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아함경(雜阿含經)

잡아함경(雜阿含經)

오(吳)와 위(魏) 두 나라의 기록에 부록되어 있음
권자훈 번역

[1]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구살국(拘薩國)에 계셨는데, 많은 비구들과 함께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한 대나무 앞에서 멈추셨고, 다시 마을 가운데 잣나무 사이로 가서 쉬셨다.
그때 성이 포로(蒲盧)인 전가(佃家:농사짓는 사람) 바라문이 한 대나무 숲 밖에서 5백 명이나 되는 많은 밭가는 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오늘은 너무 이르니, 지금 한 대나무 앞에 머물고 있는 전가에게로 가야겠다’라고 생각하셨다.
많은 밭가는 자들이 밥을 먹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곧바로 전가가 밥 먹고 있는 곳에 이르셨다.

전가가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저는 손수 밭을 갈고 손수 씨를 뿌립니다. 이미 손수 밭을 갈고 씨를 뿌렸기에 먹을 수 있습니다. 그대 구담(具譚) 행자께서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시나요? 이미 밭을 갈고 씨를 뿌리셨다면 마땅히 드실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가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니, 이미 밭을 갈고 씨를 뿌렸기에 먹느니라.”

전가가 부처님께 말하였다.
“비록 부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저는 직접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며, 이미 밭을 갈고 씨를 뿌렸기에 먹습니다. 저는 구담 행자께서 소ㆍ멍에ㆍ끌채ㆍ볏단끼우개[扠鄧]1) 같은 것으로 씨를 뿌리는 모습을 뵌 적이 없습니다.”
전가는 씨 뿌리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하였다.
“저는 구담 행자의 씨 뿌리는 기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 씨 뿌리는 기구를 알 수 있도록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으로 씨앗을 삼고, 행함으로 물을 삼으며, 지혜로 소를 삼고, 부끄러움으로 쟁기를 삼으며, 마음으로 등(鄧)을 삼고, 의(意)로 금(金)을 삼으며, 몸을 지키고, 입을 지키며, 먹을 것으로 언덕을 삼고, 지극한 정성으로 잘 다스려 그치지 않는 것을 구경(究竟)으로 삼는다. 정진하되 진중하게 행함을 버리지 않는 행으로 안은(安隱)함을 삼으면, 행하여 다시 돌이키지 않으니, 행하는데 근심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이미 씨를 뿌려 감로(甘露)에 이르게 되고, 이와 같이 일체의 씨를 뿌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전가는 곧 그릇에 가득 담긴 음식을 부처님께 올리며 말했다.
“참으로 부처님께서는 능히 밭을 가시며, 크게 밭을 가십니다. 바라건대 제 음식을 드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미 진리를 말했기 때문에 먹을 수 없다. 행자여, 이미 물은 이 법을 스스로 알도록 하라.”

부처님께서 경(經)의 항상하는 법(法)에 대해 말씀하셨다.
“법을 더하는 것이 반드시 이 도(道)를 바라서가 아니니, 다만 의심의 끈이 묶인 것이 다하면 뜻이 그치게 된다. 이 음식을 먹고 마시며 신에게 공양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땅에 묻으면 큰 복이 함께 할 것이다.”

바라문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면 저는 이 음식을 누구에게 주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없는 천(天)ㆍ마(魔)ㆍ범(梵) 같은 무리와 사문들 모두로 하여금 이 음식을 먹게 해도 소화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부처님과 도를 얻은 이가 이 밥과 음식을 가지고 벌레가 없는 물에 이르러 그 가운데 던지거나, 풀이 없는 빈 땅을 파서 묻도록 하라.”

바라문이 부처님의 말씀을 다 듣고 곧바로 행하여, 벌레가 없는 물 가운데 던졌더니 그곳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며 크게 끓는 소리가 나니, 비유하면 마치 철(鐵)과 적엽철(赤葉鐵)2)을 가려서 하루 종일 불에 녹이다가 곧바로 물에 던지면 열기가 뿜어져 나와 용솟음치며 크게 끓는 소리를 내는 것과 같았다.
이와 같이 바라문이 지닌 음식을 물속에 던지자 갑자기 연기가 솟아오르며 크게 끓는 소리가 나니, 놀라고 두려워서 털이 곤두섰다. 그래서 곧바로 부처님 발에 머리를 대고 절한 다음 말했다.
“저는 이제 부처님을 따르는 사문이 되어, 악을 버리고 가르침과 계율을 받아 부처님을 따라 행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청정하게 도를 행해야 한다.”
이 바라문은 부처님을 따라 교계(敎誡)를 받아서 마침내 집착하지 않는 도(道)를 얻어 불법(佛法)에 이르렀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있는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셨는데, 이때 생문(生聞) 바라문이 부처님께 이르러 안부를 여쭙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에 앉아 있던 생문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듣기로는 부처님께서 ‘마땅히 나에게만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보시하지 말라. 나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받지 못한다. 내 제자에게만 보시하고 다른 사람의 제자에게는 보시하지 말라. 내 제자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받고 다른 사람의 제자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받지 못한다. 만약 이와 같이 말하는 자가 이와 같이 해서 나에게 보시하고 내 제자에게 보시한다면 큰 복을 받을 것이며, 이와 같은 말을 베푸는 자는 부처님을 욕하지 않고 의론(議論)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여실한 가르침이 아닌 것 아닙니까? 법다운 가르침입니까? 그릇된 법이 아닙니까, 논란은 있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 말씀이 다음과 같다고 하면서 ‘다만 나에게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말며, 내 제자에게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말라. 내 제자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받고 다른 사람의 제자에게 보시하면 복이 적다’라고 하셨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여실한 말씀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논의했다고 말한다면, 또한 그 말도 여실한 말이 아니고 법이 아니며 모든 법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와 같이 나에게는 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보시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와 같이 만약 그와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문득 세 가지 전도된 도(道)에 무너지게 되어서, 보시하는 사람은 복을 무너뜨리고, 받는 자는 덕을 무너뜨리며, 또 자신은 뜻을 무너뜨리게 된다.
만약 솥을 씻거나 그릇을 씻을 때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동산에 버리며 ‘동산에 있는 벌레들이 이 음식으로 벌레의 몸이 편안해 진다면 이것을 먹고 살아라.’라고 생각한다면, 이 인연으로 복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묻겠는가. 나는 다만 계(戒)를 지키는 이에게 베풀면 복이 크고, 계를 지키지 않는 이에게 베풀면 복이 적다고 말한 것이다.”

바라문이 부처님께 대답했다.
“저 역시 ‘계를 지닌 자는 복이 크고 계를 지니지 않은 자는 복이 적다’고 말합니다.”

