈꾼 일로 해서, 이 사람이 산신령임을 알고는 곧 설법하고 계를 내려 주었다. 산신은 외국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선물로 주었다. 예배를 드리고는 인사하고 헤어지자마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혜원이 죽던 날, 달려가 발을 동동거리며 통곡하여 그 아픔이 부자 사이보다 더 깊었다.
그 후 형주(荊州)로 가서 죽림사(竹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7) 석도조(釋道祖)
도조는 오(吳)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대사(臺寺)의 지법재(支法濟)의 제자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재치 있는 생각이 있어 정성껏 부지런히 배움에 힘썼다. 후에 동지인 승천(僧遷)ㆍ도류(道流) 등과 함께 여산에 들어갔다. 7년 만에 모두 산중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각기 익힌 것에 따라 날로 새로움이 있었다. 혜원은 늘 말하였다.
“도조 등은 쉽게 깨닫는다. 모두가 이들 같다면, 다시는 윤회하여 뒷날 다시 태어날 것을 근심하지 않으리라.”
승천과 도류는 모두 나이 스물여덟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혜원이 한탄하였다.
“이들은 모두 재주와 의리가 빼어나게 무성하여, 맑은 깨달음이 날로 새로웠다. 이러한 재능을 품고서도 길이 저 세상으로 갔으니, 하나같이 어쩌면 이다지도 가슴 아프단 말인가?”
도류는 모든 경전의 목록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어, 도조가 완성하였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그 후 도조는 서울의 와관사(瓦官寺)로 돌아가 강설에 종사하였다. 환현이 늘 그의 강설을 듣고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도조는 늦게 발심했지만 혜원보다 더 낫다. 다만 유교(儒敎)에 대한 해박함이 혜원에 미치지 못할 따름이다.”
그 후 환현(桓玄)이 정사를 돕는 자리에 올라, 사문(沙門)들로 하여금 왕자를 공경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도조는 곧 그곳을 떠나 오나라의 대사(臺寺)로 돌아갔다.
얼마 뒤 환현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자, 고을에 명령하여 도조를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도조는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이에 인간세계의 일에서 자취를 끊고 하루 종일 도를 강론하였다. 진(晋)의 원희(元熙) 1년(419)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혜요(慧要)
혜원의 제자인 혜요도 경전과 율법을 터득하였다. 교묘한 사고력은 더욱 뛰어났다. 산중에는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刻漏]가 없었다. 이에 개울 가운데 열두 잎의 연꽃을 세워, 흐르는 물결의 바뀜에 따라 열두 시각을 정하도록 하였다. 해시계[晷景]와 차이가 나지 않았다. 또한 나무로 만든 연[木鳶]을 만들었다. 수백 걸음의 거리를 날아갔다.

∙담순(曇順)ㆍ담선(曇詵)
혜원에게는 또 담순ㆍ담선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모두 교리 이해[義學]로 명성을 날렸다.
담순은 본래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구마라집에게서 수업하였다. 후에 돌아와 혜원에게 사사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덕스런 행실이 있었다. 남만교위(南蠻校尉)ㆍ유준(劉遵)이 강릉에 죽림사(竹林寺)를 세우려고 일을 시작해 주기를 청하였다. 혜원은 담순을 그곳에 파견하였다.
담선은 또한 맑고 고상하며 모범적인 풍모가 있었다. 『유마경』에 주석을 달았다. 또한 『궁통론(窮通論)』 등을 지었다.

∙법유(法幽)ㆍ도항(道恒)ㆍ도수(道授)
이밖에 법유ㆍ도항ㆍ도수 등 백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혹은 논리 이해에 깊고 밝으며, 혹은 중생의 일을 바로잡고 구제한 사람도 있고, 혹은 계행이 청정하여 드높은 사람도 있고, 혹은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간 사람도 있다. 모두가 당시 세상에 이름을 떨쳐서, 지금까지 그 일이 전한다.

8) 석승략(釋僧䂮)
승략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땅 이양(泥陽) 사람이다. 진(晋)나라 때 하간(河間)의 낭중령(郞中令)을 지낸 부하(傅遐)의 맏아들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홍각 법사(弘覺法師)의 제자가 되었다.
홍각 법사 역시 한 시대의 빼어난 사문이다. 승략은 처음 그를 따라 수업하다가, 후에 청사(靑司)ㆍ번(樊)ㆍ면(沔) 지방으로 노닐었다. 육경과 삼장에 통달하였다. 율행을 맑게 삼가하여 불법을 바로잡고 떨칠 수 있었다.
요장(姚萇)ㆍ요흥(姚興)은 일찍부터 그의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여 평소 알고 존중하였다. 그들이 황제를 참칭하여 관중을 소유하자, 깊이 서로 머리 숙여 공경하였다. 요흥이 삼보를 받들어 드높게 믿자, 불법의 교화가 널리 성대하였다.

그 후 동수(童壽, 鳩摩羅什)가 관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먼 곳의 승려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비구와 비구니가 많아지자 허물과 과실이 간혹 있었다. 요흥이 말하였다.
“범부가 승가를 배우더라도 괴로움을 참는 단계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찌 허물이 없을 수 있겠느냐? 허물이 있어도 이를 삼가지 않으므로, 마침내 허물이 많아지는 것이다. 마땅히 승려의 우두머리[僧主]를 세워, 불법의 크나큰 바람을 맑게 하리라.”

이어 조서를 내렸다.
“불법이 동방으로 옮겨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크게 성해져 비구와 비구니가 너무 많아졌다. 마땅히 여기에는 기강이 필요하다. 원대한 규칙을 내려 무너진 실마리를 구제하는 것이 좋겠다. 승략 법사는 젊을 때부터 배움이 넉넉하였다. 늙어서는 덕이 꽃다우니 나라 안의 승주(僧主)로 삼을 만하다. 승천(僧遷) 법사는 선정(禪定)과 지혜를 아울러 닦아서 곧 대중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러니 법흠(法欽)과 혜빈(慧斌)과 함께 승록(僧錄)을 관장하라.”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공급하였다. 승략은 시중(侍中)의 자리에 준하여 조서를 전해 받아, 양이 모는 수레에다 각각 두 사람을 거느렸다. 승천 등에게도 모두 후하게 공급하였다. 이들은 함께 일하면서 순수하고 검소하여, 넉넉히 당시의 여망에 들어맞았다. 오부대중이 엄숙하고 맑아져서 어느 때 할 것 없이 게으름이 없었다.

홍시(弘始) 7년(405)에 이르러 칙명으로 친히 믿음을 더하여, 몸을 부축하고 말씀을 알리는 종자(從者)를 각각 30명씩 두게 하였다.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것은 승략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승략은 몸소 걸어 다니고, 수레와 가마는 늙고 병든 승려들에게 공급하였다. 얻은 공양과 구휼품은 대중의 용도에 충당하였다. 비록 늙은 나이였지만, 경전과 계율을 강설하여 대중을 돕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홍시(弘始, 399~416) 말년에 장안의 대사(大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9) 석도용(釋道融)
도융은 급군(汲郡) 임려(林慮) 사람이다. 열두 살에 출가하였다. 그의 스승은 그의 정신과 풍채를 사랑하여, 먼저 불전 밖의 전적을 배우게 하였다. 마을에 가서 『논어』를 빌렸다. 끝내 가지고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이미 다 외어버렸다. 스승이 다시 책을 빌려와서 다시 외우게 하였다.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외우니, 감탄하면서 특이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그의 마음대로 유학하게 하였다.

나이 서른 살에 이르러서는, 재주와 슬기로운 이해력이 뛰어나 내외의 경서를 마음속에서 노닐었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짐짓 그를 찾아가 묻고 가르침을 받았다. 구마라집이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여 요흥(姚興)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도융을 만났습니다. 기특하고도 총명한 승려입니다.”
요흥이 불러서 보고는 감탄하고 중히 여겼다. 칙명으로 소요원(消遙園)에 들어가 경전을 바로잡고 상세하게 번역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구마라집에게 보살계의 원본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지금 세상에서 행한다.
그 후 『중론(中論)』을 번역하여 비로소 두 권을 얻었다. 도융은 곧 강원에 나아가 경문의 글과 말을 분석하여, 맨 먼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뜻을 꿰뚫었다. 구마라집은 다시 도융에게 명하여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직접 이 강의를 듣고 곧 찬탄하였다.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도융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갑자기 사자국(師子國)의 한 바라문(婆羅門)이 나타났다. 총명하고 말재주가 있고 많이 배워서, 서역의 속서(俗書) 치고 펼쳐 외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는 외도의 종사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곧 그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어찌 석씨(釋氏)의 도풍만을 홀로 중국 땅에 전해, 우리들의 바른 교화가 동쪽나라에 젖어들지 못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마침내 낙타를 타고 책을 등에 지고 장안에 들어왔다. 요흥이 그를 만나보았다. 입과 눈으로 비위를 맞춰 알랑거려[口眼偏僻] 자못 매혹되었다. 바라문이 곧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에는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至道無方]. 각각 자신들이 일삼는 것을 존중하기 마련입니다. 지금 중국 땅이 승려들과 변론을 겨루어 보기를 청합니다. 우월함이 드러나는 바를 따라서 교화를 전하게 해주십시오.”
요흥은 곧 허락하였다.

당시 관중의 대중승려들은 서로의 부족함을 쳐다보기만 하고 감당할 사람이 없었다.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이 외도는 총명하기가 보통사람과 다르다. 말씨름을 하면 반드시 이긴다. 위없이 큰 도가 우리 승도들에게 있건만, 그에게 굴복한다면 자못 슬픈 일이다. 만약 외도로 하여금 뜻을 얻게 한다면 법륜의 바퀴축이 꺾어진다. 어찌 그래서야 되겠느냐?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대 한 사람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도융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아도 재주와 힘이 그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외도의 책을 다 펴서 읽어보지는 못하였다. 곧 비밀히 사람을 시켜 바라문이 읽는 경전의 제목을 베껴오게 하였다. 한번 펴보고서 곧바로 외웠다.
그 후 날을 정하여 논리를 토론하였다. 요흥이 몸소 그 자리에 나오고,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이 모두 대궐 아래에 모였다. 관중의 대중 승려들도 모두 사방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도융은 바라문과 서로 견주어 항변을 주고받았다. 칼날 같은 언변으로 현묘한 기풍을 날리니, 그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바라문은 스스로 말과 이론으로는 이미 꺾였음을 알았다. 그러나 아직도 널리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도융은 곧 그가 읽은 책과 중국 땅의 경전과 역사책의 이름과 제목을 나열하였다. 그 책의 권수와 부수가 바라문보다 세 배나 더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이 그를 조롱하였다.
“그대는 중국의 넓은 학문[大秦廣學]을 듣지 못하였는가? 어찌하여 홀연히 경솔하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가?”
바라문교도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도융의 발 아래에 머리가 땅에 닿게 절을 하였다. 며칠 안에 얼마 안 되어 떠났다. 불법의 기운이 거듭 다시 중국 땅에 일어난 것은 도융의 힘 덕분이다.

그 후 도융은 팽성(彭城)으로 돌아와 항상 강설을 이어갔다. 도를 묻고자 찾아온 사람이 천여 명에 달하였다. 의지하여 따르는 문도들의 수도 3백 명이 꽉 찼다.
성품이 떠들썩한 자리를 좋아하지 않아, 항상 다락에 올라가 경전을 펴놓고 완상하였다.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이끌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법을 폈다. 그 후 팽성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법화경』ㆍ『대품경』ㆍ『금광명경』ㆍ『십지론』ㆍ『유마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모두 세상에서 행한다.

10) 석담영(釋曇影)
담영은 혹 북쪽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여 교유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을 편히 여기고, 배움에 뜻을 두었다. 행동거지를 자세하게 살펴 지나침을 미치지 못함과 같이 여겼다. 그러나 정신과 기력이 재빨라서 뜻과 행동이 정반대였다.
『정법화경(正法華經)』과 『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을 잘 강의하였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천 명을 헤아렸다.

그 후 관중으로 들어가니 요흥이 크게 예의바른 접대를 더 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이르자, 담영은 그를 찾아가 따랐다. 구마라집이 요흥에게 말하였다.
“지난 번 담영을 만났습니다. 그 역시 이 나라 풍류의 드높은 기준이 될 만한 승려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소요원(逍遙園)에 머물면서 구마라집의 역경을 돕게 하였다.
처음 『성실론(成實論)』의 번역본이 나올 때, 쟁론하는 문답이 차례대로 거듭 왕복하였다. 담영은 그 지리함을 한탄하였다. 곧 이를 줄여 다섯 번으로 묶어서, 마침내 구마라집에 바쳤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너무나 훌륭하다. 깊이 나의 뜻에 잘 맞는다.”
구마라집은 그 후 『묘법화경(妙法華經)』을 번역하였다. 담영은 이미 예전부터 이 경을 으뜸으로 삼았다. 그래서 더욱더 심사숙고하여 곧 『법화의소(法華義疏)』 4권을 지었다. 아울러 『중론(中論)』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 속 깊이 숨어살면서 티끌세상 밖에서 절조를 지켰다. 공덕을 닦고 선행을 세워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11) 석승예(釋僧叡)
승예는 위군(魏郡)ㆍ장락현(長樂縣)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렇지만 나이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의 뜻을 따를 수 있었다. 승현(僧賢) 법사에게 몸을 맡겨 제자가 되었다. 성품이 겸허하고 속내가 민첩하여, 배울수록 때마다 나아졌다. 나이 스물두 살에 이르자 경론에 두루 뛰어났다.
어느 날 승랑(僧朗) 법사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의 강의를 들었다. 듣다가 여러 번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였다. 승랑 법사는 승현 법사와는 호상(濠上)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토론한 장자(莊子)와 혜자(惠子)같이 가까운 사이였다[濠上之契]. 승현 법사에게 말하였다.
“요즘 승예의 질문을 받아보았어. 그렇지만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해도 통할 수가 없었어. 뛰어난 스승의 뛰어난 제자라고 일컬을 만하더군.”

스물네 살이 되자, 이름난 나라를 두루 떠돌면서 곳곳에서 강설하였다. 그를 알아주는 이들이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따라와 무리를 이루었다. 그는 항상 한탄하였다.
“경법은 아무리 미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과를 알 만큼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선법(禪法)은 아직 전수받지 못하였다. 그러니 마음을 둘 곳이 없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에 이르렀다. 그에게 청하여 『선법요(禪法要)』 3권을 번역했다. 첫 권은 구마라타(鳩摩羅陀)가 지은 것이고, 마지막 권은 마명(馬鳴)이 설법한 것이다. 중간 권은 외국의 여러 성인들이 함께 지은 것이어서, 역시 『보살선(菩薩禪)』이라 일컬었다.
승예는 이 책을 얻고는 밤낮으로 이를 닦고 익혔다. 마침내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다섯 경계를 정밀하게 단련하고, 훌륭히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의 여섯 뿌리를 맑게 하는 경지에 들어갔다. 위사도공(僞司徒公) 요숭(姚嵩)이 깊이 예로써 귀하게 대우했다.

요흥(姚興)이 요숭에게 물었다.
“승예는 어떠한 사람인가?”
요숭이 대답하였다.
“실로 업(鄴)과 위(衛)의 소나무와 잣나무입니다.”
요흥은 칙명을 내려 그를 만났다.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여 그의 재능과 기량을 구경하였다. 승예는 고상한 인품이 깊고 높으며, 머금고 토해내는 말이 빛나고 빈틈이 없었다. 요흥이 크게 칭찬하고 기뻐하였다. 곧 칙명으로 봉록과 관리와 사람과 가마를 공급하였다.
그 후 요흥은 요숭에게 말하였다.
“승예는 곧 사해의 영수[四海標領]이다. 어찌 한낱 업과 위의 소나무와 잣나무에 그치겠는가?”
이에 아름다운 명성이 멀리 퍼져나가,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의 덕에 귀의하였다.

구마라집이 번역하는 경은 모두 승예가 참고하여 바로잡았다. 예전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의 「수결품(受決品)」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보고 사람은 하늘을 본다[天見人人見天]’고 하였다.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하다가 이 대목에 이르자 말하였다.
“이 말은 서역의 말뜻과 같다. 다만 말이 실질보다 지나친 점이 있을 따름이다.”
승예가 말하였다.
“하늘과 사람이 교접하여 둘이 서로 마땅함을 만나는 것[人天交接兩得相見]이 아니겠습니까?”
구마라집이 기뻐하여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그의 빼어난 깨달음의 두드러져 나옴이 모두 이와 같았다.

그 후 『성실론』의 번역본이 나오자, 승예를 시켜 이를 강의하였다. 구마라집이 승예에게 말하였다.
“이 쟁론(諍論) 가운데는 일곱 개의 변화된 곳이 있다. 그 글이 아비담의 이론을 논파한다. 그러나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적고 숨겨져 있기에, 만약 물어보지 않고 터득한다면 뛰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승예가 그윽하고 은미한 뜻을 열고 밝히면서, 끝내 구마라집에게 자문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참뜻에 맞게 아득한 이치를 이해하였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경론을 번역하면서 그대와 만났으니 참으로 한탄할 바가 없구나.”
『대지론(大智論)』ㆍ『십이문론(十二門論)』ㆍ『중론(中論)』 등의 서문을 지었다. 아울러 『대품경(大品經)』ㆍ『소품경(小品經)』ㆍ『법화경』ㆍ『유마경』ㆍ『사익경(思益經)』ㆍ『자재왕선경(自在王禪經)』 등의 서문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과거 승예가 훌륭히 위의를 가다듬어 경법을 널리 편찬하면서부터, 항상 이 모든 업적을 회향하여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늘 일상생활의 어느 때라도 감히 서쪽으로 똑바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명이 다함을 알고, 문득 승려들을 모아 고별인사를 하면서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평소에 서원하여 서방세계에 태어나고 싶었다. 내가 보는 바대로라면 어쩌면 갈 수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으나, 결정코 벗어나리니 여우처럼 의심하지 말거라. 다만 몸ㆍ입ㆍ생각으로 지은 업보는 혹 서로 어긋나고 범하기도 하였다. 원컨대 큰 자비를 베풀어 오랜 겁토록 불법의 벗들이 되길 바란다.”
이에 방으로 들어가 몸을 씻고 목욕하고, 향 피우고 예배드렸다. 침상으로 돌아와 서방을 향하여 합장하면서 세상을 마쳤다. 이날 같은 절에 있던 이들은 모두 오색의 향기가 감도는 연기가 승예의 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때 나이는 67세이다.

∙승해(僧楷)
당시에 사문 승해도 승예와 동학으로 역시 높은 명성이 있다고 한다.

12) 석도항(釋道恒)
도항은 남전(藍田) 사람이다. 아홉 살 때 길에서 놀 때에 은둔하는 선비인 장충(張忠)이 그를 보고 찬탄하였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상(相)이 있다. 속세에 있으면 재상이 되어 반드시 정치를 보좌하는 공이 있을 것이다. 도에 처하면 반드시 불법을 빛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늙어서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 한이로구나.”
도항은 어려서 부모를 잃었다. 계모를 섬기면서 효자로 알려졌다. 집이 가난하여 모아놓은 재산이 없어, 항상 손수 그림을 그리고 비단을 짜서 계모를 받들어 모시는 데 썼다. 몹시 경전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배움에 힘썼다.
나이가 스무 살에 이르러 계모도 죽자, 장사 지냄에 예를 다하였다. 상복을 다 입고 나서는 출가하였다. 불교 논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였다. 아울러 뛰어난 것이 많아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해박하였다. 재치 있는 생각은 맑고 민첩하였다.
그 후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 곧 그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닦으니, 구마라집이 크게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여러 경전을 번역하기에 이르러서는 모두 자세하게 바로잡는 일을 도왔다.

∙도표(道標)
당시 도항의 동학으로 도표가 있었다. 그도 자못 재능과 힘이 있어 당시 명성을 독차지하여 도항과 버금갔다. 위진(僞秦)의 왕 요흥(姚興)은 도항ㆍ도표 두 사람을 신령한 기운이 걸출하고 밝아서, 나라를 다스릴 도량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곧 위상서령(僞尙書令) 요현(姚顯)에게 명령하여, 도항ㆍ도표 두 사람을 끈질기게 핍박하였다.
“도를 그만두고 왕업을 도와 떨치게 하라.”
다시 도항 도표에게 글을 내렸다.
“경들의 밝은 지조는 실로 가상스러운 점이 있다. 다만 나는 사해에 군림하여 정치에 재능 있는 사람이 급히 필요하다. 지금 상서령 요현에게 명령하여, 경들의 법복을 빼앗게 하여 이 시대의 세상을 돕게 하였다. 진실로 마음을 도를 맛봄에 둔다면, 어찌 도인ㆍ속인의 차별에 얽매이겠는가? 바라건대 나의 이 생각을 알아주어서 절조를 지키겠다며 사양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에 도항ㆍ도표은 회답하였다.
“지난달 20일에 조서를 받들어보았습니다. 저희들의 법복을 빼앗으신다는 명을 받고는, 슬픈 마음에 젖어 속된 정[五情]을 지키는 것조차 잃었습니다. 저희들은 재질이 어둡고 짧으며 불법에 물든 지도 아직 깊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승복 아래에서 신명을 다하기를 맹세하였습니다. 아울러 불법을 익히느라 세속의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부질없이 비상한 업적만 폐지하여, 끝내 특수하게 남다른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는 오히려 엄릉(嚴陵)의 마음을 구속하지 않았습니다. 위(魏)의 문제(文帝)도 관영(管寧)의 지조를 받아 들였습니다. 지존의 높은 마음을 억누르고 필부의 미미한 뜻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하물며 폐하께서는 불도로써 중생을 다스리고 아울러 삼보를 널리 퍼뜨리고 계십니다. 원컨대 인민의 심정을 비추어보시고, 중생에 통달한 이치를 널리 드리우시기 바랍니다.”

요흥은 다시 구마라집과 승략(僧䂮) 두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헤어진 지 이미 몇십 일이 되어 매양 그리움이 더해간다. 차츰 따뜻해지면 크게 쉬겠거니 할 따름이다. 별 볼일 없는 몸이 위대한 거동을 하려다 보니, 더욱더 분수에 맞게 처신할 길이 없어, 딱히 마음만 산란스러울 뿐이다.
요즘 온갖 일의 정성스러움을 재능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 필요가 있다. 근간에 도항ㆍ도표 두 사람에게 조서를 내려, 아라한의 옷을 벗고 큰 선비의 자취를 찾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도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없으니, 원컨대 두 법사가 나를 돕도록 이들을 타이르기 바란다.”

구마라집과 승략이 회답하는 편지를 보냈다.
“무릇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가장 뛰어난 이는 도로써 백성들을 길러 만물이 스스로를 옳게 여기며, 그 다음가는 이는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1) 그런 까닭에 예전의 밝은 임금은 성품이 어긋난 사람은 다스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살피어, 남에게 맡기는 데에는 인연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堯) 임금은 허유(許由)를 기산에 놓아두었습니다. 위문왕(魏文王)은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에서 인사하는 예를 다하였습니다. 한고조(漢高祖)는 상산사호(商山四皓)2)를 종남산(終南山)에 놓아 주었습니다. 숙도(叔度)는 한악(漢岳)에게 부드러운 수레를 사양하였습니다. 이는 무릇 현인의 성품에 맞추어 현명함을 터득한 조치였습니다.
지금 도항ㆍ도표 등은 덕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한 것도 아닙니다. 분수도 절조를 지키는 정도입니다. 그윽한 교화를 익힌 것도 아주 자잘하여, 불도를 가슴에 새겨 따르는 수준입니다. 심오한 경전을 펼쳐 분석하거나,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를 연구하는 데 이르러서는, 어린 동자들을 깨우쳐 교화의 공덕을 도울 정도의 수준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기왕의 은덕을 베푸시어, 그들의 미약한 지조를 지키도록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도 요흥은 자주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온 경내가 이를 구제하여 위태로움을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이에 도항은 마침내 탄식하였다.
“옛사람의 말처럼, 나의 재화를 더해주는 것은 나의 정신을 손상시킨다. 나의 명성을 생기게 하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로다.”
이에 그림자를 바위 골짜기에 숨기었다. 어두운 수풀더미 속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정을 맛보아, 인간세계 밖에서 자취를 멀리하였다.
진(晋)의 의희 13년(417)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도항은 『석박론(釋駁論)』과 『백항잠(百行簪)』을 짓고, 도표는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의 서문과 「조왕교문(吊王喬文)」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13) 석승조(釋僧肇)
승조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대서(代書)로 업을 삼았다. 마침내 책을 베껴 씀을 인연하여 경전과 역사를 두루 읽고, 고전문헌을 갖추어 다 읽었다. 그윽하고 미묘한 진리를 좋아하여, 늘 『노자』와 『장자』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어느 날 『노자』의 「덕장(德章)」을 읽다가 탄식하였다.
“아름답기는 아름답다. 그러나 정신이 그윽함에 깃드는 방법을 기약하기에는, 아직 선(善)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그 후 그는 구역 『유마경』을 보고 기뻐하였다. 머리위로 받들어 펼쳐 그 의미를 찾아 완상하고는 말하였다.
“비로소 귀의할 곳을 알았다.”
이를 인연으로 출가하였다. 배움이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삼장에 뛰어났다. 나이가 스무 살 때 이름을 관중과 조정에 떨쳤다. 당시 명예를 다투는 무리들이 그의 일찍 출세한 것을 시기하지 않음이 없었다. 혹 천리 밖의 먼 곳에서 책을 지고 달려와, 관중으로 와서는 변론을 겨루기도 하였다. 승조는 이미 재치 있는 생각이 아득하고 현묘한 데다 더욱이 담론에 뛰어났다. 핵심을 타서 그들의 날카로움을 꺾어, 일찍이 흘려 지나치거나 막히는 일이 없었다.
당시 경조의 덕망 있는 유학자나 관외의 빼어난 선비들치고, 그의 칼날 같은 변론에 고개 숙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기운을 누르고 콧대를 꺾었다.