“일체를 옳은 생각에 따라 보시를 행해야 하니,계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복이 적고, 계(戒)를 지키는 사람은 복이 크다.
만약 검고 희며 또 붉고 누렇고, 또한 다니는 공작과 소와 비둘기와 또 너의 이 몸은 그것이 생겨난 근본을 살피면, 모양과 힘이 따라 모이고 선과 악이 따라 나오지만, 다만 그 행을 살피고 그 색(色)을 보지 말라. 사람 또한 이와 같이 몸을 가지고 태어나니, 도인도 그렇고 성에 사는 전가(佃家)도 그렇고 죽음을 짊어진 사람도 그렇다. 이것은 각기 타고난 몸이 있는 것인데,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세상을 제도할 수 있으니 이런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복을 얻고, 어리석고 못난 사람은 배우기 어려운 것을 듣지 못하니 그런 사람에게 보시하면 복이 적다.
지혜롭지 못한 자를 섬기지 말라. 다만 지혜가 많은 도를 닦는 제자를 섬겨라. 도를 닦는 제자는 믿음이 많고 가지와 뿌리가 있다.
인연이 있으면 인연을 따라 하늘에 오르고, 인연이 있으면 인연을 따라 악도(惡道)에 떨어지며, 인연이 있으면 인연을 따라 세상을 제도하니, 이와 같이 다 인연을 따르는 것이다.”

문득 생문(生聞) 바라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부처님 발아래 조아리고 절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부처님께 귀의하여 계를 지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3]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상갈사(闍)라는 젊은 바라문이 있었는데,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러 부처님과 더불어 안부를 여쭙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앉고 나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와 같이 무엇을 가지고 악인을 분별해서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악한 사람은 달과 같다.”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을 분별하려면 무엇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까?”
“비유하면 지혜로운 사람3)은 달과 같다.”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달과 같습니까?”

“비유하면 스무아흐레 날의 달과 같으니, 달의 밝기가 점점 약해지고 색깔 또한 점점 옅어지며, 달 모양도 점점 줄어들고 나타나는 것 또한 점점 줄어든다. 한밤중에 지나가는 것도 더디 가고, 때에 달이 있어도 모두 다하여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니, 달이 다한 때와 같다. 어리석은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도를 얻은 사람을 따르게 되어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계(戒)ㆍ혜(慧)ㆍ신(信)을 이미 얻었더라도 받들어 행하지 않으며 받아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아서 가르침을 버리고 여의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信)이 점점 줄어들고, 계(戒)가 점점 줄어들며, 문(聞)이 점점 줄어들며, 시(施)가 점점 줄어들고, 혜(慧)가 점점 줄어들어 밤이 지나는 가운데 다 없어지고 만다.
이 바라문은 한때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이 다하여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얻게 하는 법을 좋아했으니, 비유하면 달이 다한 때인 스무아흐레 날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를 보는 것은 달에 비유할 수 있다.”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혜로운 자가 행하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비유하면 달은 보름에 밝은 것도 더하고 모양도 더하고 드러나는 것도 더하여, 다시 한때에 달이 모든 것을 더하여 갖추기를 멈추니, 바로 보름일 때이다. 이처럼 지혜로운 자는 도덕(道德)을 말함이 마치 법과 같아서 행하여 문득 신(信)을 얻으면, 신(信)을 얻음으로부터 듣고 섬기는 데 뜻을 두어서 버리고 여의지 않으므로 가르침이 모이고 쌓여 곧 신(信)이 더해지며, 계(戒)가 더해지고, 문(聞)이 더해지고, 시(施)가 더해지며, 혜(慧)가 더해져 높아져서 확언하여 한밤중에 더욱 가득 찬다고 하니, 또한 한때에 더하는 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자가 모든 행이 구족함을 얻고 청정한 가르침과 계율을 행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달이 보름이 되면 밝은 달이 때맞춰 이르는 것과 같이, 지혜가 밝은 사람의 견해도 이와 같으니, 바라문이여, 비유하면 달은 말[說]을 옮겨감에 따라 말을 끊는 것과 같으며, 또 비유하면 달은 밝은 가운데 가는 것과 같아서 모든 하늘 아래 별들이 그 눈부심을 쫓는 것처럼, 믿고 듣는 것도 또한 그러할 뿐이다.
능히 보시하되 아끼지 말아야 하니, 세간의 일체의 것을 버리기 어려우나 보시의 밝음을 따라 행하라. 비유하면 천둥 번개가 치면 물기를 많이 머금었다가 땅에 흩어져 내리는 것처럼, 믿고 듣는 것도 이와 같다.
능히 보시하되 아끼지 말아야 하니, 곧 음식을 가득히 마련하여 다시 주면 갑자기 이름이 들리는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같이 날 것이다. 많은 복을 아낌없이 주면 얻는 것이 마치 진귀한 보배 같은 곡식이 비 오듯 하고, 이름이 들리는 것 또한 하늘 위에서 들리듯 할 것이니, 이미 덕행이 있으므로 다음 생에는 하늘 위에서 태어날 것이다.”

문득 상갈사 바라문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아래 이마를 조아리고 절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계를 행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4]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우타라국(優墮羅國)에 계셨는데, 굴연(屈然) 강가의 니구류(尼拘類) 나무가 있는 곳에서 마침 도(道)를 얻으셨을 때를 스스로 생각하시기를,‘사람이 도(道)를 행함에 한 번 매이게 되면 근심 때문에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이 가득하게 된다. 능히 열반에 이르러 소멸시키고 또한 바른 법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어떤 것을 바른 법이라고 하는가? 4의지(意地)이다.

어떤 것을 4의지라고 하는가? 만약 비구의 몸으로 몸을 관하여서 스스로 생각하여 세간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능히 외신(外身)의 몸의 모습을 관(觀)하여 여읠 수 있다. 내신(內身)과 외신의 몸의 모습을 관하여서 스스로 생각하여 세간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능히 고통을 여읠 수 있다.
법을 생각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만약 행하는 자가 4의(意)를 따르는 것을 여읜다면, 곧 행을 따라 법을 여의게 된다. 이미 행을 따라 법을 여의었으면 곧 행을 따라 도를 여의게 되며, 이미 행을 따라 도를 여의었으면 곧 감로(甘露)를 여의게 되니, 감로를 여의고 나면 곧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근심과 번뇌를 건너지 못하게 되며, 또한 고통을 여의지 못하고, 요체를 얻지도 못하게 된다.

만약 행하는 자가 4의지(意地)가 있으면 능히 건널 수 있으니, 곧바로 받아서 도(道)를 얻은 자가 행할 수 있다. 이미 능히 받아서 도를 얻은 자가 행하였으면 곧바로 도를 얻을 수 있으며, 이미 도를 얻었으면 곧바로 능히 생로병사의 근심과 번뇌를 소멸하고, 곧바로 괴로움을 건널 수 있으며 또한 요체를 얻으니, 범(梵)도 바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안다.
비유하면 건강한 사람이 팔을 폈다가 굽히고 다시 펴는 것과 같으니, 범(梵)은 이와 같이 천상으로부터 내 앞에 머무르며, 머무른 뒤에는 곧바로 내가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부처님 마음과 같고 부처님 말씀과 같다고 말한다.
도(道)에 한번 끌려 청정함을 얻게 되면 근심과 생각할 수 없이 가득 찬 고통을 여의게 되어, 능히 멸도(滅度)를 얻고, 능히 바른 법에 이르게 되며, 능히 4의지에 이르게 된다.