그 후 구마라집이 고장(姑藏)에 이르렀다. 승조가 먼 곳에서 찾아가 따르자 구마라집은 끝없이 감탄하고 칭찬하였다.
구마라집이 장안으로 가자, 승조도 그를 따라 돌아왔다. 요흥(姚興)은 승조에게 명하여, 승예(僧叡) 등과 더불어 소요원(逍遙園)에 들게 하여, 경론을 자세히 가다듬는 일을 돕게 하였다.
승조는 성인의 시대와의 거리가 아주 멀어서 글 뜻에 조잡한 곳이 많다고 여겼다. 먼저 예전에 해석한 경전에서 때로 틀리고 잘못된 곳에 대해, 구마라집을 만나 묻고 배워서 깨달음이 더욱 많아졌다.
『대품경』을 번역한 후에, 승조는 곧 모두 2천여 글자에 이르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3)을 지었다. 마침내 구마라집에게 바치니, 구마라집이 이를 읽고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이어 승조에게 말하였다.
“나의 이해력으로는 그대를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말할 때 서로 공경하도록 하자.”
당시 여산의 숨어사는 선비 유유민(劉遺民)이 승조의 이 논을 보고 곧 찬탄하였다.
“뜻밖에 방포(方袍: 승려의 外衣)에도 다시 평숙(平叔:漢代의 文章家)이 있구나.”
이어 이것을 혜원에게 보이니, 혜원이 책상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로다.”
그러고는 함께 펴서 완미하기를 거듭 되풀이하였다.

유유민은 승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 아름다운 물음을 받고, 멀리 우러러보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연말의 엄한 추위에 건강은 어떻습니까? 소식을 전할 길이 막히니, 더욱 끌리고 답답한 마음만 더해집니다. 제자는 시골구석에서 오래된 병으로 항상 앓습니다. 대중들이 건강하고 화목하기 바라며, 외국에서 온 법사들께서도 편안하고 건강하십니까?
지난해 여름 끝 무렵에 상인(上人)의 『반야무지론』을 보았습니다. 재주의 운용이 맑고 걸출하시며, 취지 가운데는 깊이 진실한 맛이 담겼습니다. 성인의 글을 미루어 밟아나가, 완연히 돌아가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책을 펴서 정중하게 완미해 보니,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대승의 깊은 못에서 목욕시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품은 회포가 그윽함조차 끊어버린 곳에 있음을 깨달았고, 정교한 솜씨를 다하여 어느 곳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만 어두운 사람이라 깨닫기 어려워 아직도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지금 문득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말씀드립니다. 원컨대 조용한 여가에 거칠게나마 이를 풀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대하여 승조는 편지로 화답했다.
“예전에 뵈옵지 못하여 우두커니 상상하느라 수고로울 따름입니다. 전에 보내신 소(疏)와 질문을 펴놓고, 반복해서 그 취지를 찾아보니 기쁘기가 잠시나마 마주 대한 듯하였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고 삼가 할 절기에, 요즘 항상 어떻게 지내십니까?
빈도는 고단한 병으로 늘 몸이 좋지 않습니다만, 이곳 대중 가운데 몸담으며 심상하게 지낸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은 크게 건승하십니다.
후진(後秦)의 임금4)은 도에 대한 성품이 자연스러워, 타고난 기틀이 속인을 뛰어넘습니다. 삼보를 확고하게 지키고, 도를 펴는 데 힘씁니다. 이로 말미암아 색다른 경전과 뛰어난 승려들이 먼 곳에서부터 이르러, 영취산의 기풍이 이 땅에 모여듭니다. 이를 이끄는 임금의 원대한 거동은 곧 천 년에 한번 있을 나루터나 대들보라 하겠습니다. 서역에서 돌아와 대승의 새로운 경전 2백 여 부를 가져왔습니다. 구마라집 스승님이 대사(大寺)에서 새롭게 여러 경전을 번역하니, 법장(法藏)의 깊고 넓음이 나날이 각별하게 들립니다.

선사(禪師)5)는 와관사(瓦官寺)에서 선도(禪道)를 가르치니, 문도 수백 명이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으며 화목하고 엄숙하여,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또 삼장법사6)는 중사(中寺)에서 율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근본과 지말이 정밀하고 소상하여, 마치 부처님께서 처음 제정한 것을 보는 듯합니다. 비바사(毘婆娑)7) 법사는 석양사(石羊寺)에서 『사리불비담(舍利弗毘曇)』을 출간하였습니다. 범어 원본이라 비록 아직 번역하지는 않았지만, 때로 질문하는 가운데 나오는 말은 신기(新奇)합니다.

빈도는 일생을 분수에 넘치게 아름다운 운세에 참여하고 성대한 교화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석가모니의 열반의 집회를 보지 못한 것이 한탄스럽습니다. 그밖에 저에게 무슨 남은 한이 있겠습니까? 다만 도가 뛰어난 군자와 이 법회에 참가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제 글이 깊이 있다고 칭찬하시고, 애오라지 다시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물어 오신 내용이 완곡하고 절실하여, 제가 영읍(郢邑)의 목공처럼 마음대로 요리하기는 어렵습니다. 빈도는 생각이 미세한 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아울러 글과 말에 서투릅니다. 게다가 또 지극한 취지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말하면 근본 종지와는 뒤틀립니다. 이러쿵저러쿵 그만두지 않고 말해 보았자 끝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미친 사람의 말로서 보내오신 취지에 대답할 따름입니다.”

그 후 승조는 다시 『부진공론(不眞空論)』과 『물불천론(物不遷論)』 등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에 주석을 달고, 여러 경론의 서문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그 후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길이 저 세상으로 간 것을 추도하였다. 발돋움하며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사무쳐서 마침내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을 지었다.

그 글에서 말한다.
“경에서는 유여열반(有餘涅槃)ㆍ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한다. ‘열반’이란 범어를 중국말로 번역하면 ‘무위(無爲)’라는 뜻이다. 또한 ‘멸도(滅度)’라고도 표현한다. 무위라는 것은 허무적막(虛無寂寞)함이 유위의 세계보다 미묘하게 뛰어남을 취한 것이다. ‘멸도’라는 것은 큰 근심이 영원히 끊어져 4류(流)를 뛰어넘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대개 거울에 비친 모습이 돌아갈 곳이요, 칭호가 단절된 그윽한 집이다. 그러나 ‘유여’와 ‘무여’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나온 곳이 다른 호칭일 것이며, 중생에게 응대하는 거짓이름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한번 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다. 무릇 열반의 도라는 것은 고요하고 텅 비어서 형체나 표현으로 얻을 수 없다. 미묘하고 상(相)이 없어서 마음으로 알 수가 없다. 뭇 존재를 뛰어넘어 그윽한 세계로 올라가고, 태허의 허공을 헤아려서 길이 오래간다. 이를 쫓아가려 해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이를 맞이하려 해도 그 머리를 볼 수가 없다.
6취(趣)로도 그 태어남을 거두어드릴 수 없다. 힘으로 밀어붙여도 그 바탕을 변화시킬 수 없다. 아득하게 멀고 황홀하여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섯 개의 눈으로도 그 얼굴을 볼 수 없고, 두 귀로도 그 메아리를 들을 수 없다. 어둡고 그윽하니, 누가 이를 보았으며 누가 이를 깨달았겠는가? 두루 다스려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서, 홀로 유ㆍ무의 세계 밖에 그 자취를 끌고 간다.

그러므로 이를 말하는 사람은 그 진실을 잃는다. 이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그 어리석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 본성과 어긋나며, 이를 없다고 하는 사람은 그 바탕을 다친다.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는 마갈성(摩竭城)에서 방문을 닫았고, 유마거사는 비야리성(毘耶里城)에서 입을 다물었다. 수보리(須菩提)는 무(無)의 설을 제창함으로써 도를 밝혔고, 제석과 대범천은 들음을 끊음으로써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러한 모든 진리는 신(神)이 거느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입은 이를 위하여 다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말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말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말의 작용을 벗어난 것이다. 적멸에 영원히 편히 머물러 끝도 없고 시작도 없다.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맑고 고요하기가 허공과 같아, 이름도 없고 증득함도 없다.”
논(論)에서는 말한다.
“열반은 유(有)도 아니다. 또한 무(無)도 아니다. 말로 표현할 길은 끊어지고, 마음으로 행할 곳도 멸한 경지이다.”
무릇 경론을 지은 취지를 찾아보면, 이것이 어찌 허구의 말이겠는가? 결과적으로 유(有)가 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有)가 없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유의 경계에서 근본을 따져보면, 5음(陰)은 영원히 멸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의 고을에서 미루어 나가면, 그윽한 신령함은 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윽한 신령이 다하지 않으면, 맑고 고요한 하나(도)를 품는다. 5음이 영원히 멸하면, 모든 번뇌를 다 버린다. 모든 번뇌를 다 버리기 때문에 도와 함께 상통한다. 맑고 고요하게 하나를 품기 때문에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다. 신비하면서도 공덕이 없기 때문에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한다. 도와 함께 상통하기 때문에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다. 텅 비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을 ‘유’라 할 수 없다. 지극한 공덕이 늘상 존재하는 것을 ‘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와 ‘무’가 내부에서 단절되고, 일컬어지고 말하는 일이 외부에서 가라앉아, 보고 듣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4공(空)이 어두운 경지이다. 맑으면서도 평탄하고 머무르면서도 크나큰 경지이다. 9류(流)가 여기에서 서로서로 귀의한다. 뭇 성인이 여기에서 그윽하게 만난다. 이것이 곧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경지이며, 크게 그윽한 고을이다. 그런데도 ‘유’와 ‘무’로써 그 방향과 구역을 규정지어 신비한 도의 경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득히 먼 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느냐?”
그 뒤에도 열 번 펼치려다 아홉 번 구부려[十演九折] 무릇 수천 글자에 이르렀다. 그러나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 여기에다 싣지 못한다.

논이 이루어진 후에 요흥(姚興)에게 표(表)를 올렸다.
“저는 아뢰옵나이다. 하늘은 하나(도)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군왕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옵니다.8)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사리에 밝고 슬기로우며 몸을 삼가고 이치에 환하십니다. 도와 정신이 잘 만나서 나라 안의 인심과 미묘하게 일치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이치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라의 온갖 기틀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고 하루 종일 도를 펴는 데 힘써, 창생들이 의지하고 힘입도록 글을 드리우셔서 모범을 지으십니다. 그런 까닭에 지경 안에 네 가지 큰 것 가운데 임금이 그 하나로 자리잡은 것입니다.9)
열반의 도라는 것은 무릇 삼승의 귀의하는 곳이자, 대승의 깊은 곳집입니다. 그 경지는 멀고 아득하여 어렴풋한 세계입니다. 보고 듣는 영역이 끊어져 그윽하게 텅 비고 아득하여, 뭇 중생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분수에 넘치게 나라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배움터에서 한가롭게 살면서, 구마라집 문하에 있기를 십여 년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많은 경전의 취향이 다르고 뛰어난 귀취가 같지 않더라도, 열반이라는 하나의 진리만은 항상 가장 먼저 듣고 익혀 왔습니다. 다만 저는 재주와 식견이 어둡고 짧아, 비록 여러 번 가르침과 깨우침을 받기는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막막한 생각을 품어 어리석음이 다하도록 그만두지 못합니다.
또한 마치 어떤 깨우침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높고 뛰어난 분이 먼저 제창하신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감히 스스로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구마라집 스승님이 세상을 떠나시어, 묻고 참고할 곳이 없는 바가 길이 한이 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은 외롭지 않아 홀로 구마라집 스승님과 정신으로 계합하시고, 일을 알며 도가 자리한 곳을 목격하여 당신의 그 마음을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마라집 스승님의 현묘한 도풍을 진작시켜, 말세의 풍속을 계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안성후(安成侯) 요숭(姚嵩)으로부터 무위(無爲)의 가르침의 궁극을 묻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자못 열반무명(涅槃無名)의 내용과 서로 넘나듦이 있었습니다. 지금 문득 『열반무명론』을 지었습니다. 열 번을 펼치려다 아홉 번을 구부린 엉터리 글입니다. 그렇지만 널리 수많은 경전의 이치를 캐내어, 그 증거에 기탁하여 비유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으로서 폐하의 무명의 이루심을 우러러 진술하였습니다.
어찌 정신과 마음을 활짝 열고, 멀고도 마땅한 경지를 끝까지 다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애오라지 불문에 논의를 일으키고, 학도들에게 나눠주어 깨우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임금님의 뜻에 참고가 된다면 보존하여 기록해 주시기 원하옵니다. 만약 차질을 빚는다면 내리시는 뜻에 엎드려 따르겠습니다.’”

요흥의 회답한 요지는 정성스러웠다. 이에 찬양의 말을 갖추어 더하고는, 곧 칙명을 내려 베껴 쓰게 하고, 모든 자식과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가 당시에 중히 여겨진 바가 이와 같았다.
진(晋) 의희(義熙) 10년(414)에 장안에서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석
1 가장 뛰어난 사람은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그 다음은 가까이하고 기리며,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 그 다음은 업신여긴다. (『노자』 17장)
2 진시황 때 국란(國亂)을 피해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들어 숨은 네 사람의 은사(隱士)를 말함. 호(皓)는 희다는 뜻으로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이렇게 일컬음.
3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파야무지론(波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세 본과 궁(宮)본에는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으로 나와 있으므로 이에 따른다.
4 요장(姚萇)의 아들 요흥(姚興)이다. 서쪽으로 여륭의 군대를 깨뜨리고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요흥은 사문 승예(僧叡)ㆍ승조(僧肇) 등 8백 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구역경전을 재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여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았다. 요흥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어서,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5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이다.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불대선(佛大先) 대선사(大禪師)에게 수업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罽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계빈국으로 가서,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인물로 추천받아, 함께 중국에 왔다.
6 불야다라(弗若多羅) 삼장(三藏)이다.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에 정통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는 병에 걸려 갑작스레 세상을 하직하였다.
7 담마야사(曇摩耶舍)이다. 중국말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계빈국(罽賓國) 사람이다. 진(晋)나라 융안(隆安, 397~401) 연간 중에 처음으로 광주(廣州)에 이르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렀다. 담마야사는 「비바사율(毘婆沙律)」을 잘 외웠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부를 때에는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 불렀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長安)으로 갔다. 천축국의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사리불아비담론(舍利弗阿毘曇論)』을 번역하였다. 후진(後秦) 홍시(弘始) 9년(407)에 처음으로 범서(梵書)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16년(414)에 이르러 번역을 마쳤다. 모두 22권이다. 위태자(僞太子) 요홍(姚泓)이 이치와 의미에 친히 관여하고, 사문 도표(道標)가 그를 위해 서문을 썼다. 담마야사는 후에 남쪽 강릉(江陵)을 떠돌다, 신사(辛寺)에 머물러서 크게 선법(禪法)을 펼쳤다. 송나라 원가(元嘉, 424~452) 연간 중에 서역으로 돌아갔다. 임종한 곳을 알지 못한다.
8 『노자』 39장.
9 그러므로 도가 크나큰 어떤 것이라면 하늘땅이 크고 왕 또한 크다. 우리가 사는 지경 중에 네 가지 크나큰 어떤 것이 있는데, 왕이 그 중 하나로 머무른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절로 그러함을 본받는다. (『노자』 25장)

『고승전』 6권(ABC, K1074 v32, p.814c01-p.826c01)

고승전 제7권

2. 의해 ④

1) 축도생(竺道生)
도생의 본래 성은 위(魏)씨이다. 거록(鉅鹿) 사람으로 팽성(彭城)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이었다. 고을에서 선량한 사람이라 칭송했다.
도생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하고 명철함이 신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사문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마침내 속가를 벗어나 불법에 귀의하였다. 법태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수업하였다.
이미 법문(法門)을 밟게 되자, 영준한 사고가 기발하였다. 문구의 뜻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곧 스스로 슬기로운 이해력을 열었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의 나이에 곧 강좌에 올랐다. 토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말하는 것이 주옥과 같이 맑았다. 비록 오랜 덕망이 있는 학승이나 당세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서 감히 대항하여 응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다. 성품과 도량이 기민하고 삼가며, 정신과 기개가 맑고 꿋꿋하였다.
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자신이 일삼는 뜻을 구하였다.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써 슬기로운 이해력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잡론(雜論)을 참작하였다. 그러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라, 피곤함과 괴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 후 혜예(慧叡)ㆍ혜엄(慧嚴) 등과 함께 장안에 노닐었다. 구마라집을 따라 수업하니, 관중의 대중승려들이 모두 신과 같이 깨닫는다고 일컬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진(晋)의 공사황후(恭思皇后) 저씨(褚氏)가 세운 절이다. 본래 푸른 나무를 심은 곳이기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도생은 이미 당시의 불법의 장인이었으므로 초청되어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태조(太祖)와 문제(文帝)가 깊이 감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그 후 태조황제가 법회를 마련하여, 황제가 친히 대중과 함께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식사를 하사하고 한참이 지나자, 대중들은 모두 이러다가 해가 저물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이때 황제가 말하였다.
“비로소 일중(日中)이 되었다.”
도생이 말하였다.
“밝은 해가 하늘에 빛나고 천자의 말씀이 비로소 일중이라 하시니, 어찌 일중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발우(鉢盂)를 취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에 온 대중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며, 그가 황제의 속마음을 얻은 일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홍(王弘)ㆍ범태(范泰)ㆍ안연지(顔延之)도 모두 그의 덕스런 풍모를 공경하여, 그를 좇아 그에게 도를 물었다.

도생은 이미 사유에 잠긴 지 오래되어 언어 밖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다. 마침내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무릇 형상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형상은 잊는 것이다. 말로써 이치를 추구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번역하는 사람이 거듭 막히고, 막힌 문구만을 많은 사람이 지키니, 원만한 참뜻은 보기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말할 만하다.
이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고 사유하였다. 비로소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고, 몰록 깨우치면 성불한다는 설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제론(二諦論)』ㆍ『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ㆍ『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ㆍ『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ㆍ『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다.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게 깊은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 사이에는 혐오와 질투심이 많이 생겨나, 주거나 빼앗는 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또한 여섯 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생은 경의 이치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당시 『열반경』의 대본(大本)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학(舊學)들은 그의 말이 삿된 주장이라고 비난하며 분개함이 매우 심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빛을 바로하고 서원하였다.
“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컨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소서. 만약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師子座)에 앉게 하소서.”
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떠돌아다녔다.

처음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갔다. 열흘 사이에 배우는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 해 여름에 청원사의 불전에 우레가 진동하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서쪽 벽에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로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용이 이미 떠났으니, 도생도 반드시 떠날 것이다.”
갑자기 여산으로 자취를 옮겨 바위 산 깊숙이 그림자를 숨기니, 산중의 대중 승려들이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그 후 『열반경』의 대본이 남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과연 “천제(闡提: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서,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약속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도생은 이 경을 얻자 곧 이 경을 강설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1년(434) 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리고, 덕스런 음성은 빼어나게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함에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이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털이개[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얼굴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 책상에 기대어 돌아가셨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하였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이에 서울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병폐를 부끄러워하면서, 추모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신같이 내다보는 지극함이 상서롭게 증명됨이 이와 같았다. 이어 여산의 언덕에 묻었다.

과거 도생은 혜예(慧叡)ㆍ혜엄(慧嚴)ㆍ혜관(慧觀)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천진함이 나타나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고, 혜의(慧義)는 교만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구연(寇淵)은 조용히 지켰다.”
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을 만큼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빼어났다.
과거 관중(關中)에서 승조(僧肇)가 비로소 『유마경』을 주석하였다. 이때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음미하였다. 도생은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여러 경전의 의소(義疏)도 지었다.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삼았다.

왕징(王徵)은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비유하였다. 그를 위해 전기를 써서 그가 남긴 덕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도생이 추리한 ‘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근거가 있다고 여겼으며, ‘돈오(頓悟)하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등등의 주장도 역시 법의 문장으로 삼았다.
전송의 태조가 언젠가 도생의 돈오의 의미를 진술하였다.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만약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생)을 다시 일어나게 한다면, 어찌 여러분에게 굴복당하겠는가?”

∙보림(寶林)
그 후 용광사 사문 보림이 처음에는 장안을 거쳐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도생의 여러 논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윽함에 노니는 도생’이라는 유현생(遊玄生)으로 불렀다. 『열반기(涅槃記)』ㆍ『이종론(異宗論)』ㆍ「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다.

∙법보(法寶)ㆍ혜생(慧生)
보림의 제자인 법보도 역시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한 사람이다.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지어 역시 도생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근대에는 또 석혜생(釋慧生)이 역시 용광사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많은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초서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같은 절에서 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그들을 대소이생(大小二生:道生ㆍ慧生)이라 불렀다.

2) 석혜예(釋慧叡)
혜예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절조를 지키고, 엄하게 정진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사방을 떠돌며 배웠다. 어느 때 그는 촉(蜀)의 서쪽 경계를 지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서 양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때 나그네 장사꾼 가운데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이 사람은 사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초청하여 경전의 뜻을 물어보았다.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었으므로, 상인이 곧 그의 몸값을 주고 그를 풀어주었다.
돌아와서 다시 승복을 입었다. 배움에 도탑게 힘씀이 더욱 지극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마침내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이르렀다. 발음과 뜻의 훈고라든가, 여러 나라의 다른 뜻을 반드시 깨우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후 돌아와 여산에서 잠시 쉬었다. 갑자기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을 따라 자문을 받았다. 그 후 서울로 가서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모든 사유는 말의 테두리 밖까지 뛰어나고, 논리는 융통자재하게 들어맞았다.

전송(前宋)의 대장군(大將軍)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두 번 세 번 초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왕이 자신의 저택에서 계를 받고자 하였다. 혜예가 말하였다.
“예(禮)에서 갖추고 찾아와 배운다는 말은 들었으나, 찾아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곧 절에 들어가 경건하게 절하고 공손히 계법을 받들었다. 뒤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바쳤다. 승예가 입지 않고 늘상 깔고 앉았다. 왕은 몰래 측근에게 30만 냥을 지불하여 사도록 시켰다. 혜예는 말하였다.
“비록 내가 입지는 않더라도, 이미 대왕께서 보시한 것이라서 애오라지 편의에 따라 썼을 뿐이오.”

진군의 사령운(謝靈運)도 독실하게 불교 논리를 좋아하였다. 풍속이 다른 언어를 통달하여 잘 이해하였다. 곧 혜예에게 경전 가운데의 여러 문자와 아울러 많은 발음의 다른 뜻을 물어보았다. 이에 혜예는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지었다. 조목별로 범어와 중국어를 나열하여 밝게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문자들이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다.
혜예는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3) 석혜엄(釋慧嚴)
혜엄의 성은 범(范)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열두 살에 학생이 되어 시(詩)와 서(書)에 두루 밝았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다시 불교 논리를 상세히 연구하였다. 서른 살에 이르자 뭇 서적을 훤하게 모두 익혀, 소문과 명성이 사방 먼 곳까지 퍼졌다. 더욱이 다른 나라까지 교화로 흠뻑 적셨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소리와 뜻을 찾아 바로잡는 등 남달리 들은 바가 많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고조황제는 평소 그를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그 후 고조황제가 장안을 정벌하고자 하여 그와 함께 가기를 요구하였다. 혜엄이 말하였다.
“시주의 이번 행차가 비록 죄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빈도는 그 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간절히 요구하므로 마침내 함께 떠났다.

문제(文帝)가 자리에 오르자, 좋아하는 정이 더욱 진해져서 만날 때마다 크게 찬양하고 불법을 물었다.
이에 앞서 황제가 아직 그다지 불법을 숭상하여 믿지 않을 때인 원가(元嘉) 12년(435)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경윤(京尹) 소모지(蕭摹之)가 계문(啓文)을 올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제도를 주청하였다. 황제는 시중(侍中) 하상지(何尙之)와 이부랑중(吏部郞中) 양현보(羊玄保) 등과 이 일을 논의하면서 하상지에게 말하였다.

“짐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경전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요즘에 와서는 더욱 여가가 없어서 삼세(三世)의 인과(因果)에 관해서 아직 마음에 두어야 할지 어떨지 가려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감히 이 일에 대해서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다. 바로 경들이 이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대부분 불법을 공경하여 믿기 때문이다.
범태와 사령운(謝靈運)은 항상 말하였다.
‘6경(經)의 글은 본래 세속을 구제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 반드시 신령한 본성의 진실로 오묘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불경으로 나침반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안영지(顔迎之)의 『추달성론(推達性論)』과 종병(宗炳)의 『난백흑론(難白黑論)』을 보았다. 넓고 깊게 불법을 밝혀 더욱 이름난 이론이었다. 모두가 사람의 생각을 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만약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두 이 교화로 두텁게 할 수 있다면, 짐은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근간에 소모지가 청한 제도는 아직 완전히 경전에 통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곧 서로 살펴보아라. 경들에게 더함과 줄임을 맡기노라. 반드시 천박하고 경솔하며 음란한 일을 경계하고 막아서, 불법을 널리 펴는 데 손상됨이 없게 하라. 곧 마땅히 명령대로 이 일에 착수할지어다.”