몸으로 몸을 관하여서 스스로 생각하여 세간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외신(外身)의 몸의 모습을 관하여 여읠 수 있다. 내신과 외신의 몸의 모습을 관하여서 스스로 생각하여 세간의 어리석음을 따르는 것이 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임을 안다면, 능히 고통을 여읠 수 있다.
법을 생각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 만약 행하는 자가 4의(意)를 여의면 곧 법을 행함을 여의게 되고, 이미 법을 행함을 여의었으면 곧바로 도(道)를 행함을 여의게 되며, 이미 도(道)를 행함을 여의었으면 곧바로 감로를 여의게 된다. 이미 감로를 여의었으면, 곧 생로병사의 근심과 고뇌를 여의지 못하며, 또한 괴로움을 여읠 수 없고, 또한 괴로움의 요체도 얻지 못하니, 이것이 행하는 방편임을 알아야 한다.”

기러기가 발을 물 가운데서 한번 끄는 것을 일컬어
스스로 ‘부처님 말씀을 내가 바르게 행한다’라고 한다면,
다만 이 말은 마땅히 스스로 헤아린 것뿐이다.

생사의 깊은 근심에 한 번 끌려
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남을 슬퍼하니,
이미 성현이 세간을 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
지금 제도하고 뒤에 제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본래 청정무위(淸淨無爲)이며
또한 이 때문에 생로병사가 다하니,
약간의 법을 받아서 의지하여 행하는 것이
이것이 바로 도안자(道眼者)의 말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5]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때 자범(自梵)이 스스로를 밝히니 밤인데도 또한 밝았다. 자범이 부처님 계신 곳에 이르니, 때마침 부처님께서는 화신족(火神足)을 행하고 계셨다.
자범이 생각하기를,‘너무 일찍 부처님을 뵈러 왔나 보다. 지금 부처님께서 화신족을 행하시고 계시니, 이제 나는 구피리(俱披犁) 비구 조달부(調達部)에게 가야겠다’라고 하고는, 곧바로 구피리 비구 조달부에게 이르렀다.

이르러서는 구피리 비구 조달부에게 말하였다.
“구피리여, 구피리여, 이와 같이 좋아하는 뜻을 지니고서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乾連) 비구와 또한 나머지 다른 지혜롭게 도를 행하는 이에게 향하시는군요.”
구피리 조달부가 곧바로 말하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범(自梵)이 말했다.
“나는 범이라고 합니다.”

구피리 조달부가 다시 물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나함(阿那含)이 당신입니까?”
범이 말했다.
“맞습니다.”

구피리 조달부가 다시 물었다.
“어떤 인연으로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까?”
문득 자범이 생각하기를 ‘이 어찌 슬픈 뜻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곧바로 자범(自梵)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서 마쳤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려 하니
이런 까닭에 세간에는 지혜가 적어졌고,
헤아릴 수 없는데도 헤아림을 지으려 하니
이와 같이 세간은 스스로 덮어 가려졌네.

문득 자범이 부처님께 이르러서는 부처님 발아래 조아려 예배하고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한곳에 머물러 있다가 자범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스스로 빛을 밝히니 밤인데도 또한 밝아져서, 부처님께 이르렀는데, 이미 그때 화신족(火神足)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문득 ‘부처님을 뵙기에는 너무 이르지만 나는 이미 와서 부처님의 화신족을 보았다’고 생각하고는, 곧 저는 구피리 비구 조달부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하였고, 저는 곧바로 구피리 비구 조달부에게 이르렀습니다.
구피리 비구 조달부에게 이르고 나서 제가 문득 말하기를 ‘구피리(俱披犁)여, 구피리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사리불과 목건련 비구와 같은 도를 행하는 이에게 향하시는군요.’라고 하였더니, 곧바로 말하기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저는 범(梵)이라고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비구가 저에게 다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나함(阿那含)이 당신입니까?’라고 하기에, 제가 맞다고 하였더니, 곧바로 그 비구가 말하기를 ‘당신은 어떠한 인연으로 이곳에 왔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쯧쯧, 이 어찌 슬픈 뜻이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려고 하니
이 때문에 세간의 지혜는 적어지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말하나
세간 사람들의 속셈을 저는 스스로 압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구피리 비구 조달부가 희론(戱論)을 깨뜨렸다”라고 하시고, 이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을 맺으셨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려고 하니
세간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어려우며,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려 말하니
이 때문에 세간은 스스로 덮어 가려지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6]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면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삶을 다스리는 데는 세 가지 방편이 있어, 이익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능히 이르게 하고, 이미 이른 것을 줄어들지 않게 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것을 비구에게 물으셨다.
“삶을 다스리는 것이 있으니, 이른 새벽에 많은 방편을 생각하여 온 힘을 다해 삶을 다스려 나아가되 낮이나 또한 밥 먹는 때도 그렇게 해서 많은 방편을 구하고 힘을 다해 찾아 이롭게 한다.
비구가 삶을 다스리는 세 가지 법도 이와 같으니, 아직 얻지 못한 좋은 법을 능히 얻게 하고, 이미 얻은 좋은 법을 줄어들지 않게 한다.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것을 모든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어떤 비구가 이른 새벽에 도(道)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해 여의지 않고, 낮이나 밥 먹을 때도 역시 그렇게 해서, 생각을 모아 정하고 받아 행하여 뜻을 여의지 않으면 능히 도가 늘어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7]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 죽원(竹園) 오취(烏)에 계셨다. 이때 이름이 불신중(不信重)이라고 하는 바라문이 있었는데, 왕사국에 살고 있었다.
문득 불신중은 이와 같이 생각하였다.
‘이 구담(俱譚) 사문이 왕사국 대나무 동산 오취에 머물고 있으니, 지금 그에게로 가 그가 말하는 모든 것을 물리쳐 믿지 못하게 해야겠다.’
곧 불신중(不信重)은 왕사국을 나와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했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한 명이 아닌, 백 명의 대중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그들에게 둘러싸여 앉아서 법에 대해 두루 말씀하시고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멀리서 불신중이 오는 것을 보시고는 문득 설하시던 것을 멈추셨다. 불신중은 도착하여 부처님께 안부를 여쭙고 한쪽으로 가서 앉은 다음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경을 설해 주십시오. 설하시는 것을 저도 듣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바라문 불신중에게 말씀하셨다.
신중히 이 법에 응하지 않고,
이해조차 하지 못하며,
또한 그 뜻을 어지럽게 하고,
또한 무조건 다투려고 하는 자여,

만약 논쟁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논쟁하길 좋아하여
성내고 다투게 되니
이와 같은 자가 능히 법어(法語)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곧바로 불신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마를 조아리며 부처님 발아래 절하고 나서 깨달았으니, 이미 우둔하고 어리석고 밝지 못하고 공교하지 못하여 악한 뜻을 지니고 왔음을 깨달았으며, 여래ㆍ무소착(無所著)을 향하여 부처님 말씀을 버리려고 하고 믿지 않으려고 했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스스로 허물을 뉘우치고 근본을 지켜서,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스로 법에 귀의하고, 스스로 비구승에 귀의하여 근본을 지켰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8]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또한 급하게 제자의 법을 설하였으니, 이해하기 어려운 자를 위해서 다 갖추어 설할 것이다.”
사리불이 곧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급하게 설하시는 것도 괜찮고, 제자의 법을 다 갖추어 설하셔도 괜찮습니다. 법회에 참석한 제자들 중에 이해하는 자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곧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자신이 밖의 일체 사상에 대해 모두 인식하면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교만의 번뇌가 다시는 없게 된다. 뜻을 이해하고 지혜를 이해해서, 스스로 법을 보며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알아 행함을 얻으니, 이것이 바로 자신이 밖의 일체 사상에 대해 모두 인식하면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교만의 번뇌가 다시는 없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리불 비구가 이렇듯 자신이 밖의 일체 사상에 대해서도 모두 인식해서 ‘이것이 나이고,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는 교만이 다시는 없게 되어 뜻을 이해하고 지혜를 이해한다면, 법을 보고 지혜롭게 행하며 스스로 보고 스스로 알아 구하여 행함을 마칠 것이니, 이를 일컬어 사리불 비구가 번뇌와 집착을 다하고 배움에 이르러 세상을 건너 열반으로 간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까닭에 이런 말을 설한 것이니라.”

이후로는 말씀이 없으셨다.

이르지 못한 세상의 제도에 대해 설하고
욕망을 파괴하여
구족할 수 없는 것에 뜻을 두고
또한 어둠을 제거하고
의심을 돌이키며

청정함을 관하여
본래의 사유법(思惟法)이 일어난다.
이미 세상을 제도하는 지혜를 말하였고
또한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을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9]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이때 부처님께서 많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몸에 있는 피부는 피를 따라 생기고 살은 똥과 오줌을 싸안고 있다. 스스로 몸을 살펴보건대 어떻게 좋은 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항상 아홉 구멍에는 나쁜 병이 있어 늘 깨끗하지 못하고, 항상 씻어도 가히 부끄럽다. 늘 원수와 더불어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이르고 또한 늘 질병에 시달린다.
어찌하여 마땅히 던져지고 마땅히 무너질 몸을 싫어하지 않는가? 버려져서 땅속에 장례를 지내고 다시는 쓰이지 못하니, 여우나 이리의 밥이 된다. 그러니 어찌 보고도 부끄럽지 않겠으며, 누구라서 탐욕스럽고 음란하게 말하겠는가?”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적은 것을 가히 많다고 스스로 마음속으로 이것을 관(觀)하더라도, 이것은 마치 장례용 막대기로 시체의 뼈를 모으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불을 태우는 것과 같고, 독약을 먹은 것이 고통스러워서 몸을 쥐어짜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기뻐도 기쁜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하니, 어찌 탐내고 음란하게 행하여서 그물에 걸리는 어리석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돈ㆍ곡식ㆍ금ㆍ은ㆍ소ㆍ말ㆍ노예로 사람의 목숨을 구하려 하지만, 목숨은 호흡에 있으니, 본래 목숨 역시 자연히 적은 것이요, 아주 오래 산다고 해도 백 살 남짓이나 또한 고통이 합쳐진 것이다.
누가 이것을 관(觀)할 수 있겠는가? 마치 시간이 지나가면서 목숨이 곧 점점 줄어들어 살날이 다 사라지는 것 같고, 빠르게 흘러가는 강물 같고, 해와 달이 다하는 것같이 목숨은 이렇게 빨리 사람을 지나가는 것이다. 목숨은 한 번 가면 다시는 오지 않듯이 사람이 죽을 때 목숨이 끊어져 버리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가령 약간의 재물과 천상의 신비한 물건을 찾았다 하더라도 또한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죽을 때가 닥쳐서는 또한 즐겁지 않으며, 또한 싫어할 수도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으며, 또한 스스로 즐거워할 수도 없다. 다만 남김없이 스스로 선을 짓고, 남김없이 스스로 있는 그대로 선을 짓는다면, 죽음을 당하여서 어떤 사람들이 탐욕스럽고 음란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다.
오래 살든지 빨리 죽든지 당연히 죽음을 만나게 되니, 어찌 모든 즐거움을 찾으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깊은 사려 없이 마음을 다 기울여 사랑하던 아이가 있더라도 이 아이가 죽게 되면 울고불고 하지만 열흘을 넘기지 않고, 이미 열흘이 지나면 곧 그 사실을 잊게 되니, 아이를 사랑하던 부인 또한 그렇고, 집안의 친척들과 친구들도 그러하다.

고생하고 살면서 재물을 모으지만 죽을 때에 사람은 모았던 것을 다 버려야 하며, 스스로 사랑하던 몸과 생명도 끈으로 묶여 어지러이 버려진다. 또한 흙속에 들어가면 다만 음(陰)이 되어 사라지니, 나고 자라고 떨어짐이 마치 나무의 과실과 같다. 이미 이와 같이 사람의 뜻이 무너지는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천하의 모든 만물도 한 사람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 만약 그 일부분을 얻더라도 어찌 만족함을 얻을 수 있겠는가? 셀 수 없이 많은 세상에 다섯 가지 즐거움이 두루 하더라도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고통을 만나 죄를 받은 사람의 뜻은 이 때문에 이익이 되는 바가 있을 것이나 고요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자기 몸이 뱀이 될 것이다. 적었다가 많아져도 그럴 것이고, 많았다가 적어져도 그럴 것이다.

이것은 마치 병이 들면 크든 적든 역시 고통스러운 것과 같고, 마치 살이 없는 뼈를 개가 얻으면 씹어서 싫증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개가 습관대로 하고자 하나 이것 역시 얻기가 어렵다. 이미 얻었다면 마땅히 매우 두려워해야 하니, 이 습관은 오래가지 않으며 사람도 악한 데 떨어진다.
마치 사람이 꿈에서 보았더라도 깨고 나면 다시는 탐하고 빠질 수 없는 것과 같고, 또한 이것은 연극과 같은 것이다. 꿈에 즐거움이 있더라도 검은 뱀과 같고, 낚싯밥으로 쓰는 고기와 같으며, 나무에 과실이 있으나 실제로는 적고 많음이 없는 것과 같다. 더욱더 얽매여 악을 지으니 본래 도가(道家)에서는 항상 이런 사람을 쓰지 않는다.
천상에 있으면 즐겁고 천상의 화려한 나무 역시 단정하여 마치 화원과 같으며 또한 천상의 왕녀를 얻지만, 이미 얻은 사람은 천상의 다섯 가지 즐거움을 만족하지 못하니, 지금 마땅히 어찌 천하에서 만족함을 얻겠는가?

이백 골(骨)ㆍ백 골ㆍ백이십 단(段)을 취하고 힘줄로 묶여 있으며 아홉 구멍은 항상 새어 아흔세 가지 종류의 백 가지 심한 병이 되고, 살과 피가 서로 화합하여 살가죽이 생기고, 속에서는 춥고 뜨거운 바람으로 똥과 오줌이 되며 천 가지 벌레들이 있으니, 이것은 다 몸을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 가운데 천(千) 개의 구멍이 있는데 또한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내가 친하고자 해도 저것은 무너져버리고 이것을 쫓아 깨끗하지 않은 것들이 나오니, 코에서는 콧물이 나오고, 입에서는 침이 나오고, 겨드랑이 아래에서는 땀이 나오고, 구멍이 있는 곳을 따라 똥과 오줌이 나온다. 이와 같이 다 몸을 따라 심하게 나오고, 무덤 속의 시체도 실로 악취가 심하니, 버린 후에도 가히 악취가 심한 깨끗하지 못한 종류들이기 때문이다.
본래 이렇기 때문에 금 같은 것으로 바르고 달리 옷을 입고 향수와 화장을 하고 붉은 솜과 감대(紺黛)를 하는 것인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마음이 산란해지니, 마치 화병(畵甁) 같고 구덩이를 풀로 덮어 놓은 것 같은데, 사람이 껴안고 사랑하다가 뒤에 후회한다.”