이에 하상지가 대답하였다.
“한가한 무리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하여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 가리는 인물로서 홀로 어리석은 정성만을 지켜왔습니다. 모자라고 엷은 덕으로 불법의 큰 가르침에 오점을 남길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포상하여 떨치라는 지시를 받으니, 제가 감히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전(前) 시대의 뭇 영명한 인물들과 같았다면, 밝은 조서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간의 왕조 시대도 이미 먼 옛날이라 다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양자강을 건너온 이래로 왕도(王導)ㆍ주의(周顗)ㆍ유량(庾亮)ㆍ왕몽(王濛)ㆍ사상(謝尙)ㆍ극초(郄超)ㆍ왕탄(王坦)ㆍ왕공(王恭)ㆍ왕밀(王謐)ㆍ곽문(郭文)ㆍ사부(謝敷)ㆍ대규(戴逵)ㆍ허순(許詢) 및 죽은 고조황제의 형제인 왕원림(王元琳)ㆍ곤계인 범왕(范汪)과 손작(孫綽)ㆍ장현(張玄)ㆍ은의(殷顗)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혹은 재상으로서 권좌를 보필한 우두머리였고, 혹은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며, 혹은 뜻을 하늘과 사람 사이에 두었고, 혹은 안개와 노을 밖의 신선의 세계에 높이 자취를 두었습니다. 모두가 불법에 귀의하는 뜻을 품거나, 마음으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이 대비할 만한 인물로는 축법란, 우법개, 축법잠, 강승연, 지둔, 축법숭, 우도수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취가 부처님에 버금가서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근세의 도인과 속인들을 펼쳐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장 두루 오랑캐와 중국[夷夏]의 인물들을 모두 거론하라 하신다면, 멀리는 한(漢)ㆍ위(魏)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재(奇才)와 이덕(異德)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혜원(慧遠) 법사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석(釋)씨의 교화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도(道)를 향해 가는 것은 본래 교(敎)의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속세를 구제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임무이다.’
가만히 이 말뜻을 찾아보니 진리의 깊은 곳과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집집마다 계율을 지키게 한다면, 온 나라에 형벌이 종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도징(佛圖澄)이 조나라로 가자 두 석씨[石勒父子]의 사나움이 줄어들고, 신령한 탑에서 광명이 뻗치자 부건(符健)의 포악함이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도리로서 왕의 교화를 도운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모지가 아뢴 바도 모두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도인과 속인을 좀먹고 손상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행이 잘못된 비구와 비구니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과 모습은 분별하기 어려워서, 버리고 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금ㆍ동ㆍ토목공사가 비록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커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업을 기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갑자기 단숨에 단절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요즘 이리저리 짐작해 보느라,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편안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 친히 덕스런 말씀을 받드니, 참으로 깊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양현보(羊玄保)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 이야기는 하늘과 인간세계의 즈음을 오가는 것이라 어찌 제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진(秦)ㆍ초(楚)는 강병(强兵)의 술책을 논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는 다른 나라를 평정하여 자신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계책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장차 여기에서 취할 것은 없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불교는 전국(戰國)시대의 도구는 아니라서, 자못 경의 말과 같다.”

이에 하상지가 말하였다.
“무릇 숨어사는 도인을 예우하면 싸우는 병사는 태만해집니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군병의 사기가 쇠퇴합니다. 만약 손자ㆍ오자의 뜻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다른 나라를 삼키는 일이 있게 된다면, 또한 요순의 도에서는 취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오직 불교에서만 취할 것이 없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였다.
“불문에 경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마치 공자에게 자로(子路)가 있던 일과 같다. 이른바 ‘악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惡言不入於耳]’ 함이 이것이구나.”
황제는 이때부터 신심이 일어나 비로소 생각을 불경에 두었다. 그 후 혜엄ㆍ혜관 두 승려를 만나자 곧 도의 뜻을 논하였다.

당시 안연지(顔延之)는 『이식관(離識觀)』과 『논검(論檢)』을 지었다. 황제는 혜엄에게 명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가려내게 하여서, 하루 종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때 황제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의 오늘은 예전 지둔(支遁)과 허순(許詢)의 논쟁1)에 부끄럼이 없구나.”
혜엄은 그 후 『무생멸론(無生滅論)』 및 『노자약주(老子略注)』 등을 지었다. 당시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은 모든 것에 박식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혜엄에게 물었다.
“부처의 나라에서는 무슨 달력을 사용하는가?”

혜엄이 말하였다.
“천축국에서는 하지(夏至)날 방중(方中) 때가 되면 그림자가 없어진다. 이른바 천중(天中)이 이것이다. 오행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하고, 색은 황색을 숭상하며, 숫자로는 5를 숭상한다. 여덟 치가 한 자에 해당하고, 열 냥은 이 땅의 열두 냥에 해당한다. 월건(月建)이 진월(辰月)이 되는 달(음력 3월)을 세워서 한 해의 첫 달로 삼는다.”
춘분ㆍ하지ㆍ추분ㆍ동지를 찾아 파헤쳤다. 달의 엷어짐과 월식을 미루어 살피는 데 이르기까지, 빛과 그림자의 옮겨감을 헤아리는 법이 매우 자세하였다. 또한 별자리로 해마다의 연기(年紀)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모두 조목마다 예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승천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 후 바리국(婆利國)의 사람이 중국에 왔다. 과연 혜엄의 말과 같았다. 황제는 임예(任豫)에게 명령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대열반경』이 처음 송나라 땅에 도착하였을 때 글과 말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품목의 수가 빠지고 간략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웠다.
이에 혜엄은 혜관ㆍ사령운 등과 함께 『니원경』 원본에 근거하여 품목을 추가하였다. 글도 원본의 바탕보다 지나친 것은 고쳐 바로잡으니, 비로소 몇 개의 판본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혜엄은 곧 꿈에 형상이 극히 우람한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성난 목소리로 혜엄에게 말하였다.
“존귀한 『열반경(涅槃經)』에 무엇 때문에 경솔하게 그대의 짐작을 가하였는가?”
혜엄은 꿈을 깬 뒤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앞서 출간한 책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당시 알 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는 아마도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고 격려하고자 할 따름일 것이오. 만약 반드시 응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책이 나온 즉시로 꿈에 나타났겠소?”
혜엄도 그렇게 여겼다. 얼마 후 다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그대가 경전을 널리 펴낸 힘으로 인해 반드시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혜엄은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동안사(東安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1세이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전하였다.
“혜엄 법사는 그릇이 크고 학식이 깊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종사이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고 슬프구나. 돈 5만 냥과 베 50필을 공급하라.”

∙법지(法智)
법지는 혜엄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이해력이 있었다. 스물네 살 때 강릉에 갔다가, 법아(法雅)의 강론을 들었다. 곧 몇 차례 논의를 거듭하니, 법아가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었다. 법아는 사부대중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이 젊은 사람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룰 사람이다.”
법지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그의 명성은 초(楚)와 영(郢) 지방에 퍼지고, 칭송의 소리는 서울과 오나라를 적셨다. 그는 『성실론(成實論)』과 『대품경(大品經)』ㆍ『소품경』에 빼어났다.

4) 석혜관(釋慧觀)
혜관의 성은 최(崔)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박식한 견해로 이름을 날렸다. 스무 살에 출가하여 사방을 떠돌면서 수업하였다. 만년에는 여산으로 가서, 다시 혜원(慧遠)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남쪽에서 북방으로 가서, 새 경과 옛 경의 같고 다른 점을 찾아 그 차이를 상세히 가려냈다. 그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청아하며,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정취를 통하기로는 도생(道生)과 도융(道融)이 가장 으뜸이며, 힐난을 정밀하게 하기로는 혜관과 승조(僧肇)가 제일이다.”
이어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짓고, 구마라집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선남자야, 그대가 논한 내용은 매우 통쾌하다. 그대가 조금 물러나 있으면 곧 남쪽 양자강와 한 수 사이로 노닐 것이다. 잘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힘쓰도록 하라.”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곧 남쪽 형주(荊州)로 갔다. 고을의 장군인 사마휴지(司馬休之)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그곳에 고리사(高悝寺)란 절을 세웠다. 무릇 형(荊)과 초(楚)의 백성들로 하여금, 삿됨을 돌이켜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십 중 다섯이나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남방의 사마휴지를 정벌하면서 강릉에 이르자, 혜관과 서로 만났다. 무제가 마음을 기울여 대접하기를 이전과 다름없이 하니 마치 친구와 같았다. 이어 칙명으로 서중랑(西中郞)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 사람이 곧 훗날의 문제(文帝)이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혜관은 이미 미묘하게 불교 논리에 빼어나고, 다시 『노자』와 『장자』를 탐구하였다. 또한 『십송률(十誦律)』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여러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캐내었다. 그런 까닭에 법을 찾고 도를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루도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원가(元嘉) 3년(426)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巳日)에 황제의 수레가 곡수의 연회[曲水宴: 3월 3일에 베푸는 잔치]에 임하였다. 혜관과 조정의 선비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혜관이 곧 앉은 자리에서 먼저 지어 바쳤다. 글 뜻이 맑고 은근하며 사리가 당시의 사정과 일치하였다. 이때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ㆍ여강(廬江)의 하상지도 모두 맑고 우아한 말로 기쁨을 이루어, 티끌세상 밖의 감상을 나누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및 「십유서찬(十喩序贊)」과 여러 경전의 서문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승복(僧馥)
당시 도량사의 승복은 본래 풍천(灃泉) 사람이다. 오로지 교리 이해[義學]에 정진하여 『승만경(勝鬘經)』에 주석을 달았다.

∙법업(法業)
또 법업도 본래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품경』ㆍ『소품경』과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몸을 절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릉공주(晋陵公主)가 그를 위하여 남림사(南林寺)를 지었다. 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5) 석혜의(釋慧義)
혜의의 성은 양(梁)씨며 북쪽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격조 있는 풍모가 빼어나게 드러나고, 뜻한 바 일에서 굳세고 올곧았다. 처음 팽성(彭城)과 송나라 사이에서 유학하고, 두루 경전의 논리에 뛰어났다. 그 후 경사로 나와서 곧 말하였다.
“기주(冀州)에 법칭도인(法稱道人)이 있었다. 임종 때 제자인 보엄(普嚴)에게 전하기를, ‘숭고산의 영험한 신이 말하기를 강동에 유장군(劉將軍)이 있다. 아마도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될 것이다. 나는 서른두 개의 큰 보석과 병 하나를 가득 메운 금으로 신표를 삼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송왕(宋王)에게 알려지자 송왕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비상한 상서로움 역시 비상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법사가 스스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보물을 얻을 길이 없을 것이다.”

혜의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월에 숭고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극한 마음으로 향을 사르고 도를 행하였다. 7일째 되는 날 밤, 꿈에 수염이 긴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혜의를 데리고 보배구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바위 밑이다.”
혜의가 다음날 곧 산중을 두루 다니다가 한 곳을 보니, 환하게 꿈에서 본 곳과 같았다. 산신령 사당의 돌 제단 아래에서 과연 크고 작은 구슬 서른두 개와 황금 한 병을 얻었다. 이 상서로움은 『송사(宋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후 혜의는 서울로 돌아왔다. 송의 무제(武帝)는 접대에 존중을 더욱 더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우가 더욱 깊어졌다.

송의 영초(永初) 원년(420) 거기장군(車騎將軍) 범태(范泰)가 기원사(祇洹寺)를 세우고자 하였다. 혜의의 덕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종사가 될 만하다 여겼다. 절 공사를 시작해주기를 굳게 요청하였다. 혜의는 범태의 맑은 믿음이 지극하다 하여, 의궤와 규칙을 지시하여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혜의를 사리불(舍利弗)에 비교하고, 범태를 수달(須達)장자에 비유하였다. 그런 까닭에 기원사라는 호칭이 그 일컬음에 잘 어울렸다.
그 후 서역의 많은 명승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혹 경전을 번역하거나, 혹 선법(禪法)을 가르쳐 전수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서선지(徐羨之)ㆍ단도제(檀道濟) 등이 조정의 정치에 전권을 행사하였다. 범태는 불평하는 기색을 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을 마음껏 하여 이들을 꾸짖으니, 서선지 등이 깊은 유감을 품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범태가 추측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고 모두들 근심하였다. 범태도 역시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다. 곧 자기 몸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혜의에게 물었다. 혜의가 대답하였다.
“충성과 순종을 잃지 않음으로써 그 윗사람을 섬기는 까닭에, 위아래가 서로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니, 무슨 근심할 만한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어 범태에게 권유하여 과죽원(果竹園) 60무(畝)를 절에 시주하여,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을 받으라 하였다. 범태가 이에 따랐으므로 끝까지 그의 복을 누렸다.

범태가 죽자 셋째 아들 범안(范晏)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저의 아버님이 위험함을 틈타 설득하여, 과죽원의 땅을 요구한 일은 두고두고 유감스럽습니다.”
마침내 이 땅을 빼앗고 주지 않았다. 혜의는 범태의 유소(遺疏)를 증거로 삼아 분규를 일으켜 시끄러워지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났다.
이에 혜의는 마침내 자리를 옮겨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혜예(慧叡)와 함께 머물렀다.
전송의 원가 21년(444) 오의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그 후 범안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범안의 아우 범엽(范曄)은 공희선(孔熙先)의 역적 모의에 가담해 그 일족이 함께 괴멸되었다.

∙석승예(釋僧叡)
그 후 기원사에 석승예가 있었다. 삼론(三論)에 빼어나 송 문제(文帝)의 존중을 받았다.

6) 석도연(釋道淵)
도연의 성은 구(寇)씨며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출가하여 서울의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계율을 지키고 오랫동안 교학을 익혀,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빛을 숨기고 덕을 숨겨, 세상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동안사에서 개강하였다. 그윽하고 미묘한 논리를 해부 분석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진리를 모두 훤하게 밝혔다. 예전부터 적체되어 온 문제점들을 빛나게 얼음 녹듯 풀이하였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그를 다시 보고, 성대하게 그의 덕에 의지하였다.
그 후 팽성사(彭城寺)로 자리를 옮겨 머물렀다. 전송의 문제(文帝)는 도연의 행실이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된다 하여, 칙명을 내려 절의 주지로 머물렀다.
그 후 주지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8세이다.

∙혜림(慧琳)
도연의 제자인 혜림은 성이 유(劉)씨며, 진군(秦郡) 사람이다. 여러 경전과 『노자』와 『장자』에 빼어나고, 해학과 농담을 좋아하였다. 글을 짓는데 뛰어나기 때문에 열 권의 문집을 지었다.
그러나 성품이 오만하고 방종하여 자못 스스로의 자긍심으로 남을 얕보았다. 어느 날 도연이 부량(傅亮)을 찾아갔다. 혜림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연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도연이 얼굴빛에 노함을 나타내었다. 부량이 마침내 그 벌로 혜림에게 곤장 20대를 때렸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도 자못 혜림을 존중하여 불러들여 만나곤 하였다. 그때마다 항상 홀로 앉는 걸상에 올라앉았다. 안연지(顔延之)가 늘 이를 비난하니, 황제도 곧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백흑론(白黑論)』을 지었지만, 불교의 도리에 어긋났다. 형양태수(衡陽太守) 하승천(何承天)이 혜림과 가까이 친교를 맺어 평소 서로를 격양시켰다. 그는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막히고 치우쳐 불교를 꾸짖고 나무랐다. 안연지와 종병(宗炳)이 이 두 논설을 따져 반박하기를, 각기 만여 글자로 하였다.
혜림은 이미 스스로 그의 법을 허물었기에, 교주(交州)로 배척당하여 유배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도연이 마성(麻星)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7) 석승필(釋僧弼)
승필은 본래 오(郡)나라 사람이다. 텅 비운 성품과 간결한 도량에다,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어려서 용광사의 담간(曇幹)과 함께 장안에 노닐어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날을 아끼고 힘을 아껴 자못 깊은 생각이 있었다. 구마라집의 칭찬이 더해져서 그를 경전의 번역에 참여시켰다.
그 후 이름난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풍속과 교화를 두루 구경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승필에게 절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승필이 그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至道]를 널리 펴지 않으면, 순박한 기풍이 날로 멀어집니다. 스스로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구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도풍을 세워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땅히 인연 따라 이익을 가져와야 하거늘, 어찌 홀로 한 절만을 좋게 할 수 있습니까?”
그 후 남쪽 초(楚)나라 영읍(郢邑)에 자리잡았다. 10여 년 동안 경전과 계율을 가르치고 권유하여, 크게 강남 지방을 교화하였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멀리서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였다. 사람을 보내어 공경하는 마음을 전하여, 보내오는 보시가 줄을 이었다.
그 후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에 머물렀다. 문제(文帝)가 그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늘 초청해서 강설하게 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9년(44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8세이다.

8)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왕(王)씨며 동아(東阿) 사람이다. 어렸을 때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주(徐州)와 연주(袞州)를 유력하였다. 얼굴은 매우 검으나, 빼어난 식견이 맑고 멀리까지 미쳤다.
당시 낙양 안의 도경(道經)도 슬기로운 이해력이 당세(當世)에 높아, 혜정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귀가 매우 크고 길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낙수에는 귀가 크고 긴 인물이 있고, 동아에는 먹처럼 검은 얼굴의 인물이 있다네. 묻는 말에 응수 못하는 것이 없고, 응수하면 막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혜정은 지극하게 성품이 허통하고 맑으며, 소상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었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나라 안의 학문을 일삼는 이들이 반드시 모여들지 않음이 없었다.
『법화경』과 『소품경』을 외우고, 『유마경(維摩經)』과 『사익경(思益經)』에 주석을 달았다. 『열반약기(涅槃略記)』ㆍ『대품지귀(大品旨歸)』ㆍ『달명론(達命論)』을 지었다. 아울러 여러 법사들의 뇌문(誄文:弔文)을 지어 대부분 북쪽 땅에 유전되었다. 그러나 양자강을 넘어 전해진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9) 석승포(釋僧苞)
승포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관중(關中)의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송의 영초 연간(420~422)에 북서(北徐) 지방을 유행하였다. 황산정사(黃山精舍)에 들어가 다시 정(靜)ㆍ정(定) 두 스승을 찾아가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어 그곳에서 21일간의 보현재참(普賢齋懺)을 행하였다. 7일째 되던 날 흰 고니들이 날아와, 보현보살의 자리 앞에 모여들었다. 중간에 이르러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치자 고니들이 떠났다. 21일째 되던 날 해가 저물 무렵에, 또 노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탑을 몇 바퀴 돌더니 문득 사라졌다.
승포는 어려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더욱이 상서로운 일까지 감응한 까닭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더욱 굳세졌다. 날마다 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우고, 항상 수백 배씩 절을 올렸다.

그 후 동쪽 서울로 내려갔다. 때마침 기원사(祇洹寺)에서 강론을 여는 시기를 만났다. 법도들이 운집하고 선비와 서민들이 강석으로 달려왔다. 승포는 처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이라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서 강론을 보았다. 의복은 더럽고 해어지며, 용모는 바람과 먼지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법당 안은 이미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의 안장에 앉아 문 밖에서 강론을 들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가 강론을 끝내자, 승포가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하려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객승의 이름은 무엇인가?”
“포(苞)라 하오이다.”
“무엇을 모두 꾸러미에 쌌는가[苞]?”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도 꾸러미에 쌀 수 있소이다.”
이어 몇 차례 다른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앞서 다다른 뛰어난 이의 생각과 힘인지라, 법사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는 그의 말에 대항할 길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났다.

당시 왕홍(王弘)과 범태(范泰)가 승포가 논의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재치 있는 생각에 감탄하여 더불어 말을 나누기를 청하였다. 이에 기원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의 강론을 열고, 불법의 교화를 이어나갔다.
이에 진군(陳郡)의 사령운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승포를 만났다. 그의 정신과 기개를 보고 더욱 깊이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포에게 물었다.
“사령운은 어떤 사람인가?”
“사령운은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식견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몸에 닥치는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승포는 길을 가다가 여섯 명의 도적들이 관리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 승포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를 권유하였다. 여러 도적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하자, 간절히 염불하고 또 염불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송치하던 관리가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도적들은 족쇄를 풀고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법화(法和)
당시 와관사(瓦官寺)의 법화도 논리를 따지는데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 시대에 명성을 이루어, 전송 고조(高祖)황제의 존중을 받아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10) 석승전(釋僧詮)
승전의 성은 장(張)씨며 요서(遼西) 해양(海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연(燕)ㆍ제(齊) 지방에 떠돌면서 두루 불전 이외의 경전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비로소 출가하였다. 다시 삼장을 정밀하게 닦아, 북쪽 땅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그 후 양자강을 넘어 서울에 머물렀다. 자리를 깔고 크게 강론을 펴니 교화가 강남 땅을 적셨다.
오군(吳郡)의 장공(張恭)이 오군으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고소(姑蘇) 일대의 선비들은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처음 한거사(閑居寺)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호구산(虎丘山)에서 쉬었다. 이에 앞서 승전은 황룡국(黃龍國)에서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오군으로 들어가자 다시 금불상을 조성하여, 호구산의 동사(東寺)에 안치하였다.
승전은 성품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도왔다. 맑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서, 거처하는 곳에 비단이나 돈이 없었다.
그 후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여항(餘杭)에 방현사(方顯寺)를 세웠다. 승전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대중을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좌선과 예불을 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보살피느라 지나치게 애쓰다 보니, 급기야는 앞을 못 보았다. 그러나 더욱 정성을 다해 책려하고,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ㆍ장부(張敷)와 초국(譙國)의 대옹(戴顒)ㆍ대발(戴勃)도 모두 덕을 사모하였다. 사귐을 맺고 숭배하여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그 후 승전은 잠시 임안현(臨安縣)으로 떠돌다가 동공조(董功曺)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는 청신한 불제자였다. 승전이 그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에 걸려 몹시 위독하였다. 항상 그가 조성한 불상이 와서 서쪽 벽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모두 와서 간병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법랑(法朗)은 꿈에 몇 사람이 받드는 어떤 높은 대(臺)를 보고 물었다.
“어디로 떠나십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승전 법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오.”
이튿날 아침 과연 승전이 세상을 떠났다. 현령(縣令) 완상지(阮尙之)가 백토산(白土山)에 있는 곽문거(郭文擧) 묘지의 바른 편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양홍(梁鴻)을 요리(要離)의 묘 옆에 부장(附葬)한 고사를 본받은 것이다.
특진관(特進官) 왕유(王裕)와 덕이 높은 선비 대옹이 승전의 묘소에 이르렀다.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당사현(唐思賢)이 비문을 지었으며, 장부가 조문을 지었다.

11) 석담감(釋曇鑒)
담감의 성은 조(趙)씨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축도조(竺道祖)를 스승으로 섬겼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율행에 간절한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배워 연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빼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그를 따라 배웠다. 구마라집은 항상 말하였다.
“담감은 한 번 들으면, 들은 것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 후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두루 교화를 베풀었다. 형주(荊州)에서 강릉에 도달하여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나이가 60에 들어서자, 힘껏 수행하기를 더욱 맑게 하였다. 항상 안양(安養)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여 아미타불을 우러러보았다.

그 후 제자인 승제(僧濟)가 그의 곁을 떠나 상명사(上明寺)로 가자, 담감이 말하였다.
“네가 떠나는 일이야 아름답기는 하다만, 아마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야.”
그러고는 간곡하게 조목조목 들어 법을 부촉하였다. 밤이 되자 모든 연로한 승려들과 함께 무상(無常)을 서술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감은 홀로 낭하(廊下)를 서성거렸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사미인 승원(僧願)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담감이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 자거라. 다시 오지 말아라.”
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제자인 혜엄(慧嚴)이 평상시처럼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담감이 합장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사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신체는 부드럽고, 깨끗한 향기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이를 알리고 시신을 염하였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전기(傳記)와 찬을 지었다. 그는 찬한다.

여지(荔枝) 풀 향기 뿜듯
근옥(瑾玉) 구슬 맑게 드러나듯
심오하신 님이여,
물들지도 물들이지도 않네.

어려선 찬란한 빛이
늙어선 가지마다 울창함이
신의 세계 노닌다고
어찌 참된 헤어짐일까.

도해(道海)ㆍ혜감(慧龕)ㆍ혜공(慧恭)ㆍ담홍(曇泓)ㆍ도광(道廣)ㆍ도광(道光)
당시 강릉의 도해ㆍ북주(北州)의 혜감ㆍ동주(東州)의 혜공ㆍ회남(淮南)의 담홍ㆍ동원산(東轅山)의 도광ㆍ홍농(弘農)의 도광 등이 있었다. 모두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간절한 정성을 기울여 배움이 경전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아울러 설법을 잘하였다. 또한 오로지 계율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40여 만 글자의 경전을 암송하였다. 여산(廬山)의 능운사(陵雲寺)에 머물렀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따랐다.
항상 지팡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승려가 보시한 지팡이다.”
지팡이의 빛과 색깔은 현란하였다. 또한 자못 향기도 감돌았다. 지팡이 위쪽에 범어로 된 글[梵書]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글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관중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찾아뵈었다. 쥐던 지팡이도 스스로 그를 따라왔다. 구마라집이 그 지팡이를 보고 놀랐다.
“이 지팡이가 여기에 있었나?”
이어 그 범어 글자를 번역하였다.
“본래 천축국의 사라림(娑羅林)에서 태어났다. 남방이 어지러워지면 초야에 의지하여 일어나리라. 후에 구마라집을 만나면 도의 가르침이 융성해질 것이다.”
혜안은 그 후 지팡이를 외국 승려 바사나(波沙那)에게 선물하였다. 바사나는 이것을 가지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혜안은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산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13) 석담무성(釋曇無成)
담무성의 성은 마(馬)씨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집안 어느 대[家世]인가에 피난하여 황룡(黃龍)으로 옮겨 살았다.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실천하는 업이 맑고 바르며, 빼어난 영특함에 짝이 없었다.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곧 문답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구마라집을 만나니, 구마라집이 물었다.
“사미가 어떻게 먼 곳에서 올 수 있었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도를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구마라집이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길 떠나길 멈추고 배움에 힘쓰니, 지혜와 학업이 더욱 깊어졌다. 요흥(姚興)이 담무성에게 말하였다.
“마계장(馬季長)은 고명한 석학이었으나, 당시 세상에서 교만하였네. 법사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가 대답하였다.
“도로써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흥은 그를 매우 남다르게 생각하여 공급하는 것이 크게 두터웠다. 요흥의 운수가 장차 기울려 하자, 관중은 위태하고 어지러워졌다. 담무성은 곧 회남(淮南)의 중사(中寺)에서 휴식하면서, 『열반경』과 『대품경』을 항상 바꾸어가며 강설하였다. 그러자 수업하는 사람이 2백여 명이었다.
안연지(顔延之)ㆍ하상지(何尙之)와 함께 실상을 논하면서 새벽까지 토론을 계속하였다. 담무성은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4세이다.