비구는 무릎을 꿇고 절하고서 이와 같이 가르침을 받았다.

[10]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잘 듣고 가르침을 받아라.”

부처님께서 곧 말씀하셨다.
“비구여, 사람에게는 네 가지 인연이 있으며 탐애(貪愛)에는 가볍고 무거움이 있으니 이것을 따라 도(道)를 떠나게 된다.
비구여, 비유하자면 한 사람이 네 명의 아내를 두고 있는 것과 같으니, 첫째 부인은 남편이 소중하게 여겨서 앉고 서고 다니고 걷고 움직이고 눕고 쉴 때 일찍이 떠난 적이 없으며, 목욕하고 장식하고 밥을 먹고 다섯 가지 즐거움을 항상 먼저 그와 더불어 하였으며, 춥고 덮고 배고프고 목마르면 여기에 따라 살펴 주었고,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서 일찍이 더불어 다툰 적이 없었다. 둘째 부인은 앉고 일어서고 말을 할 때에 항상 좌우에 있었는데, 그녀를 얻으면 기뻐하고 그녀를 잃으면 우울해 하다가 늙고 병들기도 하고 송사를 일으켜 싸우기도 했다. 셋째 부인은 함께 모일 때면 나타나, 자주 함께 있곤 했는데 아무렇게나 안부를 묻곤 했지만 몹시 곤란하고 지나치게 피곤하면 곧 매우 근심하다가도 혹 서로 멀리 떨어져 가게 되면 생각을 했다. 넷째 부인은 주인의 심부름을 하였는데 심히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할 때에도 먼저 달려가서 번번이 가서 응하였으나 안부를 묻지도 않고 더불어 말을 하지도 않았으니, 그녀는 보호하여 돌봐주기를 바랐지만 마음에 두질 않았다.

이 네 부인의 남편이 하루아침에 죽게 되어 멀리 떠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남편은 곧 첫째 부인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가야 한다.’
부인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남편이 말했다.
‘내가 너를 비할 데 없이 소중하게 여기고 아껴서 크나 작으나 많으나 적으나 항상 너의 뜻을 살피고 돌보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따르지 않겠다고 하는가?’
부인이 말했다.
‘당신이 비록 저를 사랑해주고 소중하게 여겨주셨지만 저는 끝내 당신을 따를 수 없습니다.’

남편은 탄식을 거두고 둘째 부인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가야 한다.’
둘째 부인이 대답했다.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던 첫째 부인도 오히려 당신을 따르지 않습니다. 저도 또한 끝내 당신을 따를 수 없군요.’
남편이 말했다.
‘내가 일찍이 너를 구할 때에 노력하고 고생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몹시 춥고 더워도 참고, 배고프고 목마름도 꾹 참았으며, 물난리나 불난리 관청의 시달림과 도적에 맞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싸우면서 약삭빠르고 민첩해서 너를 얻을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는가?’
부인이 말했다.
‘당신 스스로 이익을 탐하여 억지로 저를 구하신 것이지, 제가 당신을 구한 것은 아니니,어찌 애쓰고 고생했다고 말씀하십니까?’

남편은 곧 탄식을 거두고 다시 셋째 부인을 불렀다.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가야 한다.’
셋째 부인이 대답했다.
‘저는 당신이 베푸신 은혜를 받았기에 당신을 성 밖에까지는 배웅해 드리겠지만, 끝내 멀리 당신이 가시는 곳까지는 갈 수 없습니다.’

남편은 스스로 한탄하는 것을 거두고 다시 넷째 부인과 함께 이야기했다.
‘내가 이 나라의 경계를 떠나야만 하니, 너는 나를 따라가야 한다.’
넷째 부인이 대답했다.
“저는 본래 부모를 떠나 당신께 보내졌으니, 생사고락(死生苦樂)을 마땅히 당신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소중히 여기던 세 부인에게서 당신을 따르겠다는 뜻을 얻을 수 없었으니, 다만 괴롭고 부끄러우나 저도 따라갈 수 없다는 뜻을 그들과 함께 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위의 비유에서 말한 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의 의신(意神)이요, 첫째 부인은 사람의 몸이다. 사람이 몸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첫째 부인보다 더하다. 그러나 목숨이 다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면 의신은 죄와 복을 따라 마땅히 홀로 멀리 가야 하는데, 몸은 땅에 엎드려 기꺼이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4행(行)을 따르지 않으면 도탈(度脫)할 수 없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근심과 고통이요, 둘째는 습관과 욕심이요, 셋째는 공이 다한 것이요, 넷째는 소멸하는 것이다. 모든 악도(惡道)는 반드시 8행(行)이 있으며, 지극한 정성은 4제(諦)에 있다.

둘째 부인은 사람의 재산이다. 얻으면 기쁘고 얻지 못하면 근심스럽지만 목숨이 다하는 때에 이르면 재물과 보배는 세상에 남겨둬야 하며, 또한 스스로 따라가지 못하는데도 공연히 앉아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셋째 부인은 부모ㆍ처자ㆍ형제ㆍ다섯 친척, 알고 있는 사람들ㆍ노비들이다. 살았을 때 은혜로이 사랑하고 서로 사모하였기에 목숨이 다할 때에 이르면 울고 통곡하면서 성 밖의 무덤까지는 전송해 준다. 그렇지만 곧 죽은 사람을 버려두고 각자 되돌아와 우울하게 생각하기를 채 열흘도 되지 않아서 곧 함께 먹으면서 죽은 사람에 대해 점점 잊어버린다.
넷째 부인은 사람의 뜻이다. 천하에 스스로 뜻을 사랑하고 지켜서 보호하는 자는 있지 않으니, 모두 마음이 산만하여 제멋대로이고 탐욕스러우며 성을 내고 정도(正道)를 믿지 않다가, 몸이 죽으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데, 지옥에 들어가거나 축생이 되거나 아귀가 되어 모두 쾌히 뜻하는 대로 이르는 것이다.

비구여, 도(道)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단정히 하고 뜻을 바르게 해야 하며, 마땅히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며 악을 행하는 것을 그쳐야 한다. 악을 행하지 않으면 재앙을 받지 않고, 그 재앙을 받지 않으면 태어나지 않으며, 태어나지 않으면 또한 늙지 않고, 늙지 않으면 또한 병들지 않으며, 병들지 않으면 또한 죽지 않고, 죽지 않으면 곧 무위(無爲)의 니원도(泥洹道)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여여(如如)하게 이것을 말씀하시니, 비구는 가르침을 받고 크게 기뻐하였다.

[11]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 계산(鷄山)에 계셨는데,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세상에 머무르며 일 겁 동안 나고 죽는 그 뼈를 취하여 보관해서 썩지 않고 소멸하지 않게 하여 수미산처럼 쌓아 놓거나, 혹은 백 겁 동안 나고 죽은 자, 혹은 천 겁 동안 나고 죽은 자라 하더라도, 오히려 아직 아라한ㆍ니원도(泥洹道)를 얻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일 겁 동안 그 뼈를 모아 합쳐서 수미산과 같더라도 내가 짐짓 그 근본 인연을 나타내리니, 비구여, 만약 너희들이 모두 마땅히 그 근본을 뽑아서 그 근본을 버리고 여읜다면 이 때문에 다시 태어나고 죽지 않을 것이며, 다시 태어나고 죽지 않으므로 곧 세간을 건너 니원도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2]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기수수달원(祇樹須達園)으로 행차하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시니 비구가 응하여 부처님 말씀을 받았다. 부처님께서 곧 색(色)을 말씀하셨다.
“비구가 근본을 생각하면 고통이 일어나는데 생각은 항상 무너지지 않으니, 버리고 자세히 관(觀)할 뿐이다.
비구가 색을 자세히 관할 수 있어서 만약 능히 색의 본래 생각을 알고, 능히 색이 항상 무너지지 않음을 알며, 능히 자세히 관할 줄 안다면, 곧바로 색을 사랑하는 것을 버리게 된다. 이미 색을 사랑하는 것이 무너지면 곧 사랑하고 탐하던 마음도 무너지며, 이미 사랑하고 탐하던 마음이 무너지면 곧 뜻을 벗어날 수 있다.
내가 이와 같이 통양(痛癢:受)ㆍ사상(思想:想)ㆍ생사(生死:行)ㆍ식(識)을 말한 것은 비구가 근본을 생각하고 또한 식을 생각하는 것이 항상하지 않기 때문이니, 또한 마땅히 자세히 관(觀)해야 한다. 만약 비구가 능히 자세히 관하여 사랑하는 것을 버리면, 이미 사랑이 다하고 사랑하고 탐하는 마음이 다하여서 곧바로 생사(生死)를 해탈해 도(道)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3]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대를 위해 악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나고 또한 선은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지 말하리니, 비구는 잘 듣고 생각하여 마음에 두라.”
비구가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악의(惡意)는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는가?
색(色)은 과거ㆍ미래ㆍ현재에 탐욕이 스스로 성냄과 두려움 그리고 어리석음을 일으켜 일체를 악의라고 보아서 이를 일컬어 악한 것이라고 하니, 통양(痛癢) 또한 그렇고, 사상(思想) 또한 그러하며, 생사(生死) 또한 그렇고, 식(識) 또한 그러하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일으킨 바의 악을 따른다고 한다.
선의(善意)는 어떤 것인가? 색은 과거ㆍ미래ㆍ현재에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봄이 없으니, 성냄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어서 모든 악의에 어지럽게 됨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선의라고 하며,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통양ㆍ사상ㆍ생사ㆍ식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와 같이 선악의(善惡意)에 대해 말하였다.”

[14]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4의지(意止)가 있으니, 네 가지는 어떤 것인가?
비구는 내신(內身)의 몸을 관하여[觀止]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외신(外身)의 몸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내ㆍ외의 몸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의 통양(痛癢)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밖의 통양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팎의 통양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의 의(意)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밖의 의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팎의 의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의 바른 법(法)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밖의 바른 법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안팎의 바른 법의 모습을 관하여 힘을 다해 바로 뜻을 알아서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니, 어리석음은 천하의 근심이 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4의지(意止)를 말씀하셨으니, 부처님의 제자는 마땅히 받아 행하고 정진하므로 도를 얻을 수 있다.

[15]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비구에게 하나의 법이 있으니, 이 법에 대해 사유하고 많이 행해야 한다. 몸이 편안함을 얻게 되고, 뜻으로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를 그쳐 남음이 없게 된다. 다만 지혜롭게 법을 행함을 생각하고 또한 구족하게 행함을 생각해야 한다.
어떤 것이 하나의 법인가? 한 법의 모양은 안반(安般)4)을 익혀 뜻을 지키는 것이니, 만약 비구가 안반으로 뜻을 지킴을 익숙하게 하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머무른다면, 곧 몸이 편안함을 얻고 뜻도 생각하고 기대하는 바를 곧바로 그쳐서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된다.
다만 지혜롭게 법을 행할 것을 생각하고 원만 구족하게 행하라. 이것이 비구의 하나의 법인 것이다. 이 한 법의 모양을 서로 행하고 서로 많이 하면 몸이 쉴 수 있을 것이다. 뜻과 생각이 기대함도 곧바로 그쳐 남음이 없으리니, 다만 지혜롭게 법을 행하고 더욱 행을 많이 할 것을 생각하라. 만약 비구가 이 한 법을 능히 행하고 능히 부리며 능히 생각하며 능히 많이 지으면 도를 따를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6]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힘이 있으면 상근기의 도(道)를 얻을 것이다.
어떤 것이 두 가지 힘인가? 밝게 깨달아 제어하는 힘[曉制力]과 뜻으로 방호하는 힘[意護力]을 말한다.

밝게 깨달아 제어하는 힘은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 말씀을 들어 도가 있는 참된 제자가 몸으로 악행(惡行)을 하는 것을 배우면 악복(惡福)을 받게 된다. 지금 세상과 나중 세상에 나[我]의 몸이 악을 행하면 나는 마땅히 스스로 몸을 범하게 되며, 또한 타인도 번거롭게 하여 도인(道人)이 됨도 도를 함께 함도 없게 된다.
또한 계(戒)를 범하면 시방 사람들이 나의 악행에 대해 말할 것이며, 나 또한 불길한 말을 쫓아서 몸이 무너지면 곧 지옥 가운데 떨어지리니, 이렇게 몸으로 악행(惡行)을 하는 것을 악복(惡福)이라고 한다.
지금 세상의 악도 이와 같고, 나중 세상의 악도 이와 같을 것이니, 곧 몸의 악함을 버리고 몸을 위하여 좋은 생각을 지니며 몸을 청정히 하면 이와 같이 몸이 범하고 마음이 범하는 데에 이르지 않는다. 이것을 밝게 깨달아 제어하는 힘[曉制力]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염력(念力)을 행한다고 하는가?
지키는 바를 이루는 것이며, 스스로 지켜 돌아가는 것이고, 그칠 바의 생각을 힘써 행하는 것이니, 이른바 행하여 스스로 도달하되 염(念)하여 구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염행력도(念行力道)라고 한다.”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비구는 몹시 기뻐하며 일어나서 예배를 드렸다.

[17]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셨는데,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서 머무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힘이 있으니, 어떤 것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믿음의 힘이고, 둘째는 정진(精進)의 힘이며, 셋째는 지혜의 힘이다.

믿음의 힘은 어떤 것인가? 도가 있는 제자는 불도(佛道)를 위하여 능히 뜻을 무너뜨림이 없고, 불은(佛恩)을 얻어 행하여 머문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잘 살펴서 집착하는 바가 없고, 지혜의 긴요함을 깨달아 천하의 아버지가 되는 즐거움을 얻는다’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부처님께 도달하여 악을 버리고 지혜롭게 행하면, 혹 이것을 일컬어 믿음의 힘이라고 한다.

정진의 힘은 어떤 것인가? 어떤 비구가 있었는데 이미 악의(惡意)가 생겼으면 끊어버렸기 때문에, 행하고자 함을 구하고 정진함을 구하여 정의(正意)를 받게 된다.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의는 문득 일으키지 않고,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의(善意)는 구하여 낳으니, 이미 법의(法意)에 머물렀으면 잊지도 않고 덜어내지도 않는다. 나날이 더하고 나날이 많아져 행하려는 생각이 가득하면 내려고 하고 받기를 구하여 정진제의(精進制意)가 나오니, 이것을 일컬어 정진력이라고 한다.