∙담경(曇冏)
당시 중사에는 또한 담경이 있었다. 담무성과 동학(同學)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여, 전송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의경(義慶)의 존중하는 인물이 되었다.

14) 석승함(釋僧含)
승함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와 천문과 산수에 뜻을 두텁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불교 논리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밝았다. 더욱이 『대열반경』에 빼어나 항상 강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원가(元嘉) 7년(430) 신흥태수(新興太守) 도중조(陶仲祖)가 영미사(靈味寺)를 세웠다. 승함의 도풍과 규범을 흠모하였다. 그를 초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승함은 대중을 도우며 맑고 삼가하여, 3업(業)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후 서쪽 역양(歷陽)에 떠돌며 불법을 널리 알렸다. 그러자 강남의 도인과 속인들이 소문을 듣고는, 따르는 사람들이 숲을 이루었다.
당시 임성(任城)의 팽승(彭承)이 『무삼세론(無三世論)』을 지었다. 이에 승함은 곧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지어 대항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치고, 곧 땅에 떨어지려 하는 불법을 다시 일으켰노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또 『성지원감론(聖智圓鑑論)』과 『무생론(無生論)』ㆍ『법신론(法身論)』ㆍ『업보론(業報論)』 및 『법화종론(法花宗論)』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얼마 후 남쪽 구강(九江)에 노닐면서 크게 경법을 떨쳤다.
낭야의 안준(顔峻)이 당시 남중랑(南中郞)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따라서 심양(潯陽)에 주둔하였다. 승함과 서로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만나면 반드시 종일토록 지냈다.
어느 날 승함은 가만히 안준에게 말하였다.
“만약 예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서울에 곧 재앙과 난리가 있을 것이오. 진인(眞人)의 부신[符]은 응당히 전하에게 속해 있으니, 시주께서는 이 일에 입을 다물어야 하오.”
그런데 갑자기 원흉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세조(世祖)가 황제가 되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 후 평안하고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문득 대중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알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명(天命)을 아는 이라 하였다.

∙석도함(釋道含)
당시 석도함도 학문과 깨우침에 공부가 있어 『석이십론(釋異十論)』을 지었다.

15) 석승철(釋僧徹)
승철의 성은 왕(王)씨며, 본래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제 두 사람이 양양에서 임시로 살았다. 승철은 열여섯 살에 여산으로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그를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여 물었다.
“차라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번뇌를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일은 원래 저의 본심입니다. 먹줄을 놓는다거나 쇠를 달구는 일에서는 종장의 뜻대로 하소서.”
혜원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에 입문한다면, 곧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는 법문을 얻을 것이다.”
이에 관에 꽂는 비녀를 벗어버렸다.

몸을 맡겨 혜원을 따라 수업하여,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웠다. 더욱이 『반야경』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또한 그는 도를 묻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마음을 문장과 시를 짓는 일에 두었다. 한 편의 문장이나 한 수의 시를 짓는데, 바로 붓을 대자마자 문장을 완성하였다[落筆成章].
어느 날 여산의 남쪽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모여들고, 뭇 새들이 이에 화답하며 울었다. 이처럼 그에게는 세속을 벗어난 빼어난 기운이 있었다. 물러나 절에 돌아와서 혜원에게 물었다.
“율법에는 음악을 규제하고, 계율에는 노래와 춤을 끊으라 하였습니다. 노래를 한 번 부르고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은 해도 괜찮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산란해지는 점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위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곧 중지하였다.

스물네 살이 되자 혜원은 그에게 『소품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당시 같은 동년배들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 오르자 글 뜻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그의 칼날 같은 기세를 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혜원이 그에게 말하였다.
“전에 너와 겨루며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남은 힘이 없어졌다. 너의 방어벽은 엄중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던 사람들이 군병을 잃고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못 쉬운 일은 아니다.”
이로써 문인들이 그를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혜원이 죽은 뒤에는 남쪽 형주로 떠돌다, 강릉성 안의 오층사(五層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비파사(琵琶寺)로 자리를 옮겼다.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의동(儀同) 소사화(蕭思話) 등도 모두 그에게서 계법을 받기 위해, 그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몸소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전송의 원가 29년(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자사(刺史)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이 그를 위하여 분묘를 조성하였다.

∙승장(僧莊)
당시 형주의 상명사에 있는 승장도 『열반경』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전송의 효무황제 초기에 칙명으로 서울에 내려오라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6) 석담제(釋曇諦)
담제의 성은 강(康)씨이다. 선조들은 강거(康居) 사람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자리를 옮겨 중국에 가까이하였다. 헌제(獻帝) 말기의 난리로 인해 오흥(吳興)에 머물렀다. 담제의 아버지 강융(康肜)은 일찍이 기주(冀州)의 별가(別駕: 벼슬이름)가 되었다.
담제의 어머니 황(黃)씨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하나의 털이개와 철루(鐵鏤: 무쇠에 조각한 것)로 된 서진(書鎭: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털이개 등을 그에게 보여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선물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나, 깨달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다.
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䂮) 도인을 만났다. 문득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동자가 어떻게 이 늙은이의 이름을 부르시나?”
담제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불쑥 부른 것은, 그대가 전에 이 담제의 사미였기 때문입니다. 대중 승려를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승략은 전에 홍각(弘覺) 법사의 제자로서, 승려들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날 때의 시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털이개와 서진 등을 보여주니, 승략이 이에 깨닫고 울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 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萇)을 위하여 『법화경』을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요장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홍각 법사께서 돌아가신 날을 계산해보니, 바로 이 물건을 맡기신 날이었습니다. 다시 나물 캐던 일까지 기억이 나니, 더욱 슬픔이 북받칩니다.”

그 후 담제는 경전을 두루 편람하면서, 눈에 지나가는 것은 곧 기억하였다.
만년에는 오군(吳郡)의 호구사(虎丘寺)로 들어갔다. 『예기(禮記)』와 『주역(周易)』ㆍ『춘추(春秋)』를 각기 일곱 번씩 강의하였다. 『법화경』ㆍ『대품경』ㆍ『유마경』을 각기 열다섯 번씩 강의하였다. 또한 글을 잘 지어, 여섯 권의 문집이 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성품이 숲과 개울을 사랑하여, 후에 오흥(吳興)으로 돌아갔다. 고장(故章)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시며 한가롭게 살았다.
전송 원가 연간(424~452)의 말기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7) 석승도(釋僧導)
승도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열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업하였다. 스승이 『관세음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다 읽고는,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 경은 모두 몇 권이 있습니까?”
스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말하였다.
“오직 이 한 권뿐이다.”
승도가 말하였다.
“처음에 ‘그때 다 하지 못한 뜻’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상응하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크게 기뻐하여 『법화경』 한 부를 주었다. 이에 밤낮으로 그것을 보고, 뜻을 찾아 거칠게나마 의미를 해득하였다. 가난하여 기름과 촛불이 없었으므로, 항상 땔감을 주워서 책을 비춰보곤 하였다[採薪自照].

열여덟 살이 되자 다방면에 읽은 것이 더욱 많아졌다. 원기의 바탕이 씩씩하고 용감하며, 영묘한 작용이 빼어나게 드러났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고상하며, 거동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승예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이 되고자 원하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법사가 되어 도강(都講)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에 승예가 말하였다.
“그대는 바야흐로 곧 만인의 불법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다. 어찌 자잘한 승려들을 상대로 하여 부양시키는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구족계를 받음에 이르러 식견이 더욱 깊어져서, 선(禪)ㆍ율ㆍ경론이 저절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만큼 통달하였다.
요흥(姚興)이 그의 덕업을 흠모하여 벗으로서 사랑하였다. 절에 들어오면 찾아가서, 가마를 타고 함께 궁전으로 돌아갔다. 구마라집이 경론을 번역해 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도 함께 하여, 참조하고 의논하며 자세하게 내용을 바로잡았다.
승도는 이미 본래부터 풍채가 좋은데다 관중(關中)의 성대한 모임을 만났다. 이에 많은 경전을 계획하고, 널리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캐내었다. 곧 『성실(成實)』과 삼론(三論)의 의소(義疏)와 『공유이제론(空有二諦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전송의 고조(高祖) 황제가 서쪽 장안을 토벌하였다. 군주 노릇하던 자[僞主]를 사로잡아 관내(關內)를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였다. 그는 이미 평소 자자하게 승도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곧 요청하여 상견하더니, 승도에게 말하였다.
“서로 멀리서 바라본 지 오래인데, 어쩌면 그리도 풍속이 다른 곳에서 지체하였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명공께서 천하를 소탕하여 말발굽소리가 황하와 낙수에 울렸습니다. 이때에 서로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조황제가 깃발을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계양공(桂陽公) 의진(義眞)을 그곳에 남겨두어, 관중 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헤어질 때 고조가 승도에게 부탁하였다.
“나이 어린 것을 이곳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다. 원컨대 법사가 때때로 돌아보고 마음에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 후 의진은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에게 핍박당하였다. 관남(關南)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어지럽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추한 오랑캐들이 흉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기병이 곧 그의 몸 가까이 당도하였다. 승도는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오랑캐들을 가로막았다. 의진을 추격하는 기병들에게 말하였다.
“유공(劉公)이 아들을 부탁한 일이 있소. 빈도는 지금 곧 죽음으로써 그를 전송하려 하오. 반드시 잡지도 못할 것이니, 번거롭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뭇 오랑캐들은 그의 신비한 기운에 놀라, 마침내 칼날을 되돌려 돌아갔다.

의진은 달아나 풀밭에 숨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중병(中兵) 단굉(段宏)을 만나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릇 승도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조황제는 이 일에 감격하여, 아들과 조카 내외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그 후 수춘(壽春)에 절을 세웠다. 곧 동산사(東山寺)가 그곳이다. 항상 경론을 강설할 때마다 수업하는 문도들이 천여 명이었다. 그 당시 오랑캐들이 갑자기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니 사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투신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향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생각을 돌이키어 조서에 응하여 서울의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황제의 가마가 이곳을 찾아오자, 몸소 나가서 영접하고 안부를 물었다.
승도는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3강(綱)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일에 감격하고 가슴에 품어,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도 역시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곧 와관사에 칙명을 내려 『유마경』의 강론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가 친히 그곳으로 거동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다 모여들었다.

승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왕궁에 탄생하시고 쌍수(雙樹)에서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그때의 순후한 근원은 영원히 떠나갔어도, 경박한 풍속은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급고독원은 폐허가 되고, 녹야원은 허물어진 풀밭이 되었습니다.
아흔 다섯 종류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들은 아래로 나아가는 길을 높은 곳으로 오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삼계의 중생들은 불이 난 집을 청정한 불국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주상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보살들이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부대중들이 이 일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다시 황제에게 말하였다.
“법을 보호하는 일과 도를 널리 펴는 일을 제왕보다 더 앞서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네 가지 평등심(平等心)을 움직이시어, 위태로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고 착한 일을 권유하실 수 있다면, 모래밭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이 세계가 곧 자재천궁(自在天宮)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그 후 하직하여 수춘으로 돌아와 석간사(石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96세이다.

∙승인(僧因)
당시 승인도 당시 세상에 이름난 이로 승도와 버금갔다. 어떤 사람이 승인에게 물었다.
“법사와 승도 가운데서 누가 더 훌륭한가?”
그는 대답하였다.
“나와 승도는 같이 구마라집에게 사사받았습니다. 공자의 문인에 기준해서 말한다면, 승도는 입실(入室) 제자에 해당하고 나는 승당(升堂) 제자라 할 만합니다.”

∙승위(僧威)ㆍ승음(僧音)
승도의 제자에 승위와 승음 등이 있었다. 모두 『성실론(成實論)』에 빼어났다.

18) 석도왕(釋道汪)
도왕의 성은 반(潘)씨며 장락(長樂) 사람이다. 어릴 때 숙부를 따라 서울에 있었다. 열세 살에 여산의 혜원(慧遠)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경전과 계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거친 음식으로 일관하였다.
한번은 양주(梁州)로 갔다. 길에서 강(羌)족 오랑캐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의복과 발우를 빼앗겼다. 도왕(道汪)과 제자 몇 사람이 마음으로 서원하며,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잠시 후 구름과 안개 같은 것이 도왕 등의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이에 도적 무리들이 쫓아오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재난을 면하였다.
그 후 하간(河間)의 현고(玄高) 법사가 선(禪)과 지혜가 깊고 넓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곳에 가서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토곡혼(吐谷渾)의 난을 만나, 그곳에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부른 적이 있는 학덕이 높은 선비[徵士] 비문연(費文淵)이 처음으로 그를 따라 수업하였다. 곧 고을 성의 서북쪽에 절을 세워 기원사(祇洹寺)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파촉(巴蜀) 지방에 교화를 행하여 명성이 조정과 재야를 적셨다.
양주(梁州)자사 신탄(申坦)은 도왕과 구면이었다. 그 후 신탄이 사고를 당하자, 도왕은 그곳에 가서 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신탄이 그곳에 도왕을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문연이 자사(刺史) 장열(張悅)에게 글을 올렸다.
“도왕 법사는 학식과 수행이 청백하고, 뜻과 기개[風霜]가 매우 준엄합니다. 탁연히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뽑아내기 어려운 지조가 있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양주에서 그를 맞아들이려고 교지를 보내자, 그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온 경내의 여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 고을은 변방의 황량한 고을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수효가 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禪)과 계율에 힘입는 바는 그 한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어찌 강물이 갖은 진주를 잃게 하고, 산이 갖은 옥을 잃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도인과 속인들의 정성을 비추어 보시고, 사부대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기댈 곳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장열이 곧 정중하게 만류하였다. 마침내 양주로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열이 서울로 돌아가, 전송의 효무황제에게 자세히 도왕의 덕행을 진술하였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그를 영접하여 중흥사(中興寺)의 사주(寺主)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도왕은 장열에게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그곳으로 가는 일을 면하였다. 이로써 병을 사칭하여 휘장을 내리고, 인간세계를 엿보는 일을 끊었다.

그 후 유사고(劉思考)가 고을에 다다라 크게 불법의 제사를 마련하였다. 도왕에게 강설을 청하니, 곧 그의 청에 응낙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기로 맹서하였소. 무엇 때문에 절개를 훼손시키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유공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바야흐로 불법이 이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작은 노고를 마다하겠습니까?”
이에 앞서 3협(峽) 안의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바위 언덕 옆에서 신비한 광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유사고는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도왕에게 청해서 광명이 일어나는 곳에 절을 세우게 하였다. 즉각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험한 지점에 방[室]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우러러 바라보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왕경무(王景茂)가 초청하여, 무담사(武擔寺)에 머물러 승주(僧主)가 되었다. 대중을 도와 맑고도 삼가하니,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원년(465)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에 따라 화장하였다. 유사고는 그를 위하여, 무담사의 절 문 오른쪽에 탑을 세웠다.
경화(景和) 원년(465)에 소혜개(蕭慧開)가 서쪽으로 나아가 성도에 주둔하였다. 도왕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함께 도를 강론할 생각으로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탄식하였다.
“애석하구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니 곽문거(郭文擧)가 강성(康成)을 뒤쫓아 간 일 따위야, 어찌 말할 만한 꺼리나 되겠는가?”
당시 현인들이 애석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보명(普明)ㆍ도은(道誾)
당시 촉(蜀)의 강양사(江陽寺)의 보명과 장락사(長樂寺)의 도은도 모두 계율과 덕망이 높고 밝았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감통(感通)을 얻었다. 도은은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더욱 담론과 토론에 빼어났다. 오(吳)나라의 장유가 초청하여 계를 내리는 스승으로 삼았다.

19)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소(邵)씨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抗)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 지조를 지키고, 힘써 수행함에 정성이 간절하였다. 풍모 있는 자태가 수려하고 반듯하여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처음 여산(廬山)에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지혜롭게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하상지(何尙之) 등이 모두 덕스런 풍모를 흠모하였다. 안연지는 늘 찬탄하였다.
“형산(荊山)의 구슬이라면 오직 혜정, 그 사람뿐이다.”
아들 안준(顔竣)이 나가 동주(東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동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사(天柱山寺)에 깃들어 살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섬주(剡州) 법화대(法花臺)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동앙산(東仰山)에서 쉬었다. 곳곳에서 소요하며 노닐었다. 아울러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힘썼다. 나이가 50세를 넘자, 뜻과 절개가 더욱 굳건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지은 문한(文翰)과 문집(文集) 열 권이 있다.

20) 석법민(釋法愍)
법민은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여 뜻을 경전에 도탑게 가졌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였다. 곧 고을과 나라들을 밟아보고, 풍속을 구경하며 도를 음미하였다. 그는 『반야경』과 논리를 따지는 것과 경장과 율장을 모두 마음껏 요리하였다.
그 후 강하군(江夏郡)의 오층사(五層寺)에서 쉬었다. 당시 사문 승창(僧昌)이 강릉 성 안에 탑을 세웠다.
자사인 사회(謝晦)가 이를 허물고자 하였다. 법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사회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법민은 이에 장사(長沙)의 녹산(麓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회는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에 이르러, 후하게 술과 고기를 두텁게 내려주었다. 엄중하게 북을 치고 위엄을 떨치면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부셔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과 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사회는 놀라고 무서워 달아났다.
그 후 그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무리였던 정법성(丁法成)과 사승쌍(史僧雙)은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법을 범해 죽었다.
이에 법민은 『현험론(顯驗論)』을 지어서 인과를 밝히고, 아울러 『대도지경(大道地經)』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제자 승도(僧道)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승종(僧宗)
당시 시흥군(始興郡) 영화사(靈化寺)의 승종이라는 비구도 경론을 널리 섭렵하였다. 『법성론(法性論)』과 『각성론(覺性論)』이라는 두 논을 지었다.

21) 석도량(釋道亮)
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정림(靜林)ㆍ혜륭(慧隆)
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말릉령(秣陵令)이 보낸 것이다.”
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

22) 석범민(釋梵敏)
범민의 성은 이(李)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릴 때 관중ㆍ농서(壟西)지방에서 유학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팽성(彭城)과 사수(泗水) 지방을 두루 다녔다. 내외의 경서 모두를 마음의 구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만년에는 단양(丹陽)에서 쉬면서 자주 강설하는 법회를 세웠다. 사장(謝莊)ㆍ장영(張永)ㆍ유규(劉虯)ㆍ여도혜(呂道慧)가 모두 그의 도풍을 이어받았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서로 칭탄하며 존중하였다.
여러 번 『법화경』과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요의백과(要義百科)』에 서문을 써서, 간략하게 불교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은 이 한 권에 그친다. 구사한 내용에서 생략된 점이 보이지만 당시에 존중받았다.
그 후 단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승약(僧籥)
당시 승약은 본래 상당(上黨) 사람이다. 『열반경』에 빼어나 장창(張暢)의 존중을 받았다.

23) 석도온(釋道溫)
도온의 성은 황보(皇甫)씨며,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이다.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알려졌다.
열여섯 살 때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여 수학하였다. 그 후 장안에 노닐어 다시 동수(童壽: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돌아와 양양의 단계사(檀溪寺)에 머물렀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번주(樊州)와 등주(鄧州)의 학도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오(吳)나라의 장소(張邵)가 양양에 주둔하자, 그의 아들 장부(張敷)도 따라왔다. 장부가 도온의 강론을 듣고서 돌아오자, 장소가 그에게 물었다.
“도온은 어떻더냐?”
장부가 대답하였다.
“논리의 해석은 세세한 것까지 분석하는구나 느꼈지만, 도에 깃든 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장소가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매우 빼어남에 고개 숙였다. 그 후 조용히 도온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만일 환속할 수만 있다면, 곧 별가(別駕) 벼슬로 대우하겠소.”
도온이 말하였다.
“시주께서는 형틀과 수갑으로 사람을 유인하시려 합니까?”
그 날로 그곳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 장소가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한탄하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내려왔다.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칙명으로 서울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노소(路昭) 황태후가 대명(大明) 4년(460) 10월 8일에 보현보살의 상을 조성하였다. 상이 완성되자 중흥사의 선방에 재를 마련하였다. 초청한 승려가 모두 2백 명이다. 이름을 열거해서 함께 모이게 하여, 사람의 수효를 일찍이 정해놓았다.
그 당시 절은 새로 지어 호위가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늦게 와서 자리에 앉았다. 풍채와 용모가 모두 청아하였기에, 온 법당의 승려들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재주(齋主)와 함께 백여 마디의 말을 나누고는 문득 사라졌다. 문을 지키는 이들을 샅샅이 검문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출입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신인(神人)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도온은 이미 승주였으므로 말릉(秣陵)의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 아뢰었다.
“황태후께서는 슬기롭게 비추어 보는 기운이 높고 밝으시어, 성스러운 상서로움이 그윽하게 적셨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생각을 씻어내고, 지극한 경계에서 옷깃을 가다듬으셨습니다. 본래부터 궁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시고, 일마다 부처님의 경계 밖에 허통하십니다[事虛梵表].
마침내 처음으로 쇠를 녹이고 자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곧 신비하고 화려한 모습을 묘사하여, 보현보살이 오시는 모습의 성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주의 진귀한 보배를 기울여, 그 묘함은 하늘의 장식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련하신 재와 강론은 이 달 8일로 끝났습니다. 보시하신 모임에는 제한이 있고 명부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어서, 차례대로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니, 수효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돌아가며 경을 읽는 것이 절반 가량 진행되려 할 즈음에, 시각은 사시(巳時)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좌석 안에 참여하였습니다. 얼굴과 행동거지가 단엄하고 기개와 모습이 빼어나게 드러나, 온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재주(齋主)가 물었습니다.
‘상인의 이름은 무엇이오?’
‘혜명(慧明)이라 합니다.’
‘어느 절에 주석합니까?’
‘천안사(天安寺)에서 왔습니다.’
말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송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생각을 숙연히 하였습니다. 이는 밝은 상서로움의 드러남이며, 보이지 않는 감응이 펼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붉은 묏부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화려한 누마루도 멀지 않습니다만, 대저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해[景]를 되돌려 놓고 달[緯]을 움직이며,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적은 바위를 일으키고 샘을 열게 한다.’
하물며 황제의 덕은 천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공은 온 백성을 흡족하게 적셔줍니다. 어진 정치로 먼 하늘 끝까지 밝히고, 이치로서 어둠의 세계 밖까지 뻗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상왕 때의 번성하던 선비들은 크게 밝은 조정을 보여줄 수 있었고, 신께서는 발심을 권유하는 오묘한 몸으로 황제의 방으로 나투었습니다.
만약 때맞추어 폐하가 바다 구석까지 지혜로 비추신다면, 그 빛남이 일월보다도 밝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을 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천복을 일으켜 끝없는 곳까지 드리우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천안사(天安寺)라 칭하였습니다. 신(神)의 기반이 더욱 멀리 이어지고 도의 정치가 바야흐로 응결되어, 온 천하가 태평하고 만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삼가 소속된 고을에 이 사실을 줄지어 이야기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서상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에서는 이 사실을 군(郡)에 말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의 공령부(孔靈符)는 이 사실을 표를 지어 나라에 아뢰었다. 이어 조서가 내려와, 선방을 고쳐서 천안사(天安寺)라 하여 상서로움을 기렸다.

그 후 도온은 여러 번 강의를 맡았다. 듣고 음미하는 손님이 강당을 메우고, 서로 마음을 기울였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하게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자주 신비한 이적(異跡)에 감응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뻐하여 돈 50만 냥을 하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제왕은 재물을 하사하고 도온은 법칙을 이끌어서, 저 위의 하늘에서 감동을 느껴 신령(神靈)한 덕을 내리셨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승경(僧慶)ㆍ혜정(慧定)ㆍ승숭(僧嵩)
당시 중흥사에 승경ㆍ혜정ㆍ승숭이 있었다. 모두 교리의 이해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승경은 3론(論)에 빼어나 당시 학도들의 종사가 되었다. 혜정(慧定)은 『열반경』과 아비담에 뛰어나서 역시 여러 번 으뜸가는 자리를 맡았다. 승숭도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그러나 말년에 편벽된 고집이 생겨 주장하였다.
“부처는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임종하던 날 혀의 뿌리가 먼저 썩었다.