지혜의 힘은 어떤 것인가? 만약 어떤 비구가 이 고(苦)와 집(集)이 같음을 살펴서 집이 고이며 고가 집임을 안다면, 이 고가 다하면 고의 요체[要]를 받으리니, 이것을 일컬어 지혜의 힘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시자 비구는 듣고 받아서 말씀대로 행하였다.

[18]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서 머무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네 가지의 힘이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 힘인가?
첫째는 의력(意力)이요,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며 , 셋째는 불범력(不犯力)이요, 넷째는 수력(守力 )이다.

의력(意力)은 어떤 것인가? 만약 어떤 비구가 선과 악의 혼탁함에 대해 안다면 지극한 앎에 이른 것과 같다. 또한 범할 것을 알고 범하지 않을 것을 알며, 또한 행할 수 있음을 알고 행할 수 없음을 알며, 또한 그릇된 것을 알고 또한 증장함[增]을 알며, 또한 흰 것을 알고 검은 것을 알며, 또한 혼탁한 것을 안다면, 자세히 살펴서 아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일컬어 의력(意力)이라고 한다.

정진력은 어떤 것인가? 어떤 비구가 혼탁하여 악한 것을 말하고, 범하는 것을 말하며, 불가한 것을 말하고, 검은 것을 말하며, 뛰어난 사람을 쓰지 않겠다고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은 무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만약 혼탁하면서도 말하기를 좋아하여 범하지 않음을 말하고, 익힐 수 있음을 말하고, 말할 수 있는 흰 것을 말하며, 도에 대해 말하더라도, 이와 같은 무리는 탁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 탐욕이 된다. 행하는 것이 정진이 되며, 의(意)를 받아들여 의를 제어하는 이것을 일컬어 정진력(精進力)이라고 한다.

불범력(不犯力)은 어떤 것인가? 어떤 비구가 몸을 범하지 않고 받아 행하여 머무르며, 입을 범하지 않고, 또한 마음을 범하지 않아 받아 행하여 머무는 이것을 일컬어 불범력이라고 한다.

수력(守力)은 어떤 것인가? 네 가지 부류를 말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부류인가? 첫째는 거두어 줌[攝]이고, 둘째는 보시(布施)이며, 셋째는 서로 슬퍼함[相哀]이고, 넷째는 서로 도와 선을 행함[相助善行]이다. 이것을 일컬어 수력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19]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에게는 5력(力)이 있어서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속이게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 힘인가? 첫째는 색(色)이고, 둘째는 단정(端正)함이며, 셋째는 남자 형제가 많은 것이고, 넷째는 집안이 세력이 있는 것이며, 다섯째는 재산이 많은 것이다.

어떤 것을 색이라고 하는가? 여인이 어질지 못한 것을 이른다. 이미 어질지 않으므로 곧 생활의 방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으며, 마땅히 성을 내면서 집안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 여인은 스스로 단정함이 비길 데가 없다고 말하며, 남자 형제가 많아서 강하다고 말하고, 세력이 있고 귀한 집안이라고 말하며, 재산이 많다고 말하니, 이와 같은 여인은 어질지 못하다.

만약 여인이 정숙하고 어질다면 여인의 색(色)이 없을 것이다. 아주 정숙하면 곧 두 가지 선한 가르침을 지닐 것이니, 이미 두 가지 선한 가르침을 받았다면 생업을 다스려 수입을 늘리려 하고 성내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집안을 지키려 한다. 이와 같은 여인은 단정함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에 이 여인은 다만 마음으로 하는 사람일 뿐이니, 남자형제가 많아 강하다고 내세우지 않으며, 집안이 세력이 있고 귀하다고 스스로 높이려 들지 않으며, 또한 재산이 많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내세우지 않을 뿐이다. 곧바로 가르침을 받으며,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면 잘 지녀서 게으름 피우지 않으니, 곧 생활의 방도를 세우려 하고, 마음이 화평하여 성내는 일이 없고, 집안일을 버려두지 않으며, 곧 생활의 방도를 세워서 집안을 잘 지키기 위해 걱정한다. 이와 같은 것이 정숙하고 어진 여인의 뜻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0]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아무것도 듣지 않는 자는 듣지 않는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많이 들은 자는 많이 들은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인색한 자는 인색한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보시하는 자는 보시하는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며 서로 모이고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욕심이 많은 자는 욕심이 많은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욕심이 적은 자는 욕심이 적은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지니기 어려운 자는 지니기 어려운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이며 서로 응하고 서로 옳다고 한다. 지니기 쉬운 자는 지니기 쉬운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주는 것이 어려운 자는 주는 것이 어려운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주는 것이 쉬운 자는 주는 것이 쉬운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만족하지 않은 자는 만족하지 않은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만족한 자는 만족한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지키지 않는 자는 지키지 않는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지키는 자는 지키는 자끼리 함께 서로 어울리고 서로 모여서 서로 응하며 서로 옳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이 인연을 분별하여 행해야 할 것은 마땅히 행하고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한다.

[21]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제석천[天上釋]이 된 것은 옛날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있을 때 일곱 가지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니, 목숨이 다하도록 구하여 나아가서 근본을 따랐던 까닭에 제석천이 된 것이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목숨이 다하도록 마땅히 부모님께 효도하고, 목숨이 다하도록 어른을 뵙게 되면 예의를 갖추며, 입으로는 불꽃이 튈 정도의 험한 말을 하지 않고, 의(意)에 따르는 법어(法語)를 말하며, 목숨이 다하도록 성내거나 헐뜯는 망령스런 말을 하지 않고, 목숨이 다하도록 지극한 정성으로 말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기뻐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머무는 것이다.
항상 믿어서 천하를 속이지 않으면, 마땅히 목숨이 다하도록 천하가 아껴줄 것이다. 내가 마땅히 뜻하여 집안에 있는 것을 아끼지 않고 보시를 행해서 펼쳐진 손마다 항상 구하는 것을 주었으니, 이를 일컬어 보시(布施)를 좋아한다고 한다. 보시하여 똑같이 나누었으되, 이 제석천왕[釋天王]이 된 것은 옛날 세상에서 사람 가운데 있을 때 이 일곱 가지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한 것을 목숨이 다하도록 모두 행하고 성취하여 이 본래의 제석을 쫓아 제석천이 된 것이다.”

이어 말씀을 맺으셨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노인에게 예를 갖추며
속 태우는 말을 하지 말고 의(意)에 따라 말하며
헐뜯거나 망령된 말을 버리고
또한 인색함에서 스스로 벗어나길 살폈으며
성내지 않고 기뻐하여 말씀대로 행하였네.