24) 석담빈(釋曇斌)
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ㆍ『승만경』을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담제(曇濟)ㆍ담종(曇宗)
당시 장엄사에는 담제ㆍ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 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

25) 석혜량(釋慧亮)
혜량의 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현량(顯亮)이다. 동아(東阿)의 도정(道靖)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맑은 명성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
“도정은 큰 스승이고, 혜량은 작은 스승이다.”
비록 나이와 명망에서는 도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풍과 규범은 그를 이어받았다.
그 후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과 『대품경』ㆍ『소품경』ㆍ『십지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니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했다.
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도안(道安)과 법태(法汰)는
전 시대에 주옥같은 말씀을 토해내고
담빈과 혜량은
후세에 금 같은 소리를 떨치니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
끊어지려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라.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장엄사(莊嚴寺)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 천 명을 가려내어 교열하였다. 황제의 칙명으로 혜량과 담빈을 바꾸어가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당시의 종사로서 이들과 더불어 경합할 사람은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현통론(玄通論)』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26) 석승경(釋僧鏡)
승경의 성은 초(焦)씨이다. 본래는 농서(隴西) 사람으로, 오군(吳郡) 땅에 옮겨 살았다. 지극한 효도는 보통 사람을 넘었다.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죽자, 태수(太守)가 돈 5천 냥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간곡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스스로 흙을 지고 와서 소나무ㆍ잣나무를 심었다. 묘소에서 움막살이를 하면서 3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3년 상을 마치고 출가하여 오현(吳縣)의 화산(華山)에 머물렀다. 후에 관중ㆍ농서 지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법을 전수 받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경론을 펼쳤다.
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동해의 서담지(徐湛之)는 그의 소박한 풍모를 존중하여, 온 문중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 후 동쪽 고소(姑蘇)로 돌아가 다시 전념하여 종사의 자리를 맡았다. 대사(臺寺)의 사문(沙門)과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요청해서 1년 가량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동쪽 상우(上虞)의 서산(徐山)으로 가니, 따라간 학도들이 백여 명이었다. 교화가 삼오(三吳) 지방을 적셔 명성이 나라[上國]에까지 퍼졌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과도 편지로써 친교를 나누었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는 그의 소박한 도풍에 의지하였다. 칙명으로 서울로 나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자주 법회를 열자, 덕망 있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법화경』ㆍ『유마경』ㆍ「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와 아울러 『아비담현론(阿毘曇玄論)』을 지었다. 교리의 종류를 구별하여 일관된 조리가 있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담륭(曇隆)
이에 앞서 상우의 서산(徐山)에 담륭 도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법석을 잘하였다. 만년에는 문득 고결한 절개가 보통을 넘었다. 역시 사령운의 존중을 받았다. 항상 함께 우승산(嶀嵊山)을 노닐었고, 죽은 후에는 사령운이 조문[誄]을 지었다.

27) 석승근(釋僧瑾)
승근의 성은 주(朱)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숨어사는 선비 주건(朱建)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노자』ㆍ『장자』와 『시경』ㆍ『예기(禮記)』를 잘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광릉(廣陵)에 이르러 담인(曇因) 법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도(道)를 위하여 조아려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두루 돌아다니며 내전(內典)을 배우고,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다.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 법사를 만났다. 다시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효무(孝武)황제가 칙명을 내려 상동왕(湘東王)의 스승이 되었다. 승근은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그를 따라 5계(戒)를 받기를 청하고, 매우 넉넉한 예우를 더하였다.
이에 앞서 지빈(智斌)이 초대 승정(僧正)인 담악(曇岳)과 교대하여 승정이 되었다. 지빈도 덕이 대중의 종사가 될 만 하였다. 삼론(三論)과 『유마경』ㆍ『사익경』ㆍ『모시』ㆍ『노자』와 『장자』 등에 빼어났다.

후에 의가(義嘉)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빈을 참소하여 말하였다.
“지빈은 의가를 위하여 도를 행했다.”
마침내 교주(交州)로 쫓아냈다.
이때 상동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명제(明帝)이다. 승근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천하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법기(法伎) 일부와 친신자(親信者) 20명을 공급하고, 한 달에 돈 3만 냥씩을 지급하였다. 겨울과 여름 등 사계절에 하사품을 내렸다. 아울러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하사하였다. 모든 외진(外鎭)에 명령하여 모두들 공여하라고 하니 승근은 사양하였다. 사방에서 받들어 헌납하면서 모두들 말했다.
“승정의 마음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그가 존중받았음이 이와 같았다.
승근은 돈을 감추어 두지 않는 성품이었다. 모두를 복 짓는 일에 채워 영근사(靈根寺)와 영기사(靈基寺) 두 절을 세워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명제의 말년에 이르러 황제가 자못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열반이나 멸도와 같은 번역은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모든 사망ㆍ환란ㆍ쇠약하고 머리가 희게 쇠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황제와 상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법을 범하여서 황제의 마음을 거슬려 살육을 당한 사람이 열에 일곱ㆍ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승근이 늘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니, 은혜와 예우도 엷어졌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황제의 장막에서 모셨다. 어느 날 승근은 주옹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요즘 행하시는 일은 절대로 임금다운 거동이 아닙니다. 속가의 일로써 풍자하고 간언하여도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오묘한 진리의 깊은 이야기야 더욱 멀기만 합니다. 오직 삼세(三世)의 괴로운 과보만이 가장 인정에 가깝고 절실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시주께서 혹 기회를 엿볼 인연이 있으시면, 바로 이것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후 황제가 중풍을 앓아 자주 침과 뜸을 더하였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이에 곧 주옹과 은홍(殷洪) 등을 불러 귀신과 잡스런 일에 관한 것 등을 말하게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고자 하였다.
주옹은 곧 『법구경(法句經)』과 『현우경(賢愚經)』 등 두 경을 익숙하도록 읽었다. 매양 알현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곧 말에 앞서 이 경들의 내용을 말하였다. 황제는 왕왕 놀라며 말하였다.
“응보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황제의 뜻에 거슬렸던 무리들이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이는 대개 승근이 인연이 되어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승근은 송(宋)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담도(曇度)
다시 담도가 승근의 뒤를 이어 승주가 되었다. 담도는 본래 낭야 사람으로 삼장과 『춘추』ㆍ『노자』ㆍ『장자』ㆍ『주역』에 빼어났다. 전송의 세조(世祖)ㆍ태종(太宗) 황제가 모두 흠모와 칭송을 더하였다.
그 후 젊은 황제가 예에 어긋나자, 담도도 행함과 감춤에 마땅한 바를 얻어, 거동이 황제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현운(玄運)
같은 절에 또 현운이 있었다. 그도 대ㆍ소승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장영(張永)과 장융(張融)이 모두 승당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28) 석도맹(釋道猛)
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ㆍ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ㆍ소승ㆍ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동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도견(道堅)ㆍ혜란(慧鸞)ㆍ혜부(慧敷)ㆍ혜훈(慧訓)ㆍ도명(導明)
그 후 도견ㆍ혜란ㆍ혜부ㆍ혜훈ㆍ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

29) 석초진(釋超進)
초진의 성은 전욱(顓頊)씨며, 장안 사람이다. 확고한 지조가 있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돈독하여, 대승ㆍ소승의 여러 경전을 모두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를 더하였다. 정신과 성품이 온화하고 기민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명성을 관중 지방에 떨쳤다.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하고 어지러워져서 불법의 일도 피폐해졌다.
이때 초진은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더욱 경문의 뜻을 정밀하게 찾아보고 강설을 열었다. 얼마 후 초진은 고소(姑蘇)로 가서 다시 불법을 널리 폈다.
당시 평창(平昌)의 맹의(孟顗)가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그의 고상한 풍모에 깊이 의지하고자, 곧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여 산음(山陰)의 영가사(靈嘉寺)로 편안하게 모셨다. 이에 절동(浙東)에 머물면서 강론을 이어갔다. 그러니 고을과 외곽의 비구ㆍ비구니 및 청신도의 남녀들이 모두 보살의 인연을 맺고, 계율의 모범에 조아려 가슴에 새겼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부름을 받고 서울로 나아갔다. 『대법고경(大法鼓經)』을 강의하였다. 잠시 뒤 다시 회계로 돌아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해 나아갔다.
『대열반경』이 궁극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생각에 남겨 두어 머뭇거리다가, 여러 번 강설을 더하였다.
무릇 재(齋) 모임을 결성하는 사람치고 반드시 초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다른 곳에 먼저 가기로 허락한 경우가 있으면, 곧 날짜를 옮겨서 재를 열었다. 그 후 노쇠하여 다리에 병이 생겼다. 외부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음식을 방으로 보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기를 바랐다.
초진은 성품 됨됨이가 경전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다. 보고 찾는 데 지극히 간절하였다. 늙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제자를 시켜 열흘에 한 번씩 『열반경』을 소리 높여 읽게 하였다. 그가 경전을 탐독하고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94세이다.

∙담기(曇機)
당시에 또 담기 법사가 있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며, 역시 장안 사람이다. 관중에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자, 그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회계 고을에 이르렀다. 『법화경』과 아비담에 빼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종사로 받들어서 초진과 서로 버금갔다.
군수인 낭야왕(瑯琊王) 유곤(劉琨)이 초청하여, 고을 서쪽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본래 유곤의 조부인 유회(劉薈)가 창건한 절이다.

∙도빙(道憑)
당시에 도빙도 세상에서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집착하는 성품이 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그를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0) 석법요(釋法瑤)
법요의 성은 양(楊)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만 리 밖이라도 찾아가 물었다.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에 연주(袞州)와 예주(豫州) 지방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끝까지 꿰뚫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외의 다른 경전[異部]에도 뛰어났다.
그 후 동아(東阿)의 도정(道靜)이 그의 강론을 들었다. 대중들이 여러 번 다시 강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정은 한탄하였다.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 후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오흥(吳興)의 심연지(沈演之)가 특별히 깊이 그릇이라고 존중하였다. 초청해서 오흥(吳興)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로 돌아왔다.
시종 19년 동안 기원하기를 요청하는 법사가 아니면,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강산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강론을 열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삼오(三吳)의 학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에 『열반경』ㆍ『법화경』ㆍ『대품경』ㆍ『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대명(大明) 6년(462)에는 황제가 오흥군(吳興郡)에 칙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서울로 오르게 하였다. 도유(道猷)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각기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르자마자 곧 강석에 나아갔다. 황제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다.
법요는 나이가 비록 노년이 되어서도 거친 음식과 고난 속에서 굳건한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계율을 지키는 절도가 청백하였기에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담요(曇瑤)
당시 전송 희제(熙帝) 때에 담요가 있었다. 『유마경』ㆍ『십주론(十住論)』및 『노자』와 『장자』에 빼어났다. 또한 초서ㆍ예서에 솜씨가 있어, 전송의 건평(建平)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의 존중을 받았다.

31) 석도유(釋道猷)
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혜관이 대답하였다.
“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도자(道慈)
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혜정(慧整)ㆍ각세(覺世)
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32) 석혜통(釋慧通)
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원찬(袁粲)이 『거안론(蘧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그는 『대품경』ㆍ『승만경』ㆍ『잡심론』ㆍ『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駮夷夏論)』ㆍ『현증론(顯證論)』ㆍ『법성론(法性論)』ㆍ『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주석
1 지둔이 말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고승전』 7권(ABC, K1074 v32, p.827a01-p.839b01)

고승전 제8권

2. 의해 ⑤

1) 석승연(釋僧淵)
승연의 본래 성은 조(趙)씨이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위(魏)나라 사공(司空) 조엄(趙儼)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불교 교리만을 공부하였다.
처음 서주(徐州)에서 노닐다가 백탑사(白塔寺)에 머물렀다. 승숭(僧崇)으로부터 『성실론』과 아비담을 전수받았다. 배운 지 3년이 안되었으나, 그 공업은 10년 배운 사람을 뛰어넘어 슬기로운 이해력의 명성이 멀고 가까운 지방에 치달렸다.
승연은 고상한 자태가 크고 우람하여 허리띠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정신과 기개가 맑고 넉넉하며, 자유자재하여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은둔하는 선비 유인지(劉因之)가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승연에게 주어 정사로 삼았다.

∙혜기(慧記)ㆍ도등(道登)
담도(曇度)ㆍ혜기ㆍ도등도 모두 승연으로부터 수업 받았다. 혜기는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고, 도등은 『열반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모두 위왕(魏王)ㆍ원굉(元宏)의 존중을 받으면서 위나라에 명성을 날렸다.
승연은 위조(僞朝)의 태화(太和) 5년(481)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8세이다. 이때는 바로 제(齊)나라의 건원(建元) 3년(481)이다.

2) 석담도(釋曇度)
담도의 본래 성은 채(蔡)씨이며, 강릉(江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건하여 행동거지를 삼가고, 평소 계율의 모범으로 칭송을 받았다. 마음이 민첩하고 슬기로워 꿰뚫어 보는 안목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그 후 서울에 유학하여 두루 많은 경전을 꿰뚫었다. 『열반경』ㆍ『법화경』ㆍ『대품경』ㆍ『유마경』에 대하여 모두 미세하게 숨어있는 뜻을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일어났다.
이어 각기병 때문에 서쪽으로 노닐다가, 마침내 서주(徐州)에 이르러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다시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끝내 이 논에 정통한 당시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위(魏)의 임금인 원굉(元宏)이 그의 도풍을 듣고, 멀리서 머리 숙여 사신을 보내 모시기를 청하였다. 평성(平城)에 이르자마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원굉이 공경을 표하여 아랫자리에 앉아 몸소 진리의 맛을 관장하였다.
이에 위나라의 서울에 머물며 불법 교화를 이어나갔다. 배우는 무리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위위(僞魏) 태화(太和) 13년(489)에 위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곧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성실론대의소(大義疏)』 8권을 지었는데 북쪽 나라에서 성대히 전한다.

3)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왕(王)씨이며, 여요(餘姚) 사람이다. 건업(建鄴)에 머물러 살았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고,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열네 살이 되어 여산 혜원(慧遠)의 문집을 읽었다. 마침내 안타깝게 탄식하면서,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하였다. 마침내 친구인 지순(智順)과 함께 천 리 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혜원의 유적을 구경하였다. 이에 여산의 서사(西寺)에 머물면서 3년 동안 두로 섭렵하였다. 이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에 왕혹(王或)이 3상(相)의 뜻을 말하면서 크게 학승을 모았다. 도혜는 그때 17세였다. 그러나 몇 번 질문하는 말이 현미하며, 따지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대중들이 모두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도맹(道猛)ㆍ도빈(道斌) 두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어느 날 도맹이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장융(張融)이 어려운 질문을 몇 겹으로 겹치게 하자, 도맹은 병을 핑계로 그 많은 질문을 받을 수 없다 하였다. 곧 도혜로 하여금 이것에 대답하게 하였다. 장융은 이때 도혜의 나이가 적으므로 자못 가볍게 보는 마음을 품었다. 도혜는 기회를 틈타 날카로움을 꺾었으며, 말하는 것마다 반드시 이치에 닿았다. 이렇게 말을 주고받음이 거듭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났고,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계속되는 강설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황을 이뤘다. 그는 내용의 종류를 구별하여 처음으로 단(段)ㆍ장(章)을 만들었다.
저징(褚澄)ㆍ사초종(謝超宗)은 당시 명망이 두터운 인물들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모두 추대하고 예우하였다.

도혜는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봉양할 밑천을 남겨드리고자 마침내 자리를 장엄사(莊嚴寺)로 옮겨가 쉬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을 어여삐 생각해 다시 출가하여 도를 위했다. 집을 희사하여 복전으로 삼았다. 이곳은 도혜의 정사와 멀지 않았다.
도혜는 제의 건원 3년(481)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31세이다. 임종에 사람을 불러 털이개를 가지고 오게 하여 친구인 지순(智順)에게 물려주었다. 지순이 통곡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 40세에도 이르지 못하다니 가슴 아픈 일이로다.”
그러고는 털이개를 관(棺) 속에 넣어 염하고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진군(陳郡)의 사초종은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었다.

∙현취(玄趣)ㆍ승달(僧達)
당시 장엄사의 현취ㆍ승달도 모두 경학의 이해로 칭송을 받았다. 현취는 많은 경전에 두루 빼어나고, 아울러 내외의 학문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게다가 석상의 토론에 빼어나 그 도풍과 법도는 기뻐할 만한 것이었다. 승달은 어려서부터 머리털이 하얗게 희어, 당시 사람들이 백두달(白頭達)이라 불렀다. 그 역시 많은 경전을 널리 해득하였다.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데 더욱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에 거슬려 장사(長沙)로 쫓겨났다.

4) 석승종(釋僧鍾)
승종의 성은 손(孫)씨이며, 노군(魯郡)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가난하게 살면서 도를 실천하였다. 어느 날 수춘(壽春)에 이르렀다. 승도(僧導) 법사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초군(譙郡)의 왕업(王鄴)이 그의 지조를 존중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고, 후에 초청하여 『백론(百論)』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도 법사가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는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후생이 두렵다는 말이 진실로 빈 말이 아니군요.”
승종은 미묘하게 『성실론』ㆍ3론ㆍ『열반경』ㆍ『십지론』 등에 빼어났다. 그 후 남쪽 서울로 노닐다가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의 초기에 위(魏)나라에서 이도고(李道固)를 사신으로 보내서 그를 초빙하였다. 때마침 절 안에서 있었다. 승종이 공덕과 명성이 있다 하여, 황제가 칙명으로 이도고와 응대하게 하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흘러가도 말에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해 그림자가 조금씩 기우는데도 승종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이도고가 물었다.
“왜 먹지 않는가?”
“예전 불도의 법에는 오시(午時)가 지나면 먹지 않았습니다.”
이도고가 말하였다.
“어떻게 소리로 들은 것[聲聞]만 갖고 일삼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소리로 들어 득도(得度)한 사람은 짐짓 성문승(聲聞僧)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명답(名答)이라 하였다.
그 후 그곳에서 소요하며 강설하니, 묻고 듣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제의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자주 청하여 남쪽으로 얼굴을 두어 앉았다.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담참(曇懺)ㆍ담천(曇遷)ㆍ승표(僧表)ㆍ승최(僧最)ㆍ민달(敏達)ㆍ승보(僧寶)
당시 승종과 명성을 나란히 하며 덕도 비슷한 이로 담참ㆍ담천ㆍ승표ㆍ승최ㆍ민달ㆍ승보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문선(文宣)왕이 존경하여 번갈아가며 강석을 일으켰다.

5) 석도성(釋道盛)
도성의 성은 주(朱)씨이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배움에 힘써서 『열반경』ㆍ『유마경』에 빼어나며, 아울러 『주역』에도 뛰어났다. 처음에 상주(湘州)에 주석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가 그의 도풍을 듣고는 칙명을 내렸다.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사초종(謝超宗)은 그를 한 번 만나보고는 마침내 스승의 예로 존경하였다. 이어 『술교론(述交論)』 및 『생사본무원론(生死本無源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에서 쉴 때 제(齊)의 고제(高帝)가 칙명을 내려, 담도(曇度)와 교대하여 승주(僧主)로 삼았다.

단양윤(丹陽尹) 심문계(沈文季)는 평소 도교(道敎)를 받들고, 부처님을 배격하고 질시(嫉視)하였다. 마침내 부승국(符僧局)에 건의하여 승려의 승적(僧籍)을 책문하여, 비구와 비구니를 가려내서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성이 기강있게 이끌어 공적이 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이 건의는 잠잠해져 편안해졌다.
그 후 문계(文季)가 천보사에 모임을 마련하여, 육수정(陸修靜)으로 하여금 도성과 논의하게 하였다. 도성은 이미 이론에서 그보다 앞서 있었다. 게다가 말과 기개가 우뚝 드러나, 조롱과 해학을 주고받아 말하면서도 잠시도 어지러운 기색이 없었다. 육수정은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어 부끄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도성은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6) 석홍충(釋弘充)
홍충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지조와 힘이 있었다. 『노자』와『장자』에 뛰어나며 경전과 율법을 해득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의 말기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처음에는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어려운 질문에 빼어나 고승들이 대부분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그가 법석을 열면서부터 날카로운 공격들이 번갈아 일어났다. 홍충은 이미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말주변은 하늘에서 내려준 뛰어난 솜씨였다. 그런 까닭에 의문을 통하게 해주고, 막힌 것을 풀어주어 빈틈이 없었다. 매양 『법화경』과 『십지론』을 강의할 때마다 청중이 강당을 메웠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江夏)의 문헌왕(文獻王) 의공(義恭)도 평소 그를 존중하였다.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상궁사(湘宮寺)를 세워 홍충을 초청하여 강령으로 삼았다. 이에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법선(法鮮)
당시 상궁사의 법선도 총명하고 비상한 사고력이 있었다. 홍충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홍충은 제(齊)의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문수문보리경(文殊問菩提徑)』과 『수능엄경(首楞嚴徑)』에 주석을 달았다.

7) 석지림(釋智林)
지림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도량(道亮)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숭상하고 배움을 좋아하여, 책 보따리를 걸머지고 장안으로 나갔다. 강주(江州)ㆍ예주(豫州) 지방에 지팡이를 떨치면서, 뭇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캤다. 특히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그 후 도량이 배척당하자, 제자 열두 사람이 모두 그를 따라 영외(嶺外)로 나갔다. 이에 지림은 곧 발걸음을 번우(番禺)에 멈추어, 바닷가 마을을 맑게 교화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가 있던 곳에 칙명을 내려, 노자를 지급하였다. 서울로 내려와 영기사(靈基寺)에 머물렀다.
강설을 이어가니, 묻고 감복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2제(諦)의 내용에 3종(宗)의 다른 점이 있음을 밝혔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顒)도 또한 『삼종론(三宗論)』을 지었다. 이미 그것은 지림의 생각과 서로 부합되어, 깊이 흐뭇한 위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곧 주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근간에 시주께서 2제의 새로운 뜻을 서술하고, 3종에서 취하고 버릴 점을 진술하여, 그 명성이 보통 음률과 다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남을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는 빠르지 않다 해도, 그 내용은 빈도가 품었던 생각과 같습니다. 천하의 이치라 할 만한 것은 오직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속히 이것을 종이와 붓으로써 짓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요즘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을 만나 지은 논문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두루 충만하여, 특별히 비상하게 중히 여겼습니다.
또 들었습니다. 시주께서는 혹 현세의 이론과 다른 이론을 내세울 경우, 학인ㆍ대중들의 생각을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비록 논문을 짓는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결코 반드시 세상에 내놓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누웠다 안절부절합니다.

이 논의 취지는 처음 개진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미묘한 가르침이 도중에 단절된 지 67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론이 보통 운치보다 높아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 스무 살 때 분수에 넘치게 이 논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의지하여 미미하게라도 깨달으면, 득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습니다. 가만히 매양 환희에 젖어 있지만, 이 기쁨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장안의 나이 드신 승려들을 만나면, 흔히 관중의 도가 높고 뛰어난 승려 가운데, 옛날에는 이러한 논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불법이 결집되는 성대할 때를 맞아, 이 취지를 깊이 터득한 사람은 본래부터 많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심정을 뛰어넘는 이론인지라, 후진들 중에도 이를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매우 적었습니다. 이를 전하여 강남 지방으로 넘어가게 한 사람은 아예 없었습니다.

빈도는 털이개를 손에 잡은 이래로 지금까지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동이니 서니 이쪽저쪽에서 강설하여, 한 시대의 존중을 그릇되게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 이외의 계통들은 자못 이런저런 가르침이나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길만은 도인과 속인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그 취지를 터득한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가 들면서 마침내 이것 때문에 병이 생겼습니다. 이미 병들고 노쇠한 말년의 목숨인데다, 또 아침저녁 사이에 서쪽으로 돌아가야 할 몸입니다. 다만 이 도를 되돌아볼 때마다, 지금부터는 영원히 단절되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시주께서 기연을 일으키어, 유래 없이 홀로 세상의 테두리 밖에서 이 논리를 제창하셨습니다. 뜻밖에도 이 소식이 찾아와, 외람되게 저의 귀까지 들어왔습니다. 한편 기쁘고 한편 위안이 되어, 실로 무어라고 정황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논리를 세워 밝힌다면, 전법의 등불에 유종의 미가 있을 것입니다. 비로소 이것은 진실한 도의 실천으로 제일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부처님과 승단에 보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얻는 복덕과 이익은 이 공덕으로 얻는 복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다행스럽게도 생각을 궁극적으로 가려내어 기술하셨으니, 마땅히 널리 베풀어 말씀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셔야 합니다. 법의 이론을 논하고 밝혔으니, 어진 일을 만나기를 사양하지 마십시오. 어찌 대중들의 마음을 돌아보고 아낌으로써, 기특한 취지를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이 논을 이미 이루었으면서도 마침내 다시 중간에서 잠재운다면, 시주께서 장래에 혹시 이 일 때문에 커다란 장애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제가 앞에서 한 말들은 간절한 말이며,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생각건대 곧 한 권을 베껴 쓰게 하여 이 빈도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다면, 이것을 갖고 서쪽으로 돌아가 곳곳에 널리 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조금 몸을 끌고 다닐 만하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 서술하여 깊이 이를 부탁드리고자 꾀했습니다.”
주옹(周顒)은 이로 인하여 논을 출판하였다. 그런 까닭에 3종의 취지가 전술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지림은 키가 8척이나 되고, 타고난 자태가 아름답고 우아하였다. 법좌에 오르면 부르짖는 소리가 법당을 쩌렁쩌렁 울렸고, 토해내는 이야기는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그 후 서울을 떠나 고창(高昌)으로 돌아갔다. 제(齊)의 영명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이제론(二諦論)』과 『비담잡심기(毘曇雜心記)』를 지었다. 아울러 『십이문론(十二門論)』과 『중론(中論)』 등에 주석을 달았다.

8) 석법원(釋法援)
법원의 성은 신(辛)씨이고, 농서(隴西) 사람이다. 신비(辛毘)의 후예이다. 맏형인 신원명(辛源明)은 위위(僞魏)에 벼슬하여 대상서(大尙書)가 되었다. 둘째 형인 법애(法愛)도 사문이 되어 경론을 해석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예예국(芮芮國)의 국사가 되어 3천 호의 봉록을 받았다.
법원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우뚝 뛰어나 뭇 아이들과 달랐다. 길에서 가난하여 추워 떠는 사람을 만나면, 곧 옷을 벗어 베풀어 주었다.
처음 출가하여 양주(梁州)의 사문 축혜개(竺慧開)를 섬겼다. 혜개는 아름다운 덕이 신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가 초과(初果:須陀洹果)를 터득했다고 일컬었다.
혜개가 법원에게 말하였다.
“네 마음의 슬기로움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말세 교화의 강령이 되고 총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힘을 아끼지 말고 널리 견문을 넓혀, 홀로 착해지는 것만을 힘써서는 안 된다.”
이에 그는 혜계에게서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연(燕)ㆍ조(趙)를 거쳐 업성(鄴城)과 낙양(洛陽)을 오가면서 수행하였다. 마침 오랑캐들이 종횡무진 날뛰어, 관중과 농서지방이 가마솥에 물 끓듯 시끄러운 때를 만났다. 법원은 험난함을 무릅쓰고 위태로운 길을 밟아가며, 학업에 게으름이 없었다.

원가(元嘉) 15년(438) 양주로 돌아왔다가, 곧 성도(成都)로 나아갔다.
그 후 동쪽 건업(建鄴)으로 갔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을 의지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뜻을 대승의 경전에 도탑게 하고, 한편으로 논리를 따지는 것을 탐구하였다. 또한 불경 외의 고전들도 자못 펼쳐 보았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들어가 고요함을 지켰다. 선(禪)을 맛보면서 생각을 5문(門)에서 맑게 하고, 마음을 3관(觀)에서 노닐었다. 얼마 후 자사(刺史) 유등지(庾登之)가 초청하여 산을 나가 강설하였다.
그 후 문제(文帝)가 도생(道生)의 돈오(頓悟)의 논리를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칙명으로 서울로 내려가니, 돈오의 취지가 송대(宋代)에 거듭 밝혀졌다.
하상지(何尙之)가 그의 강의를 듣고 감탄하였다.
“도생이 죽은 후에는 미묘한 말씀이 영원히 끊어졌다고 늘 생각하였다. 오늘 다시 생각 밖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하늘이 아직 불교를 없애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황제는 칙명으로 남평목왕(南平穆王) 유삭(劉鑠)을 위해 5계를 내려주는 스승이 되도록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칙명으로 서양왕(西陽王) 자상(子尙)의 벗이 되었다.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감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이를 면할 수 있었다. 이어 방산(方山)에 집을 마련하여 『승만경(勝鬘徑)』과 『미밀지경(微密持徑)』에 주석을 달았다. 논의하다 틈이 나면, 때때로『효경(孝經)』과 상복(喪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의 구조를 고치고, 법원을 초청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산을 떠나 고을로 나와서, 절의 기강을 맡는 강유(綱維)가 되었다. 자사(刺史) 왕경문이 찾아가서 문안을 드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바로 법원이 상복제도를 강의하는 시간을 만나서, 몇 번 묻고 토론하고는 훌륭하다고 하면서 물러갔다.

명제(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지어 새로 절이 이룩되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미묘하게 영준한 승려를 가려내고, 칙명으로 법원을 초청하여 법주(法主) 자리를 맡겼다. 이어 황제가 법석에 참석하고, 공경대부들도 자리에 모였다. 한 시대의 성대한 일인지라 보는 이들마다 영화롭게 여겼다.
그 후 제(齊)의 문혜왕(文惠王)이 또 초청해서 영근사(靈根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절로 자리를 옮겼다.
태위(太尉)인 왕검(王儉)은 번잡한 교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법원에 대한 대우만은 스승과 같이 하여, 글과 말에 공경을 다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1세이다.

∙법상(法常)ㆍ지흥(智興)
당시 영근사에 또 법상과 지흥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두루 뛰어나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법상은 극렬하게 담판 짓기에 몹시 빼어나서, 당시 이름난 이들마저 꺼려했다. 게다가 성품까지 매우 강경하여 사람들의 풍속과 어울리지 못했다.

9) 석현창(釋玄暢)
현창의 성은 조(趙)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가문이 오랑캐들에게 멸문당하여, 화가 곧 현창에게까지 미쳤다. 오랑캐의 장수가 현창을 보고는 제지시켰다.
“이 아이는 눈빛이 밖까지 쏘아보는구나.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이어 곧 양주(凉州)로 가서 출가하였다. 본명은 혜지(慧智)이다. 그 후 현고(玄高) 법사를 만나서 섬겨 제자가 되었다. 현고는 늘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반드시 함께 상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현창이라 고쳤으며, 이것으로 현고가 부촉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 후 잔악한 오랑캐들이 불법을 잘라 멸망하게 하고 모든 사문들을 해쳤다. 그러나 오직 현창만은 달아날 수 있었다.

원가(元嘉) 22년(445) 윤 5월 17일 평성에서 출발하였다. 도중에 대군(垈郡)ㆍ상곡(上谷)을 경유하여, 동쪽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었다. 도중에 유주(幽州)ㆍ기주(冀州)를 거쳐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곧 맹진(孟津)에 이르렀다.
오직 손에는 한 다발의 버들가지와 한 움큼의 파 잎사귀를 쥐었을 뿐이다. 오랑캐의 기병들이 추격하여 뒤쫓아 와서, 곧 그의 몸까지 이르렀다. 곧 그가 버들가지로 모래를 쳤다. 모래가 일어나면서 하늘이 어두워져, 사람과 말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얼마 후 모래가 가라앉고 기병들이 다시 그의 가까이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오직 파 잎사귀를 콧구멍 속에 넣어 공기를 통하게 하고 강물을 건넜다. 8월 1일에 양주(楊州)에 도달하였다.

경전과 율법을 환하게 깨우치고, 깊이 선(禪)의 요체에 들어갔다. 길흉을 점쳐서 예언하면, 참으로 영험하여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그 밖에 많은 고전들과 제자백가(諸子百家)도 대부분 해박하게 섭렵하였다. 심지어 세간의 기술과 잡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과거 『화엄경』의 대부(大部)가 글 뜻이 넓고 멀어서, 아주 먼 옛날부터 해석을 제대로 베푼 것이 없었다. 이에 현창은 곧 생각을 다하여 연구하고 탐색하며, 장구를 들고 비교하였다. 강설로 전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는 현창이 그 시초가 된다. 또한 그는 3론(論)에 빼어나 학자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전송의 문제가 깊이 찬탄과 존중을 더하여 초청해서 태자의 스승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가 두 번 세 번 굳게 사양하니,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는 도를 넓히고 중생을 제도하여 불교를 널리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지금 제왕이 자기 마음을 비우고 초청하였습니다. 황태자도 예를 갖추어 공경하기를 생각합니다. 만약 도로써 성스러운 임금을 드높인다면, 사해가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지금 우뚝이 높이 앉아 사양만 하신다면, 장차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현창은 말하였다.
“이 일은 지혜 있는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속인들과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니라.”
태초(太初)의 사고가 일어나자, 비로소 그가 먼저 알고서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였음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옮겨 형주에서 쉬다가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공덕직(功德直)이 『염불삼매경(念佛三昧徑)』 등을 번역하였다. 현창이 그 문자를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글 뜻이 매끄럽고 절묘하였다.
또한 그는 손을 펴면 향기가 감돌고, 손바닥 안에 물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말년에 이르자 곧 배를 띄워 멀리 거동하여 서쪽 성도(成都)로 갔다. 처음에는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곧 손수 그림을 그려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장상(神將像)을 만들었다.
승명(昇明) 3년(479)에 이르자 다시 서쪽 경계로 노닐었다. 민령(岷嶺)을 멀리서 구경하고, 이어 민산군(岷山郡)의 북부 광양현(廣陽縣)의 경계에서 제후산(齊后山)을 보았다.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이어 바위를 의지하여 골짜기를 옆에 둔 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다. 제자인 법기(法期)가 신인(神人)이 말을 타고 푸른 홑옷을 입고, 산을 한 바퀴 돈 다음 돌아와 탑을 조성할 자리를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제(齊)의 건원(建元) 1년(479) 4월 23일에 사찰을 건립하고 이름을 제흥사(齊興寺)라 지었다. 바로 이 날이 제의 태조황제가 천명(天命)을 내려 받던 날이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만 리 떨어진 먼 곳에서 일치한 것이다.

당시 부염(傅琰)이 서쪽 성도에서 주둔하였다. 현창의 도풍과 법도를 흠모하여 스승으로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현창은 절을 세운 뒤에 곧 부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빈도가 형주(荊州)에 깃든 것이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노쇠하고 병은 오래되었으며, 독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싫었습니다. 그 까닭에 멀리 민산의 경계에 몸을 의탁하여, 이 언덕을 집터로 삼았습니다.
이곳은 광양현의 동쪽에 있으며, 성과의 거리가 천 걸음입니다. 구불구불한 길이 길게 뻗어 중첩한 잿마루와 이어진 곳으로, 잿마루는 네 곳의 개울이 관문을 이루었습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뻗어서 고을과 성곽을 품속에 안고, 세 방면을 돌아가며 바라볼 수 있습니다. 높은 산봉우리를 등에 얹어, 멀리 아홉 갈래 물줄기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지난해 4월 23일에 처음으로 준공하여 삼태기를 엎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이곳에 이른 방문객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이 바로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날이라 하였습니다.

무릇 들었습니다.
‘도가 태극과 배합하면 아름다운 상서[嘉瑞]가 저절로 나타나고, 덕이 양의(兩儀)와 같으면 신의 감응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하도낙서(河圖洛書)1)에는 주(周)나라가 천하를 가질 조짐이 있었고, 영석(靈石)에는 대진(大晋)의 징조가 표시되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이 산이 징험에 부합되는 것도 어찌 제나라 황제의 신령한 감응이 아니겠습니까?
시주께서 나라를 받드는 정이 깊으시어, 천운이 속하는 시대라는 징조가 있게끔 이르게 한 것을 마음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이 일을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문득 산찬(山贊) 한 편을 지어 어리석은 회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산찬에서 찬한다.

우뚝한 제나라며 이곳의 산이여,
숨겨진 상서로움은 그 어느 옛날인가.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탄생하였네.
황제의 호칭으로 밝아졌어라.

묏부리 성스런 공간을 실어
나라의 복된 조짐 드러낸 아름다운 이름
묏부리 구름은 평탄하고
뫼에 서린 노을은 화평하다.

바위 다듬어 절을 지으려고
재고 묶고 하였더니
처음 일 시작하는 날
자미궁(紫微宮)의 용 날랐어라.

도는 천지와 짝 이루어
사해가 고루 맑아졌으니
하늘과 함께 할 왕조의 운세
묏부리 신령함을 드러내었네.

부염이 곧 자세히 표를 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100호의 조세를 줄여, 현창의 봉록으로 공급하였다.

제의 표기장군(驃騎將軍)인 예장왕(豫章王) 의(嶷)가 형주(荊州) 삼협(三峽)에 주둔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하남(河南) 토곡혼(吐谷渾)의 임금도 멀리서 마음으로 경모하다가, 마침내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 제산(齊山)에서 영접하려 하였다. 이미 동쪽으로 간 후라서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제의 무제(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사도(司徒)인 문선왕 유계(劉啓)가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문혜(文惠)태자도 사람을 파견하여 불러 영접하였다. 이렇게 이미 칙령이 중첩하자 사양했으나, 이를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병이 나서 병을 지닌 채 서울에 이르니, 성이 기울 만큼 대중이 길을 막고 바라보았다.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9세이다. 이 해는 제의 영명(永明) 2년(484) 11월 16일이다. 곧 종부(鍾阜) 독룡산(獨龍山) 앞에 묻었다. 임천(臨川)의 헌왕(獻王)이 비를 세우고,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비문을 지었다.

10) 석승원(釋僧遠)
승원의 성은 황(皇)씨이며, 발해(渤海)의 중합(合)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북쪽 나라의 황보(皇甫)씨이다. 바다 모퉁이로 피난 온 까닭에, ‘보(甫)’자는 없애고 황(皇)자만 남겨 성씨로 삼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겨 나이 열여섯에 출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푸성귀를 먹으며, 새벽에서 밤까지 참회와 독송을 그치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 비로소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당시 사문 도혜(道慧)가 높은 재주와 빼어난 덕으로 명성이 높아, 바다와 태산을 덮을 정도였다. 승원은 그를 따라 수학하였다.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게 밝고, 대승과 소승을 꿰뚫었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양자강을 건너서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승명(昇明) 연간(477~479)에는 소단양(小丹陽)의 우락산(牛落山)에 정사를 세워, 용연정사(龍淵精舍)라 이름 지었다.

승원은 나이 서른한 살 때 비로소 청주(靑州)의 손태사(孫泰寺)에서 남쪽에 얼굴을 두어 강설하였다. 말과 논리가 맑고 유창하며, 풍채와 용모가 빼어나게 반듯하였다. 앉아서 강설을 듣는 4백여 명의 사람이 기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낭야(瑯琊)의 왕승달(王僧達)은 재능이 당세에 희귀한 인물이었다. 승원의 평소의 도풍을 듣고는 초청해서 중조사(衆造寺)에 머물렀다.
승원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자기 몸을 위해 남겨두는 재물이 없었다. 현소(玄紹)라는 비구가 늘 돈과 패물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승원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한번은 청원(靑園)으로 가다가, 마을 안에 당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들을 찾아갔다.
시체와 함께 병을 앓은 사람도 몇 사람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승원은 깊이 가슴이 아프고 슬픈 생각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인하여 마을에서 구걸하며 죽은 사람들을 염하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니, 참으로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전송의 신안(新安) 효경왕(孝敬王) 유자란(劉子鸞)이 자기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인, 은귀비(殷貴妃)를 위하여 신안사(新安寺)란 절을 지었다. 세 고을에서 영명하고 현철한 이들을 선발하여 초청하도록 명하였다.
승원은 소산사(小山寺)의 법요(法瑤)와 남간사(南澗寺)의 현량(顯亮)과 함께 부름을 받았다. 모두가 승원을 추천하여 우두머리로 삼게 하였다.

대명(大明) 6년(462) 9월에 담당 관리가 나라에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는 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웅크리는 사람에게, 크게 빼어난 공덕을 기대할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먹 쥐고 꿇어앉아 땅에 납작 엎드린다고, 어찌 그것만이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장차 사방을 밝게 열어 펼치고, 팔방을 묶어 제어하여야 합니다. 그 까닭으로 비록 유교와 법가의 지파라든가, 명가나 묵가의 조류라 할지라도, 어버이를 숭상하고 윗사람에게 엄숙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 실마리에 어김이 없습니다.
오직 불교만이 그 가르침의 유래가 임금의 아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종지가 아득히 멀고 미묘한 말씀이 깊은지라, 글에 구애되면 도를 가리므로, 말세가 되어서는 더욱 이런 현상을 부채질합니다. 마침내 나라의 모범적인 제도를 능멸하고 뛰어넘어, 존귀한 왕족에 대해서도 누워서 대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방편을 따르는 묘한 자취를 잃고, 제도와 교화의 깊은 아름다움을 헛갈리게 합니다.

무릇 불법이란 겸손함과 검약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은혜로움과 경건한 마음으로 도를 위합니다. 불경비구(不輕比丘)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절하고, 목련(目連) 사문도 어른을 만나면 예를 올렸습니다. 어찌 사부대중에게는 무릎을 꿇으면서 양친에게 절을 생략하거나, 나이 많은 승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만승천자에게는 곧바로 마주 꼿꼿하게 서 있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까닭에 함강(咸康) 연간에 처음 논의를 제기하고, 원흥(元興) 연간에 이를 이어받았으나, 편파적인 무리들에게 굴복당하여 남아 있던 도마저 좌절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원천의 물이 먼 곳까지 씻어내어 뭇 흐름이 거울처럼 우러러보며, 아홉 신선이 보물을 선사하고 온갖 신이 직분을 따릅니다. 그런데도 궁성 가까이 있는 곳에서마저 신하의 예를 거부하는 백성이 포함되어 있고, 제왕의 섬돌과 자리 사이에도 예법에 항거하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범되는 위엄을 투명하게 하나로 통일하여, 큰 법칙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두렵습니다. 저희들은 논의하여 승려들이 접견할 때도 모두 마땅히 경건한 예의와 공경하는 모습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본래 풍속에 의하면 아침 예불에도 차례가 있거니와, 대승의 방편에서는 불교에서 먼 곳까지도 아울러 겸한다고 합니다.”

황제는 비록 자못 불법을 믿기는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스스로 교만하고 방종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주문이 올라가던 날, 곧 조서를 내려 재가[可]하였다.
승원은 이때 탄식하였다.
“내가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된 것은, 본래 출가하여 도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제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날로 병을 핑계대고 사퇴하였다. 이어 자취를 상정림산(上定林山)에 숨겼다.
경화(景和) 연간(465)이 되어 이 제도가 점점 가라앉자, 옛 법[舊章]으로 되돌려 따랐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승원을 초청하여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룰 수 없었다. 그 후 산에 살면서 자취를 감춘 손님들과, 세간에 오만하여 구름 밖에 사는 선비들이, 그의 산문을 찾아와 우러르고, 그의 선실에 공경함을 펼쳐 마지않았다.
여산의 하점(何點)ㆍ여남(汝南)의 주옹(周顒)ㆍ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ㆍ복양(濮陽)의 오포(吳苞)ㆍ오국(吳國)의 장융(張融) 등도 모두 몸을 던지고 발길을 이어, 그에게 불경을 자문 받았다.
그 후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가 생각하였다.
“서현사(栖玄寺)는 선왕이 시작해서 지은 절이지만, 이 절은 인간세계 밖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승원을 그곳에 거처하게 하고자, 정중하게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제(齊)의 태조(太祖)황제가 제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산에 들어와 승원을 찾았다. 그러나 승원은 늙고 병들어, 발을 걸상 아래로 드리울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태조황제는 몸소 스스로 예를 낮추어 방문하여, 소상하게 자문 받았다.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기에 이르자, 다시 제왕의 가마가 행차하여 곧 승원의 방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승원의 방과 불전이 협소하여 큰 가마 덮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조황제가 승원을 만나고자 하였다. 승원은 지조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태조는 사람을 보내 눕고 일어나는 근황을 물어본 다음에야, 발길을 돌려 절을 떠났다. 그렇지만 승원은 일찍이 한번도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병으로 눕자 문혜왕(文惠王)ㆍ문선왕(文宣王)이 스승의 예를 갖추어 받들며, 자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당시의 귀족 공경대부와 선비들도 찾아가고 돌아오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승원은 50여 년을 푸성귀를 먹으며, 일관하여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셨다. 마음은 법의 뜨락에서 노닐고, 멀리 인간 세계 밖을 생각하였다. 높이 산문을 걸어 다니면서,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았다.
제의 영명(永明) 2년(484) 정월에 정림상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1세이다. 황제는 사문 법헌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원 스승[和尙]이 세상을 떠난 것을, 나는 밤중에 이미 나름대로 알았다. 승원 스승이 이번 간 곳은 매우 좋은 곳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다시 더 슬퍼할 일이 없다. 늦게나마 한두 번 법사를 만나서, 비로소 상서로운 꿈을 막 펼치려 하였다. 지금은 바로 그를 위하여 공덕을 지어야 할 때이다. 필요한 물건은 자세히 상소문에 갖추어 보내는 것이 좋겠다.”

또 경릉(竟陵)의 문선왕(文宣王)도 편지를 보냈다.
“승원 법사는 일대의 명덕으로 뜻과 절개가 맑고 높았다. 산에 숨어 아름다움을 심어 사해가 그의 도풍을 맛보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람되게 스승으로 모시는 은혜를 입었다. 바야흐로 우러러 어진 교화를 물어보고, 번뇌의 생각을 씻어내고자 하였다. 뜻밖에 이번 병으로 갑자기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셨으니, 비통한 마음을 너무나 참을 수가 없구나.
승원 스승[和尙]은 일과 행실이 원만히 통하여, 오랜 겁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드문 분이다. 나는 그 분이 남긴 형체와 그림자의 자취를, 대중 승려의 묘 가운데 섞어 안치하고 싶지 않다. 따로 다른 땅을 점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바야흐로 사찰을 세워 그 기이함을 표시하고, 돌에 새겨 공덕을 빛내야 마땅하다.”
이에 곧 산의 남쪽에 분묘를 경영해 조성하고,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태위(太尉) 낭야왕(瑯琊王) 유검(劉儉)이 비문을 지었다.

∙법령(法令)ㆍ혜태(慧泰)
당시 정림상사의 법령ㆍ혜태가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승원의 명성을 이어갔다.

11)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다. 본래는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으로,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가 피난 와서 양양(襄陽)에 깃들어 살면서, 대대로 으뜸가는 족속이 되었다. 승혜는 어려서 출가하여 형주(荊州)의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담순(曇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담순은 여산 혜원(慧遠)의 제자로서 본래부터 높은 명성이 있었다. 승혜는 그를 받든 이후로 교리의 이해에 마음을 오로지했다. 나이 25세에 이르자 『열반경』ㆍ『법화경』ㆍ『십주론(十住論)』ㆍ『유마경』ㆍ『잡심론(雜心論)』 등을 강의할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뛰어나며, 도강(都講)의 자리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문구를 가려내 분석하여, 펼쳐내는 말은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또한 『노자』와 『장자』를 잘하여 불교를 위한 스승으로 삼았다. 덕이 높은 선비인 남양(南陽)의 종병(宗炳)ㆍ유규(劉虯) 등과도 친구로서 좋은 사귐이 있었다. 종병은 늘 찬탄하였다.
“서하(西夏)에 법륜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아마도 승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도 서쪽 나라를 지나며 노닐었다. 곧 승혜를 찾아가 사귀기를 청하였다.
제(齊)나라 초기에 칙령으로 형주(荊州)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고상한 풍모가 빼어났다. 또한 도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데 협조하여 도운 공 때문에, 멀고 가까운 곳에 명망이 있었다. 노쇠하자 항상 가마를 타고 강석을 찾아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그를 대머리 관리[禿頭官家]라 불렀다. 현창(玄暢) 법사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들을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 말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혜창(慧敞)
그 후 혜창도 지조가 본래 곧고 반듯하였다. 승혜를 대신하여 승주(僧主)가 되어, 계속 공덕의 효능이 있었다.

∙승수(僧岫)
승혜의 제자 승수도 역시 배움으로 드러났다. 정진에 힘쓰다가, 피와 관련한 질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12) 석승유(釋僧柔)
승유의 성은 도(陶)씨이며, 단양(丹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고결하여 티끌세상을 벗어날 지조가 있었다. 아홉 살에 숙부를 따라 유학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나물밥ㆍ콩국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두터운 뜻은 더욱 견고하여, 곤궁함 속에 살아도 뜻을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출가하여 홍칭(弘稱)의 제자가 되었다. 홍칭은 성이 여(呂)씨이며, 낙양 임위(臨渭) 사람이다. 그의 배움은 경론에 뛰어나,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났다. 승유는 그를 받든 이후로 곧 계율에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선정과 지혜도 자세히 힘썼다. 대승의 많은 경전과 대승ㆍ소승의 모든 책의 그윽한 근원을 철저히 비추어 보고, 가르침의 요체를 다 꿰뚫었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자 곧 강석에 올랐다. 한 시대의 이름난 유생들이 모두 몸을 던져 북쪽으로 얼굴을 두어 바라봤다. 그 후 동쪽 우혈(禹穴:會稽)로 노닐다가 혜기(慧基) 법사를 만났다. 그의 초청으로 성방사(城傍寺)에 머물면서 하안거 내내 강론하였다.
그 후 섬주(剡州)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들어갔다. 그가 아직 그곳에 이르지 않은 날 밤에, 승서(僧緖)라는 사문이 꿈에 신인(神人)을 만났다. 붉은 깃발과 흰 갑옷을 입은 신장이 산에 가득히 나왔다. 이에 승서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신인이 대답했다.
“법사가 곧 이곳에 들어오기 때문에, 나와서 받들어 맞이하는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승유가 그곳에 이르렀다.
이윽고 그는 그곳의 산문을 쓸고 꾸며, 거기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경전을 부양하고 학문을 따르려는 선비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이 모였다.

제(齊)의 태조황제가 창업한 첫날과 세조(世祖)황제가 황제자리를 이어받던 날, 모두 사찰을 건립하고, 한편으로 교리를 전공한 승려를 구하였다. 승유가 나이가 많고 평소 세상에 알려져 있으므로, 부르는 편지가 해마다 이르렀다.
문선왕(文宣王) 등 여러 왕족들도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마침내 다시 서울로 나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몸소 우두머리가 되자, 사방 먼 곳에서도 흠모하고 감복하며 사람과 신마저 찬미하였다. 문혜왕(文慧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그를 받들어 입실제자가 되었다.
승유는 덕을 지니고 종사의 자리에 올라, 이를 맡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안양정토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매양 퇴임관리들이 죽었다는 소식[西次]을 접할 때마다, 곧 얼굴을 찡그리고 합장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몸에 병이 없었다.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하였다.
“나는 아마도 떠날 것이다.”
이어 땅에 자리를 깔고, 서쪽을 향해서 경건하게 절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제(齊)의 연흥 1년(494)이다. 그때 나이는 64세이다. 곧 산의 남쪽에 묻었다.

사문 승우(僧祐)는 승유와 어릴 때 산에서 자라, 함께 긴 세월을 머물렀다. 자주 도가 깃든 마음에 고개 숙이고 미리 불법의 맛에 참여한 이이다. 그가 승유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세웠다. 동완(東莞)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승유의 제자 승소(僧紹)도 역시 곧고 바르며 학업이 있었다.

∙승발(僧拔)ㆍ혜의(慧熙)
당시 종산(鍾山)의 산자정사(山茨精舍)에는 승발과 혜의가 있었다. 모두 어린 나이에 빼어나게 나아가서, 어려서부터 높은 명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에 나아가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승발은 『칠현론(七玄論)』을 지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13) 석혜기(釋慧基)
혜기의 성은 우(偶)씨이며, 오(吳)나라 전당(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빼어나고, 기민한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을 넘어섰다. 처음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 법사에게 의지하여 따랐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혜의 법사는 그의 정신과 풍채를 아름답게 여겼다. 전송의 문제(文帝)에게 계(啓)를 올려 도첩(度牒)을 구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문제가 그를 불러 보고 좌우에 물어 보고는 좋다고 여겼다. 곧 기원사에 명령하여 그를 위한 법회를 열어 출가하게 하였다. 황제의 가마가 친히 행차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혜기는 이미 뜻을 법문에 두었으므로, 수행에 힘쓰는 것이 정성되고 간절하였다. 새벽에서 밤까지 아울러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경전을 환히 해득하였다.
그 후 서역의 법사인 승가발마(僧伽跋摩)가 선(禪)과 율(律)을 널리 돕고자 송나라 경내에 찾아왔다. 이에 혜의 법사가 혜기에게 명령하여, 그의 입실제자가 되어 공양하고 섬기게 하였다.

나이 만 20세가 되자 채주(蔡州)로 건너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때 승가발마가 혜기에게 말하였다.
“너는 곧 강남 지방의 도의 왕[道王]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서울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에 4ㆍ5년간을 강석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법사들을 두루 방문하였다. 『소품경』ㆍ『법화경』ㆍ『사익경』ㆍ『유마경』ㆍ『금강반야경』ㆍ『승만경』 등에 빼어났다. 그 현묘한 진리를 생각하고 탐구하여, 그윽하게 엉킨 진리를 투철하게 비춰 보았다. 문장을 제시하고 문구를 비교함에, 그 아름다움이 옛날을 뛰어넘었다.
혜기의 스승인 혜의는 이미 덕이 있어, 사람들의 종사 자리에 있었다. 형주(荊州) 땅의 도의 왕[道王]이라서, 선비와 서민들이 귀의하였다. 이롭게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분분히 모여들었다. 그는 혜기의 아름다운 덕이 칭찬할 만하다 하여, 곧 손잡고 함께 생활하였다.

혜의 법사가 죽은 뒤에 이르러, 생활을 뒷받침하는 여러 물건들이 거의 백만 냥에 가까웠다. 혜기는 법으로 보아 마땅히 그 절반을 얻었지만, 모두 복을 위하여 희사하였다. 오직 더럽고 낡은 옷과 그릇만을 취하여,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전당(錢塘)의 현명사(顯明寺)에 머물다가,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산음(山陰)의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학문을 숭상하는 학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와서 도를 물었다. 이에 삼오(三吳)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 그러니 학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영접하려고 초청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비로소 길을 떠나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다시 병이 도져서 돌아왔다.
이어 회계(會稽) 구산(龜山)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웠다. 손수 벽돌을 포개고 자신이 공사를 지휘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나무를 걸쳐서 험한 지세를 타고 지으니, 산의 형상을 더욱 지극하게 하였다. 처음에 3층으로 세웠다. 그러나 장인의 솜씨가 조금 서툴러서 뒤에 하늘의 벼락을 맞아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곳에 다시 보수를 가하고 꾸며서, 마침내 그 곱고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혜기는 일찍이 꿈에 보현보살을 만나, 보현보살에게 스승[和上]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절이 준공된 뒤에 이르러, 보현보살상과 아울러 여섯 이빨 난 하얀 코끼리의 형상을 조성하였다. 곧 보림정사에서 21일간의 참회하는 재를 마련하였다. 선비와 서민이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이 모여들어, 헌납하고 봉양하는 것이 뒤를 이었다.
그 후 주옹(周顒)이 섬주(剡州)를 다스리자, 혜기를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주옹은 본래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불교 교리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혜기를 만나 찾고 파헤치자, 날로 새롭고 남다름이 있었다.

유헌(劉瓛)ㆍ장융(張融)도 나란히 스승의 예로 섬기고, 교리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도 그의 도풍을 흠모하고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정중한 편지를 보내, 『법화경』의 근본 되는 가르침을 물었다.
이에 혜기는 곧 세 권의 『법화의소(法華義疏)』를 지었다. 『문훈의서(門訓義序)』 33과(科)를 짓는데 이르러서는, 간략하게 방편의 가르침을 펼쳐 서술하였다. 공(空)ㆍ유(有)라는 두 말을 회통하였다. 그리고 『유교경(遺敎徑)』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혜기의 덕이 이미 삼오(三吳) 지방을 덮고, 명성이 나라 안에 치달렸다. 그러자 곧 황제의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어 10성(城)을 맡았다. 이것이 곧 우리 동쪽 나라에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시초였다.
이에 그는 조용히 강의하고 이끌면서, 선정과 지혜를 가르쳐 힘쓰게 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에서도 그의 도풍을 따랐다. 오부대중이 귀의하고 복종하였다.
혜기는 성품이 매서우면서도 따뜻하고, 기개는 맑으면서도 온화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인으로 참여한 사람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齊)의 건무(建武) 3년(496) 11월에 성방사(城傍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5세이다.
처음 혜기가 병으로 눕자, 제자의 꿈에 몇 사람의 범승(梵僧)이 섬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대승국(大乘國)에서 혜기 스승[和尙]을 받들어 맞이하기 위해서 왔다.”
그 후 며칠 만에 혜기가 죽었다. 법화산 남쪽에 묻었다. 특진관(特進官)인 여산(廬山)의 하윤(何胤)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보림사에서 지어, 그의 남긴 덕을 새겼다.

∙승행(僧行)ㆍ혜욱(慧旭)ㆍ도회(道恢)
혜기의 제자인 승행ㆍ혜욱ㆍ도회 등도 모두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다. 차례로 강론을 부양하여 각기 문도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법도가 남긴 앞 자취를 이어갔다.

∙혜영(慧永)
그 후 사문 혜량(慧諒)이 승정의 임무를 이어받아 관장하였다. 혜량이 죽은 후에는 사문 혜영이 이었다. 혜영은 고상한 풍모가 아름답고 청아하였다. 또한 덕스런 행실이 맑고 엄숙했다. 그리하여 많은 경전을 마음대로 요리하여, 당시 강설의 임무를 맡았다.

∙혜심(慧深)ㆍ법홍(法洪)
혜영의 뒤로는 사문 혜심이 승정이 되었다. 그 역시 혜기의 제자이다. 혜심은 동학인 법홍(法洪)과 더불어 모두 맑게 계율을 지킨다고 존중받았다. 혜심의 뒤로는 사문 담흥(曇興)이 승정이 되었다. 그도 침착하게 살피는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

14) 석혜차(釋慧次)
혜차의 성은 윤(尹)씨이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지흠(志欽)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서주(徐州)의 법천(法遷)을 만났다. 법천은 당시 세상에서 이해력으로 꿰뚫었다. 지흠이 곧 혜차를 그에게 부탁하여, 법천을 따라가 남쪽 경구(京口)에 이르러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법천을 따라 팽성으로 돌아왔다. 비록 사미(沙彌)의 나이에 불과하였지만 배움을 다스림에 게으름이 없었다. 맑게 보는 것이 무리를 통하여 홀로 우뚝 빼어났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경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 이름이 서주 땅에 자자하였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자, 일과 지조가 더욱 깊어졌다. 자주 『성실론(成實論)』 및 3론을 강의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나와,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말기와 제나라의 초기(478~479)에 이르자, 덕에 귀의하는 이들이 점차 넓어졌다. 강석을 한 번 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갔다.
사문 지장(智藏)ㆍ승민(僧旻)ㆍ법운(法雲) 등은 모두 어린 나이에 준수하고 명랑하여, 지혜의 슬기로움이 천연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다. 모두 혜차를 찾아가 수업을 청하였다. 문혜왕(文慧王)ㆍ문선왕(文宣王)도 모두 스승의 예로 그를 공경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였다.
영명 8년(490)에 『백론(百論)』을 강의하다, 「파진품(破塵品)」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57세이다.

∙승보(僧寶)ㆍ승지(僧智)ㆍ법진(法珍)ㆍ승향(僧嚮)ㆍ승맹(僧猛)ㆍ법보(法寶)ㆍ혜연(慧淵)
당시 사사(謝寺)에는 또 승보ㆍ승지가 있고, 장락사(長樂寺)에는 법진ㆍ승향ㆍ승맹ㆍ법보ㆍ혜연 등이 있었다. 모두가 한 시대의 영명하고 현철한 인물들로, 당시 논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 석혜륭(釋慧隆)
혜륭의 성은 성(成)씨이며, 양평(陽平)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 배움에 스승과 벗이 없었지만, 우뚝하게 스스로 깨달았다. 나이 스물세 살에 비로소 출가하였다. 십여 년 동안 마음을 불법에 집중시켜 수많은 경전을 뛰어나게 꿰뚫었다. 전송의 태시 연간(465~471)에 서울로 나와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혜륭은 이미 생각이 말의 테두리 밖에 사무쳤다. 맑은 논의를 잘해, 기회를 타서 대항하고 견주었다. 한 번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의 경계를 꺾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초청하여 상궁사(湘宮寺)에서 『성실론』을 개강하니, 책을 걸머지고 도를 묻는 사람이 8백여 명이었다.

그 후에도 왕후(王候) 귀족들이 여러 번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옛날의 여러 논리에서 그 자리를 맴돌며 막혀 있던 곳을, 혜륭은 다시 밝혀내서 열고 펼쳐, 환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그는 참다운 법으로 번뇌를 끊는 이해[實法斷結義] 등을 세웠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은 그를 지목하여 말하였다.
“혜륭은 조용하고 한가하여 오싹하고 성근 것이, 마치 서리 아래에 서 있는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2세이다.

∙지탄(智誕)
당시 강서(江西)에 지탄이 있었다. 역시 경론에 빼어나 혜륭과 덕이 비등하고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각기 이름을 양자강의 두 언덕에서 날렸다.

∙승변(僧辯)ㆍ승현(僧賢)ㆍ도혜(道慧)ㆍ법도(法度)
당시 하원사에는 또 승변ㆍ승현ㆍ도혜ㆍ법도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공업이 칭찬할 만하였다.

16) 석승종(釋僧宗)
승종의 성은 엄(嚴)씨이며, 본래 옹주(雍州)ㆍ빙익(憑翌) 사람이다. 진(晋)나라가 망하고 어지러워지자, 그의 4대 조부가 진군(秦郡)으로 옮겨 살았다. 아홉 살 때 도원(道瑗)의 제자가 되어, 지혜의 일을 묻고 들었다. 나중에 다시 도빈(道斌)ㆍ승제(僧濟) 두 법사에게서 도를 전수받았다.
『대열반경』 및 『승만경』ㆍ『유마경』 등에 빼어났다. 강설을 베풀 때마다, 듣는 사람이 거의 천여 명에 가까웠다. 미묘한 말솜씨는 다함이 없고, 임기응변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에 맡겨 방탕하여, 자주 의식 법규를 뛰어넘어 마음에 들면 곧 행하는 등 구애받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고 절조를 오로지 지키는 사람들 모두가 옳고 그르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문혜태자는 곧 죄를 물어 쫓아내서 다른 곳으로 추방하려 하였다. 그러나 꿈을 통하여 감응이 있어, 이에 생각을 고쳐 그에게 귀의하였다.
북위(北魏)의 황제 원굉(元宏, 471~499)은 멀리서 그의 덕스런 풍모에 고개 숙였다. 여러 번 편지를 보내고는 초청하여 개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齊)의 태조(太祖)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승종은 『열반경』ㆍ『유마경』ㆍ『승만경』 등의 강론을 거의 백 번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그를 따라 찾아오는 신도들의 보시로 태창사(太昌寺)를 지어 그곳에 머물렀다.
건무(建武) 3년(496) 머무르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9세이다.

∙담준(曇准)ㆍ법신(法身)ㆍ법진(法眞)
이에 앞서 북쪽 나라의 담준 법사가 승종이 특히 『열반경』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곧 남쪽으로 노닐어 그의 강론을 보고 들었다. 그러나 이미 남쪽과 북쪽은 사정이 다르고,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곧 따로 다시 강의하여 많은 북쪽 선비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 후 담준은 상궁사(湘宮寺)에 거처하면서, 같은 절의 법신ㆍ법진과 더불어 당시의 종사가 되었다.

∙혜령(慧令)ㆍ법선(法仙)ㆍ법최(法最)ㆍ승경(僧敬)ㆍ도문(道文)ㆍ승현(僧賢)
당시 안락사(安樂寺)에는 혜령ㆍ법선ㆍ법최 등이 있고, 중흥사(中興寺)에는 승경ㆍ도문이 있으며, 천축사(天竺寺)에는 승현이 있었다. 모두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나, 나라[上國]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17) 석법안(釋法安)
법안의 성은 필(畢)씨이며, 동평(東平) 사람이다. 위(魏)의 사예(司隸) 교위(校尉) 필궤(畢軌)의 후예이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의 혜광(慧光)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혜광은 어려서부터 시원하게 빼어나고, 내외의 학문에 두루 뛰어나, 이치를 참구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법안은 사미의 나이에 있었으나, 곧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났다. 당시 장영(張永)이 도빈(道斌) 법사를 초청하여 강설을 청하였다. 아울러 몸을 굽혀 이름난 학자를 불렀다. 이때 장영이 도빈에게 물었다.
“서울에 다시 탁월한 젊은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도빈이 대답하였다
“사미인 도혜(道慧)ㆍ법안(法安)ㆍ승발(僧拔)ㆍ혜희(慧熙)가 있습니다.”

장영은 곧 요청하여 도혜에게 『열반경』 강의를 되뇌게 하고, 법안에게 『불성론(佛性論)』을 진술하게 하였다. 신색이 여유로워 서두부터 쏟아 내림에 남김이 없었다. 장영이 물어보았다.
“나이가 몇 살이냐?”
도혜는 열아홉 살이라고 대답하고, 법안은 열여덟 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장영은 이에 감탄하였다.
“예전에 부풍(扶風)의 주발(朱勃)이 열두 살에 책을 읽고 시를 읊어, 당시 사람들이 재간둥이라고 불렀다. 오늘 이 두 도인은 이해력이 뛰어난 소년들인, 의소(義少)라 할 만하다.”
이에 그들의 명성이 서울 조정에 밝혀져,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흘러갔다. 그 후 서른 살에 이르자, 전문적으로 법을 강의하는 자리를 맡았다.

왕승건(王僧虔)이 외지로 나가 상주(湘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함께 동행하였다.
그 후 남쪽 번우(番禹)로 옮겼다. 바로 승유(僧攸)의 『열반경』 강의를 만났다. 법안이 그와 몇 번 묻고 논의하니, 승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여 법석을 양보하였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 법사를 서로 이어갔다. 그러다가 영명 연간(483~493)에 서울로 돌아와,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열반경』ㆍ『유마경』ㆍ『십지론』ㆍ『성실론』 등을 강의하여, 끊임없이 강설을 이어갔다. 사도(司徒) 문선왕(文宣王)과 장융(張融)ㆍ하윤(何胤)ㆍ유회(劉繪)ㆍ유헌(劉瓛) 등이 모두 그의 글과 논리에 마음으로 복종하여 함께 법의 친구가 되었다.
영태 1년(498) 중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45세이다. 그는 『유마경』과 『십지론』의 의소(義疏)를 짓고, 아울러 『승전(僧傳)』 다섯 권을 지었다.

∙경도(敬道)ㆍ광찬(光贊)ㆍ혜도(慧韜)ㆍ도종(道宗)
당시 영기사(靈基寺)에는 경도ㆍ광찬ㆍ혜도가 있고, 와관사(瓦官寺)에는 도종이 있었다. 이들 역시 당시의 이름난 인물들로 배우는 이들이 사모하였다.

18) 석승인(釋僧印)
승인의 성은 주(朱)씨이며, 수춘(壽春)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음이 침착하고 소상하여, 고행을 편안히 여기며 배움에 힘썼다. 처음 팽성(彭城)에 노닐며, 담도(曇度)로부터 3론을 전수받았다. 담도는 이미 한 시대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사방 먼 곳에서 그에게 의지하여 모여들었다. 승인은 그의 가르침을 받고 맛보며 닦아서, 그윽이 깊은 뜻을 궁구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나아가서 혜룡(慧龍)으로부터 『법화경』을 묻고 전수받았다. 혜룡도 역시 당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 『법화경』의 종지를 전파하였다. 승인은 유달리 공부를 구축함에 철저하여, 홀로 새롭고 특이한 것을 표출하였다. 이에 동쪽 서울로 가서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이에 다시 『열반경』과 그 밖의 경전에 관하여 생각을 다져나갔다.
전송의 대명 연간(457~464)에 징군(徵君) 하점(何點)이 승려들을 초대하였다. 큰 집회를 열고 승인을 초청하여 강사로 삼았다. 강설을 듣는 사람이 7백여 명이었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과 동해의 서효사(徐孝嗣)도 나란히 그의 고상한 풍모에 고개 숙여 공경하며, 여러 번 불러서 강설을 요청하였다.

승인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엄격하며, 품성이 화목하였다. 용서하는 마음을 머금고 인욕에 안주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당시 기백을 뽐내는 무리들이 질문하고 논의하는 도중에, 혹 멋대로 비웃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승인은 정신과 풍채가 평안하여, 한 번도 생각이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었다. 비록 배움에서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지만, 특히 『법화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화경』의 강의를 모두 252차례나 두루 강의하였다.
제(齊)의 영원(永元) 1년(499)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19) 석법도(釋法度)
법도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쪽 나라에 유학하면서, 두루 많은 경전을 종합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간절한 절조를 이루기를 힘썼다.
전송의 말기에는 서울을 노닐었다. 덕이 높은 선비인 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는 인간 세상 밖에 자취를 드높여, 낭야(瑯琊)의 섭산(聶山)에 은거하였다. 법도의 맑고 아름다운 정신에 고개 숙여, 스승과 벗으로 공경하는 대접을 하였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산을 희사하여 서하정사(栖霞精舍)라 하고, 법도를 초청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사들이 절 땅을 도관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던 사람은 곧 죽어 버렸다. 그 후 절이 되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무서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법도가 그곳에 머무른 후로는 뭇 요망한 일들이 모두 멎었다.

그곳에 머문 지 일년 가량 지났을 무렵이다. 갑자기 사람과 말과 나팔과 북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명함을 적은 종이를 건네어 법도에게 성명을 통하면서, 자기는 근상(靳尙)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법도가 앞으로 나아갔다. 근상은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보좌하는 사람들도 매우 엄숙하였다. 그는 공경을 표시한 다음 이어 말하였다.
“제자는 이 산의 왕으로 산을 소유한 지 7백여 년입니다. 신의 길에도 법이 있어, 남들이 함부로 간여하여서는 안 됩니다. 전에 이곳에 기탁하여 깃들던 여러 사람들은, 혹 참되고 올바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과 병이 이어졌으니, 그것 역시 그들의 운명입니다. 법사께서는 귀의할 만한 도와 덕을 갖추신 분입니다. 삼가 이 산을 희사하여 받들어 공급하겠습니다. 아울러 5계를 받기를 원하오니, 길이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이에 법도가 말하였다.
“사람과 신은 길이 다르니, 서로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시주께서는 피 흘리는 음식으로 세간의 제사를 받는 몸입니다. 이것은 5계에서 가장 금지하는 일입니다.”
근상이 말하였다.
“만약 문도들을 정비하면, 곧 먼저 살생을 없애겠습니다.”
이에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튿날 아침 법도가 보니, 어떤 사람이 돈 1만 냥과 향ㆍ초ㆍ작은 칼 등을 보내왔다. 설명서에 쓰여 있었다.
“제자 근상이 받들어 공양드립니다.”

그 달 보름날에 이르러, 법도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근상이 다시 찾아왔다. 대중들과 함께 예배하고 행도하면서 계를 받고는 떠났다.
섭산의 사당을 지키는 무당의 꿈에 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이미 법도 법사에게서 계를 받았으니, 나의 제사에는 생명을 죽인 희생물을 올리지 말아라.”
이로 말미암아 이 사당에서 신에게 음식을 올릴 때는, 오직 채소와 말린 포만을 쓰는 데 그쳤다.
어느 날 법도는 움직임이 흐트러지면서, 땅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근상이 밖에서 찾아와서, 손으로 머리와 발을 쓰다듬어 주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다시 유리 병 하나를 지니고 왔다. 병 속에는 물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것을 법도에게 바쳤다. 그 물은 맛이 달고 차가웠다. 이것을 마시니 법도의 괴롭던 곳이 사라졌다. 신이 감응해 보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법소(法紹)
당시 사문 법소(法紹)가 일이 맑고 고행하여, 명성을 법도와 가지런히 하였다. 그러면서 배움과 이해는 법도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북산이성(北山二聖)이라고 불렀다.
법소는 본래 파서(巴西) 사람이다. 여남(汝南)의 주옹(周顒)이 성도를 떠나자, 함께 내려와 산자정사(山茨精舍)에 머물렀다.
법도는 법소와 더불어 제(齊)의 경릉왕(竟陵王) 자양(子良)과 시안왕(始安王) 요광(遙光)으로부터 공손히 스승의 예로 모시는 대우를 받았고, 네 가지 공양물을 자급 받았다. 법도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 까닭에, 유달리 『무량수불경(無量壽佛徑)』을 강의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산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4세이다.

∙승랑(僧朗)
법도의 제자 승랑이 돌아가신 스승의 발길을 이어, 다시 산사(山寺)의 기강을 세웠다. 승랑은 본래 요동(遼東)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생각하는 힘이 두루 해박하였다. 모든 경전과 율장을 강설하는 데 뛰어났다. 『화엄경』과 3론에서는 가장 대가(大家)의 자리에 있었다. 금상폐하(今上陛下)께서 깊이 그릇이라 보고 존중하여, 모든 불교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에게 명령하여 그 산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혜개(慧開)
당시 팽성사(彭城寺)의 혜개는 어려서부터 정신과 기개가 높고 밝으며, 지조와 배움이 매우 깊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명예로운 이름이 드러나고, 서른 살이 되자 곧 강설하였다.

∙법개(法開)ㆍ승소(僧紹)
또 여항현(杭縣)의 법개도 맑고 시원한 성품이 빼어나며, 담론에 뛰어났다. 서울로 나와 선강사(禪岡寺)에 머물렀다. 같은 절의 승소와 더불어 당시 세상에 알려졌다.

20) 석지수(釋智秀)
지수의 성은 구(裘)씨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깃들어 살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찌감치 출가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양친이 사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비밀리에 혼인할 곳을 구하였다. 곧 결혼할 날이 다가오자, 지수는 마침내 샛길로 피하여 달아났다. 장산(蔣山)의 영요사(靈耀寺)에 몸을 던져,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차자, 일과 지조가 더욱 굳어졌다. 많은 스승을 찾아가 묻고 배우며, 새롭고 특이한 것을 찾아 점검하였다. 이에 대승ㆍ소승에 아울러 밝고 논리를 따지는데도 정밀하고 익숙하였다. 게다가 『대반열반경』ㆍ『소열반경』ㆍ『유마경』ㆍ『반야경』에 빼어났다. 한번 강설의 자리를 건립하면, 곧 왕후와 귀족들의 가마들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책 보따리를 진 사람들도 어깨를 밀치며 찾아왔다.
사람됨이 정신과 풍채가 세밀하고, 생각은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문구의 그윽이 숨겨진 것을 모두 보고 펼쳐 해석하였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의 초기에 치성사(治城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3세이다. 장례를 치르던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와, 거리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선비와 서민들은 슬픔을 머금어 영예와 애도로써 예를 갖추었다.

∙승약(僧若)ㆍ도승(道乘)ㆍ승선(僧璿)
당시 치성사에 또 승약ㆍ도승이 있었다. 도승은 당시에 높은 명성이 알려졌다. 승약은 그의 형인 승선(僧璿)과 더불어, 나란히 모든 경전과 경전 외의 다른 고전에도 빼어났다. 승약은 『법화경』을 외웠으며, 초서ㆍ예서에도 솜씨가 있었다. 후에 오(吳)나라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도승도 역시 뜻한 바 일에 밝고 민첩하였다. 그리고 특히 아비담에 빼어났다.

21) 석혜구(釋慧球)
혜구의 본래 성은 마(馬)씨이며, 부풍군(扶風郡) 사람이다. 대대로 높은 족속이었다. 열여섯 살 때 출가하여 형주(荊州)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도형(道馨)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스승의 훈계를 받아 이어서, 실천 수행함이 맑고도 맑았다.
그 후 상주(湘州)의 녹산사(麓山寺)로 들어가 선도(禪道)에 전업하였다. 얼마 후 동학인 혜도(慧度)와 함께 서울로 가서 경전을 묻고 찾았다. 그 후 다시 팽성사(彭城寺)로 가서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서른두 살에 이르자 다시 형주 땅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강사의 자리를 맡아, 강의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배우려는 승려들이 무리를 이루었으며, 형주ㆍ초(楚) 사이에서는 예전을 통틀어 최고라 일컬었다. 서하(西夏)의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서울의 승려들과 겨루어 형평을 이루게 한 것은 혜구의 힘이다.
중흥(中興) 원년(501)에 칙명으로 형주 땅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도운 공으로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천감(天監) 3년(504)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유명에 따라 시체를 소나무 아래에 뼈를 노출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차마 행하지 못하였다.

22) 석승성(釋僧盛)
승성의 본래 성은 하(何)씨이며, 건업(建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에 더하여 뜻한 학문에 발돋움하며 노력하였다. 마침내 크게 논리를 따지는 데 밝고, 아울러 많은 경전에 빼어났다. 강설에서는 당시의 으뜸가는 강사가 되었다.
또한 특히 불경 외의 고전에 정밀하게 뛰어나, 뭇 선비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학관의 모든 유생들이 항상 승성과 서로 몸을 맞대고 다녔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에 영요사(靈曜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50여 세이다.

∙법흔(法欣)ㆍ지창(智敞)ㆍ법경(法冏)ㆍ승호(僧護)ㆍ승소(僧韶)
당시 송희사(宋熙寺)에는 법흔이 있고, 연현사(延賢寺)에는 지창ㆍ법경이 있으며, 건원사(建元寺)에는 승호ㆍ승소가 있었다. 모두 덕이 비등하여 명성을 함께 하였다. 법흔과 지창은 모두 경론에 빼어나고, 법경은 율부에 정밀하게 뛰어나며, 승소ㆍ승호는 아비담으로 저명하였다.

23) 석지순(釋智順)
지순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낭야(瑯琊)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종산(鍾山) 연현사(延賢寺)의 지도(智度)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두터운 지조가 보통 사람을 넘었다. 비록 사미의 나이에 있었지만, 배움의 공덕은 이미 쌓여 있었다. 구족계를 받자 금하는 계율을 따름에 흠집이 없었다. 뭇 경전을 도야하고 연마하면서, 『열반경』과 『성실론』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강설할 때는 문도 대중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한번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자못 좌절을 이룬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곧고 결백함이 확연하여 그의 아름다움에는 오점이 없었다.
제(齊)나라의 경릉(竟陵) 문선왕은 특히 깊이 남다른 예우를 하였다. 그를 위하여 치성사(治城寺)를 수축하여서 머물렀다.
사공(司空)인 서효사(徐孝嗣)도 역시 그의 행실과 깨우침을 숭배하였다. 스승으로 받들어 공경하였다.
동혼왕(東昏王)이 덕망을 잃으면서 서효사는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서곤(徐緄)은 도망쳐서 화를 피하였다. 지순이 몸소 그를 보호하여 끝내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서곤은 거듭 자품과 녹봉을 더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밤에 도적이 지순의 물건을 훔친 일이 있었다. 청소부가 뒤쫓아 가서 이를 사로잡았다. 지순은 도적을 자기 방안에 유숙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돈과 비단을 주며 타일러서 보냈다. 그의 어진 마음의 흡족함과 용서하는 마음의 두터움이 이와 같았다.
그 후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에 노닐다가, 운문정사(雲門精舍)에서 머물렀다. 그러니 법륜의 성대함을 다시 강남 지방에서 보게 되었다.

지순은 사람됨이 겸허하고 공손하며 삼갔다. 겉모습은 신과 같았으며, 법다운 풍모가 엄격하여 움직임에 조금도 일에 실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선비와 서민들이 우러러보고 절하며,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천감(天監) 6년(507)에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1세이다.
처음 지순의 병이 심하여 여러 날 음식을 먹지 않다가 어느 때 중간에 끝나면서, 갑자기 재에 올린 음식을 찾았다. 제자인 담화(曇和)가 지순이 곡식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하여, 비밀히 반 홉의 쌀을 섞어 끓여서 이것을 지순에게 바쳤다. 지순은 목구멍으로 삼키다가 다시 토해냈다. 물을 찾아 말끔히 양치질을 하고는, 담화에게 말하였다.
“너는 영원히 운문정사를 떠나거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의 절조를 지키는 마음의 맑고 애씀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안에서 자못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또한 하늘을 가리는 닫집을 본 사람도 있었다.
유명에 따라 시신을 공지에 뼈를 드러내게 하여,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인들이 차마 이를 행하지 못하였다. 곧 절 옆에 묻고 제자 등이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앙(袁昻)이 비문을 짓고, 법화사의 혜거(慧擧)가 다시 묘지(墓誌)를 지었다. 지순이 지은 『법사찬(法事贊)』과 『수계홍법기(受戒弘法記)』 등의 기록은 모두 세상에 전한다.

24) 석보량(釋寶亮)
보량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선조는 동완(東莞)의 귀족이다. 진(晋)나라가 패배하자 동래(東萊)의 현현(弦縣)으로 피해왔다. 보량은 열두 살 때 출가하였다. 청주(靑州)의 도명(道明) 법사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도명도 역시 교리를 공부한 승려로 이름이 당세에 높았다. 보량은 학업에 나아가 오로지 정성을 모아,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문득 사방을 구경하며 널리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늘 가르치고 기름[訓育]에는 근본이 있어, 아직 인연에 얽매인 허물을 멀리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도명 법사가 말하였다.
“사문이 되어 속가를 떠나면, 널리 펼치는 일을 도리로 삼아야 한다. 어찌 이러한 사랑의 그물에 구애받아, 우리의 도가 동쪽나라에 행해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보량은 느껴 깨달아, 이로 인하여 나그네가 되어 떠돌았다.

스물한 살 때 서울에 이르러 중흥사에 머물렀다. 원찬(袁粲)이 한 번 만나보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명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주 보량을 만나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요즘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던 것을 들으니, 이 해가 저물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진주는 합포(合浦)에서 생산되었지만, 위(魏)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취하여 수레를 비추어 보았다. 구슬[和氏璧]은 한단(邯鄲)에서 있었지만, 진(秦)나라 임금이 청하여 나라를 빛나게 했다.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하여야 한다. 상인이 머무는 고을에서만 오로지 소유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학문의 명성이 조금씩 번성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맞았으나, 길이 막혀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하여 문을 닫고 홀로 거처하여, 선(禪)의 생각에 잠기며 강설을 그만두고 인사를 단절하였다.

경릉(竟陵)의 문선왕이 몸소 그가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초청해서 강사로 삼으려 하였다. 보량이 마지못하여 찾아갔다. 문선왕(文宣王)은 그의 발에 머리를 대고 공손히 절하고, 깨달음을 위한 사부대중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영미사(靈味寺)로 자리를 옮겨 쉬면서 많은 경전의 강설을 계속하니, 서울보다 더 성대하였다. 『대열반경』을 모두 여든네 차례, 『성실론』을 열네 차례, 『승만경(勝鬘徑)』을 마흔두 차례, 『유마경』을 스무 차례, 그 밖에 『대품경』ㆍ『소품경』을 열 차례, 『법화경』ㆍ『십지론』ㆍ『우바새계경(優婆塞戒徑)』ㆍ『무량수불경』ㆍ『수능엄경』ㆍ『유교경』ㆍ『미륵하생경』 등도 역시 열 차례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3천여 명이고, 묻고 배우는 문도들만도 항상 수백 명이 꽉 찼다.

보량은 마음이 시원하고 높으며, 우뚝한 기개가 씩씩하고 빼어났다. 경전의 장구를 열고 명하면[開章命句], 날카로운 언변이 종행하였다. 혹 질문과 논의가 있을 때나, 혹 미리 겹친 관문을 쌓아 두었다가도, 보량이 해석을 펴면 곧 종지를 깨달았다. 마치 얼음 녹듯이 풀려서 본래 쌓였던 의문을 잊었다.
금상폐하2)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자 정도를 높이고 숭앙하시어, 보량의 덕망이 시대의 여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자주 초청하여 담론하였다. 보량은 성품에 맡겨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늘 빈도(貧道)라고 자기를 호칭하였다. 주상께서는 비록 마음에 무언가 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신의 뛰어남에 고개를 숙이셨다.

천감(天監) 8년(509)에 처음으로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 10여 만 글자를 짓게 하였다. 주상께서 서문을 지어 말씀하셨다.
“말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말에 기여할 길이 없다. 말이란 곧 말의 허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말에 허물이 있으면, 말을 멈추는 것이 좋다. 말이 멎으면, 여러 가지 견해가 다투어 가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본분의 서원을 타고, 태어남에 의탁하시어, 자비의 힘을 나타내고 교화에 응하셨다.
문자를 떠나서 가르침을 마련하셨고, 심상(心相)을 잊음으로써 도에 통하셨다. 민옥(珉玉)으로 하여금 값을 다르게 하고, 경수(經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을 나누듯이, 여섯 외도들의 주장[六師]을 제어하고, 네 가지 거꾸로 된 것[四倒]을 멎게 하셨다. 여덟 가지 삿됨[八邪]을 되돌려, 하나의 맛[一味]으로 귀결시켰다.

세속 알음알이의 뿔을 꺾고 이상한 사람의 입을 막아, 진주를 구하려는 마음을 인도하고 코끼리를 살펴보는 눈을 열게 하였다[開觀象之目]. 불난 집[火宅]에서 불에 타죽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물결치는 바다[浪海]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렸다. 그런 까닭에 법의 비가 내리면서, 타죽어 가던 씨앗[燋種]이 꽃피는 일을 당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긴긴 밤이 새벽을 맞았으며, 가섭(迦葉) 존자의 울분을 일으키게 하여 진실로 정성스런 말을 토해내게 하였다. 비록 두 가지 보시[二施]가 앞에서 평등하고 5대(大)가 뒤에서 베풀어져서, 서른네 가지 질문이 들쑥날쑥 다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권유하고 인도하여 각기 그 사람의 뜻에 따라 대답하였다.
경론의 요점을 들어 올리면, 두 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불성론』은 그 본유의 근원을 열었고, 『열반경』은 그 극치로 돌아가는 종지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인연도 아니고 과보도 아니며,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교리는 온갖 착함보다도 높고, 일은 온갖 그릇됨을 단절하였다. 공하고도 공하여 그 진실한 끝을 헤아릴 수 없고, 그윽하고도 그윽하여 그 미묘한 출입구를 궁구할 수 없다. 스스로 덕이 고르고 평등하며, 마음이 더 이상 날 것이 없는 경지에 합치된 사람[心合無生]이 아니라면, 금으로 된 담장과 옥으로 된 방[金牆玉室]에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청주(靑州) 사문 석보량은 조화로운 기운이 상쾌하게 뛰어나고, 정신의 움직임은 우뚝 빼어나다. 어려서는 곧고 간절한 절조를 지키고, 장성해서는 불법의 진리에 안주하고, 늙어서는 더욱 독실하다. 늙은 나이에 다시 난 이빨은 쇠하지 않듯, 선각자의 글을 유통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니, 후배들과 뒤늦게 공부한 이들이 우러러 귀의하지 않음이 없다.

천감 8년(509) 5월 8일에 곧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대열반경의소』를 짓게 하여 9월 20일에 끝마쳤다. 이 책은 현미한 말을 빛나게 표현하고 정도를 찬양하였다. 이어진 고리가 이미 풀렸고 의심의 그물이 제거되었다. 조목의 흐름이 밝고 소상하여 요약된 말을 얻을 수 있다.
짐은 조용히 여가 있는 날에 곧 이 책을 보고자 한다. 잠시 몇 줄의 글을 써서, 이것으로 의소에 대한 기억[記莂]으로 삼으려 한다.”

보량은 그의 복덕으로 감응을 불러, 공양과 보시가 누적되었다. 그러나 돈을 저축하지 않는 성품이라서 모든 복업을 경영하였다. 몸이 죽은 뒤에, 그의 방에 남겨진 재물은 없었다.
천감 8년(509) 10월 4일에 영미사(靈味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6세이다. 종산(鍾山) 남쪽에 묻고, 묘소에 비를 세웠다. 진군(陳郡)의 주흥사(周興嗣)와 광릉의 고상(高爽)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또 제자 법운(法雲) 등이 절 안에 비를 세우고, 문선왕(文宣王)이 보홍사(普弘寺)에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승성(僧成)ㆍ승보(僧寶)
당시 고좌사(高座寺)의 승성과 광야사(曠野寺)의 승보도 또한 모두 제(齊)나라의 강사이다. 승보는 또한 삼현(三玄)에 뛰어나 귀족들이 존중하였다.

25) 석법통(釋法通)
법통의 본래 성은 저(褚)씨이며, 하남(河南) 양적(陽翟) 사람이다. 진(晋)의 안동장군(安東將軍)이자 양주도독(楊州都督)이었던 저략(褚䂮)의 8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의관과 예의를 이어받았다.
법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슬기로워 무리에서 빼어났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떠돌아 다녔다. 삼장을 배우고 대승의 경전에 오로지 정성을 모았다. 『대품경』과 『법화경』에 더욱 깊은 연구가 있었다.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사가 되었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반드시 찾아왔다.
그 후 그의 발길로 서울의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다가, 그 후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쉬었다. 한가롭게 살면서 숨은 것을 찾고, 도의 실천에만 오직 노력하였다. 그의 도풍을 바라고 그의 그림자에 붙으려는 사람들이, 다시 산의 방에 가득하였다.
제(齊)의 경릉(竟陵) 문선왕과 승상 문헌왕(文獻王)은 모두 자신의 귀한 신분을 굽혀, 그의 덕을 사모하여 친히 이마를 조아려 예를 받들었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ㆍ오국(吳國)의 육고(陸杲)ㆍ심양(潯陽)의 장효수(張孝秀) 등도 모두 걸음을 산문에 채찍질하여, 그에게서 계법(戒法)을 받았다.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7천여 명이었다.
그가 종산(鍾山)의 언덕에 자취를 숨긴 지, 30여 년 동안 좌선(坐禪)과 염송으로 예참에 간절한 정성을 쏟았다.

천감(天監) 11년(512) 6월 10일 문득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바로 9월 20일까지만 살 따름이다.”
9월 14일에 이르자 두 사람의 거사(居士)가 나타났다. 모두 흰 털이개[白拂]3)를 잡고 책상 앞으로 나아가다가, 문득 차례로 밖으로 나갔다. 9월 17일에 이르자 문득 헛소리를 하였다.
“시주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디서 왔습니까?”
제자인 담지(曇智)가 그 말의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주홍빛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두건을 머리에 쓰고 나무상자를 받쳐 들고 걸상 앞에 엎드려 있구나.”
9월 20일에 이르자 불상이 두 줄을 지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법통은 한참 동안 합장을 하였다. 간병하는 사람들은 다만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을 뿐, 끝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에 법통은 비밀리 뜻을 같이하는 혜미(慧彌)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
21일에 이르자 향탕(香湯)을 찾아서 목욕을 마쳤다. 이어 예불을 하고 돌아와 누워서,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에 얹고 정오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절 남쪽에 장사지내고, 제자인 정심(靜深) 등이 비를 묘 옆에 세웠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와 난릉(蘭陵)의 소자운(蕭子雲)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지진(智進)
당시 정림상사(定林上寺)에는 또 사미인 지진이 있었다. 본래 환관(宦官:宮刑을 당한 사람)이었다. 맑은 믿음이 독실하여 마침내 출가하여 간절하게 절조를 지켰다. 어느 날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동산(東山)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자려 하였다. 호랑이가 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진이 단정하게 앉아 동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가 떠나갔다. 그 후로도 늘 홀로 걸어가거나 홀로 앉아 있을 때마다, 항상 푸른 말 한 필이 나타나 그의 좌우를 호위하였다.

26) 석혜집(釋慧集)
혜집의 본래 성은 전(錢)씨이며, 오흥(吳興)의 어잠(於潛) 사람이다. 18세 때 회계(會稽) 낙림산(樂林山)에서 출가하였다. 혜기(慧基) 법사를 따라다니며 수업하였다. 성품됨이 의젓하고 진실하여 화려한 비단처럼 수식하는 말이 없었다. 새벽에서 밤까지 배움에 부지런하여, 한 번도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그 후 서울로 나와서 초제사(招提寺)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다시 많은 스승들을 두루 찾아다녀, 다른 논설들을 융화하고 다스렸다. 삼장과 대승의 경전들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였다.
널리 대비바사(大毘婆沙) 및 『잡심론(雜心論)』ㆍ건도(揵度)4) 등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교정했다. 그런 까닭에 아비담(阿毘曇) 한 부에 있어서는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어려운 문제와 굳은 의문점은 모두 펼쳐 풀이하였다. 나라 안의 학문하는 손님들이 반드시 찾아오지 않음이 없었다. 한 번 개강할 때마다, 책을 걸머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사문 승민(僧旻)ㆍ법운(法雲) 등도 모두 명성이 한 시대에 높은 이들이다. 그들도 역시 책을 손에 잡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칭찬하고 접견하였다.
천감 14년(515)에 오정(吳程)에 돌아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0세이다. 『아비담대의소(阿毘曇大義疏)』 10여 만 글자를 지었다. 세상에서 성행한다.

27) 석담비(釋曇斐)
담비의 본래 성은 왕(王)씨이며, 회계의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혜기(慧基)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찍부터 잘 깨우친다는 일컬음으로 알려졌다. 대승의 깊은 경전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고, 노자와 장자ㆍ유교ㆍ묵자도 자못 많이 펴 보았다. 그 후 이쪽저쪽 찾아다니며 경론의 종지를 두루 궁구하였다. 고향 고을의 법화사(法華寺)에 자리 잡고 강설을 이어가니, 배우는 무리들이 줄을 이루었다.
담비는 마음이 상쾌하게 트였으며, 뜻으로 품은 것도 맑고 그윽하였다. 그런 까닭에 『소품경』과 『유마경』에서 더욱 독보적인 존재를 이루었다. 게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와 쌓아온 조예로 문장과 말재주가 높고 빛나서, 강석에서의 풍모로 당대의 존중을 받았다.

양(梁)나라 형양(衡陽)의 효왕(孝王)인 소원간(蕭元簡)과 은사(隱士)인 여강(廬江)의 하윤(何胤)도 모두 멀리서 그의 아름다운 계책에 고개 숙이고, 초청해서 강설하였다.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여남(汝南)의 주옹(周顒), 주옹의 아들 주사(周捨) 등도 모두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교를 맺었다.
천감(天監) 17년(518)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6세이다. 그가 지은 글과 문장은 자못 세상에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담비가 강남 지방에서 명성이 있다 하여, 칙명을 받아 10성(城)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임명장과 교지를 갖고 간 것을 엎드려 받기도 전에,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땅의 비구와 비구니들은 가슴 속에서 그의 덕을 그리워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법장(法藏)
담비와 같은 고을의 남암사(南巖寺)에 법장이 있었다. 그도 계율을 잘 지키고, 소박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왕성하게 생명을 놓아 살려주고 구조하였다. 또한 불화와 불상을 일으켜 세웠다.

∙명경(明慶)
당시 여요현(餘姚縣)에는 명경이 있었다. 담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명성이 있었다.
명경의 본래 성은 정(鄭)씨이다.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정결하며, 학업이 맑고 아름다웠다. 본래 승염(僧炎)에게 사사하다가, 다시 홍실(弘實)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스승과 제자 세 명 모두 동남 지방에서 존중을 받았다.

【論】이상을 통틀어 논하면 무릇 지극한 이치란 말이 없고, 그윽한 귀결점이란 아득하고 고요하다. 아득하고 고요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지고, 말이 없는 까닭에 말하는 길이 끊어진다. 말하는 길이 끊어질 때 말을 하면 그 참뜻을 다치고,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질 때 생각을 일으키면 그 참됨을 잃는다. 그런 까닭에 유마거사는 방장실(方丈室)에서 입을 다물고, 석가모니는 쌍수에서 침묵하셨다. 바야흐로 이치의 깊고 고요함을 아는 까닭에 성인들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만 멀고 먼 꿈의 경계는 진리와의 거리가 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꿈틀거리는 무리들[蠢蠢之徒]에게 가르침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길을 열어주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신령하고 미묘함을 빌려서 중생들에게 응하시고, 어둡고 고요함을 체득하여 신과 통하신다. 미묘한 말을 빌려 도로 가는 나루터로 삼고, 형상에 의지하여 진실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신다.
“병법이란 상서롭지 않은 도구이지만 어쩔 수 없어 이를 쓴다.5) 말이란 참된 물건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어 이를 베푼다.”
그러므로 처음 녹야원(鹿野苑)에서 4제(諦)로써 말의 시초로 삼기 시작하여, 마지막 곡림(鵠林)에서 3점(點:伊字三點)으로 원(圓)의 극치로 삼기에 이르신 것이다.

그 사이에 말과 문장을 펴신 수효는 8억을 넘어, 코끼리와 낙타가 업고 가도 다 하지 못하며, 용궁의 물이 넘치더라도 다하지 못한다. 장차 올가미를 빌려서 토끼를 잡고자 하고, 손가락에 기대서 달을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달을 알면 손가락은 치워야 하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야 한다.
경에서 ‘진리에 근거하고 말에 근거하지 말라[依義莫依語]’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교에 막혀 있는 사람들은 지극한 도란 경전의 편장(篇章)에서 극에 달한다 생각한다. 형상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법신을 장륙(丈六)의 불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모름지기 그윽하고 은미한 종지를 끝까지 통달하려면, 묘한 이치를 말의 테두리 밖에서 터득해야 한다[妙得言外]. 4무애변(無礙辯)으로 장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여, 이익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보이는 것은 법사에게 달려 있는 것이리라[示敎利熹其在法師乎].

그러므로 주사행(朱士行)은 경전을 우전국(于闐國)에서 찾아 서원하였다. 경이 불타지 않게 하여, 끝내 『반야경』으로 하여금 동쪽 낙수에서 성행케 하여, 생각조차 잊음[忘想]을 말세에 전하였다. 이어 차례로 축잠(竺潛)ㆍ지둔(支遁)ㆍ우란(于蘭)ㆍ법개(法開) 등은 모두 고상한 기개가 높고 빛나며 도의 풍모가 맑고 넉넉하여, 교화를 전한 아름다운 공덕 또한 버금갔다.
중간에 석도안(釋道安)이 제자로서 성스러운 스승 축불도징(竺佛圖澄)에게서 배움을 받았다. 도안도 학업을 제자 혜원(慧遠)에게 전수하였다. 오직 이 3대의 세상에서만은 현인이 결핍되지 않았다. 아울러 계율과 절조도 엄숙하고 밝으며, 지혜의 보배도 불꽃같이 성대하였다. 저 햇빛 같은 지혜의 남은 광휘로 하여금, 거듭 천 년 뒤에 빛나게 하였다. 저 향기 높은 땅의 남은 향기로 하여금, 거푸 염부제주(閻浮提州)의 땅을 물씬 향기가 감돌게 하였다. 솟아오르는 진리의 샘물이 여전히 흘러들어 오는 것은, 참으로 이 세 분에게 힘입은 결과이다.
혜원은 거주지를 호계(虎溪)에 국한하였다. 거꾸로 스승인 도안은 마침내 제왕과 가마를 같이 탔으니, 저 고상한 도에 비해 마치 의혹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말하고 입 다물고 움직이고 머무는 것은 오직 시대에 따라 마땅함이 있는 것이다. 네 사람의 노인이 한(漢)나라 궁실을 찾아간 것은 그들을 등용하여 간 것이다. 삼려대부(三閭大夫:屈原)가 초(楚)나라를 떠난 것은 그를 버리므로 몸을 숨긴 것이다. 불경에서는 말한다.
“만약 정법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임금과 지팡이를 지닌 늙은이의 말을 친근하게 들어야 한다.”
도안은 비록 한때 제왕과 함께 가마를 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백성들을 위하여 간언(諫言)하였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에는 아라한과에 감응하여 구름이 열리며 보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 후 형주(荊州)ㆍ삼협(三峽) 일대에서 이름이 드러난 이로는 도익(道翼)ㆍ도우(道遇)를 첫 번째로 말하며, 여산(廬山)에서 맑고 검소하게 산 이로는 혜지(慧持)ㆍ혜영(慧永)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도융(道融)ㆍ도항(道恒)ㆍ승영(僧影)ㆍ승조(僧肇)는 덕이 관중에서 무겁고, 도생(道生)ㆍ승예(僧叡)ㆍ법창(法暢)ㆍ법원(法遠)은 종사로서 건업을 이끌었다. 담도(曇度)와 승연(僧淵)은 홀로 강서의 보물을 독차지하였다. 초진(超進)과 혜기(慧基)는 곧 절동(浙東)의 성대함을 드날렸다.
비록 세대와 사람이 바꾸어 가며 융성하였지만, 모두가 도술에 있어서는 멀리 시대를 초월하여 일치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 운세의 나머지를 일으킨 것이 햇수로 따지면 거의 5백 년이 된다. 공덕의 효능의 아름다움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이를 찬양하여 말하노라.
남은 기풍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법의 물결 머뭇거렸으니
저 밝은이들 아니시면
무너지는 불법 뉘 떨쳤으랴.

축잠(竺潛)과 도안(道安)이 구슬이라면
혜원(慧遠)과 승예(僧叡)는 구슬을 꿰었다네.
굽고 뒤틀린 것 도끼로 깎고
빗긴 먼지 털고 씻어내듯
흰 실 이미 물들었어도
앞으로는 길이 변하리라.

주석
1 하도란 중국 복희(伏羲) 때 황하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점의 그림을 말한다. 낙서란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점의 글씨를 말한다. 하도와 낙서는 『주역(周易)』의 근간이 되었다.
2 금상폐하란 지은이가 책을 지은 때의 황제인 양무제(梁武帝, 502년부터 549년까지 재위)를 가리킨다. 이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양무제는 연호(年號)로 천감(天監, 502~519), 보통(普通, 520~526), 대통(大通, 527~528), 중대통(529~534), 대동(大同, 535~545), 중대동(中大同, 546), 대청(大淸, 547~549)을 쓴다.
3 흰 불자(拂子). 번뇌망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청정한 보리심을 나타나게 한다는 뜻.
4 경전을 종류별로 모은 것.
5 병법이란 상서롭지 못한 도구여서 군자가 쓸 만한 도구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야만 쓰는 것이며, 맑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것이다. (『노자』31장)

『고승전』 8권(ABC, K1074 v32, p.839c01-p.851b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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