“이런 까닭에 천상(天上)을 얻었으니,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마땅히 천상에 이와 같이 예(禮)를 올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2]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셨는데,기수급고독원으로 가서 머무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손톱 끝에 흙을 묻히신 다음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여,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이 손톱 끝의 흙이 많겠는가, 땅의 흙이 많겠는가?”
비구가 곧 대답했다.
“부처님, 손톱 위의 흙은 적어서 땅의 흙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또한 백 배도 아니고 천 배도 아니며 만 배도 아니며 억 배도 아니고 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숫자로도 비유할 수 없으며 모을 수도 없고 또한 말로써 비유할 수도 없으니, 이것은 땅의 흙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곧바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지혜롭게 지혜의 눈으로 행하는 것이 땅의 흙과 같음을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은 사람이 하는 것은 지혜롭게 지혜의 눈으로 행하더라도 손톱 위의 흙과 같다. 이와 같이 하는 사람은 지혜롭게 지혜의 눈으로 행하되, 이와 같이 배워서 지혜롭게 지혜의 눈으로 행하면 허물이 없다. 지혜가 생기면 마땅히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니, 이와 같이 비구로서 도(道)를 행하고자 하는 자는 배워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3]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몸은 돌이켜 회복됨이 없고, 몸은 은혜를 생각하지 않으니, 만약 조그만 통증으로 말미암아 병이 들면 온몸이 다 고통스럽다. 항상 뜻하는 대로 얻고자 하여 눈은 아름다운 색을 보며 귀는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코는 좋은 향기를 맡으며 혀는 좋은 것을 맛보고 몸은 곱고 부드러운 것을 입지만, 이와 같이 몸을 길러도 사람이 버려져 죽게 되면 몸은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계(戒)와 법(法)을 따르지 않고 다만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세상에 대화(大華)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있었는데, 죽음의 순간에 이르자 ‘쯧쯧, 몸을 써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백 년 동안이나 힘을 다하여 이와 같이 기르고 보호하였는데도 한 번 죽음이 찾아오니 몸은 곧 무너지는구나’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몸은 돌이켜 회복될 수 없으니, 가령 마땅히 몸을 쓰고 살피며 보살피더라도 종국에는 마치 원수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몸은 스스로 죄를 구하여 이미 작은 고통을 얻게 되면 곧 근심하는 태도를 보인다. 항상 가장 좋은 다섯 가지 즐거움과 더불어 있다가 오래되어 보면 마땅히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맞닥뜨리게 된다.
비구는 잘 생각하여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이미 이것을 알았으면 마땅히 행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쳐라.”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4]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기수급고독원으로 가서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사자는 축생의 왕이니, 스스로 머무는 곳에서 나오며, 이미 스스로 머무는 곳에서 나와서는 곧 하품을 한다. 하품을 한 다음에는 곧 가만히 바라보고 다시 사방을 두루 살펴보되, 문득 세 번 되풀이해서 사자의 목소리를 내고 가서 곧 뜻하는 곳에 이르러 거닌다. 산과 강이 깊어서 빠르게 지나가더라도 건널 수 없음을 이미 알기에 사자는 이 강가에서 스스로 머물러 있다가 곧 건너가는 가장자리에서 식(識)을 지어 의념(意念)을 관(觀)하며, 이로부터 내려와서 식처(識處)에 이르러 나온다. 이미 문득 내려왔으나 만약 사자왕이 아는 바를 곧바로 얻어 나오지 못하면 곧 다시 돌아가서 다시 건너나 다시 돌이키지 못한다. 항상 식(識)을 얻어 처한 곳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죽음에 이르러 사자왕은 머무르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며 베풀지 못하니, 알아야 할 바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배워서 들은 바를 자세히 받지 않고, 문득 사람들이 모여 있는 데 가서 말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끌려나오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어리석은 사람은 또한 베풀지 않으며, 어리석은 태도로 행하고, 또한 그것을 하려 하지 않으며 경(經)에서 요구하는 바를 받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만약 이와 같이 문득 지혜로운 사람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것은 내가 마땅히 경전의 힘을 배워서 힘써 행한 것이고, 내가 마땅히 학문을 하는 힘이며, 내가 마땅히 자세히 살펴 행하는 힘이며, 내가 마땅히 방종하지 않은 것이다.
사자왕은 죽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깨달은 젊은 사람이 도(道)를 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5]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의 강당 안에 계셨다.

이때 아속륜자(阿遫輪子)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이르러 추악한 입으로 부처님께 나쁜 욕을 하며 심하게 다그쳤다. 부처님께서 곧 아속륜자 바라문에게 경(經)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악은 없으나 악한 입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밝고 바른 행동이 없을 것이다.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쫓아 재앙에 이르니, 비유하면 마치 사람이 불어오는 바람을 향해 가면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즉시 아속륜자 바라문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 발에 엎드려서 말했다.
“허물을 알게 되니 몰라서 어리석었던 것이 후회됩니다. 마치 이해하지 못하며, 분명하게 알지 못한 것을 어리석다고 이름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을 제도하는 이는 더러운 입으로 욕을 하는 것을 없게 하고 수없이 충고를 하니, 부처님께서 마땅히 어리석은 사람을 위하시는 까닭에 제 허물을 깨달았습니다. 지금부터 스스로 잘 지켜서 다시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이미 바라문이 어리석고 이해하지 못하며 분명하게 알지 못하여 더러운 입으로 욕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구나. 이미 돌이켜 후회함을 보았고 스스로 지켜서 이 후에는 감히 범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말하는구나. 이 도(道)를 행하는 가운데 도가 늘어나서 줄어들지 않기를 바라고, 만약 이미 깨달아 스스로 허물을 후회하여 스스로 나타내어 숨기지 않고 근본을 지키면 다시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바라문이 곧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6]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국(王舍國)에 계실 때였다. 이름이 불침행자(不侵行子)인 바라문이 있었는데, 부처님께 나아가 안부를 여쭙고 한쪽에 앉았다. 이미 한쪽에 앉아 있던 불침행자가 부처님을 향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다.
“제 이름은 불침(不侵)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름과 같이 뜻도 그러할 뿐이다. 그대 바라문은 마땅히 침범하지 말라.”

이어 말씀을 맺으셨다.
만약 몸을 침범하지 않으면
입도 착한 말을 하고, 뜻도 그렇다네.
이런 것을 불침(不侵)이라 이름하니
기이하게도 침범하는 것이 없다네.

곧 불침행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님 발아래 엎드렸다.
“지금부터 가르쳐주신 계율을 지녀 다시는 5계(戒)를 범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7. 불설칠처삼관경(佛說七處三觀經)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부처님께서 문득 비구를 부르셨다.
“7처(處)를 알고, 3처處)를 관(觀)하라. 속히 도법(道法)에 마음을 두어 묶인 것에서 벗어나면 묶인 뜻이 없게 되며, 벗어나 지혜를 쫓으면 법(法)을 얻게 되고, 법을 보면 스스로 도를 증득하게 된다. 생을 받으면 도의(道意)를 끝까지 행하고, 해야 할 것을 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물으셨다.
“어떤 것이 7처선(處善)인지 아는가? 이것을 듣고 비구는 색(色)이 근본과 같다는 것을 잘 살펴서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색습(色習)을 알고, 색이 다함을 알며, 색이 멸도행(滅度行)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색의 맛[色味]을 알고, 색의 괴로움을 알고, 색이 나오는 중요한 곳과 지극히 진실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통양(通癢)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이 근본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식습(識習)의 식(識)이 다하면 식이 다한 것을 받아 행하여 근본을 알고, 또한 식의 맛[識味]을 알며, 또한 식이 고통임을 알고, 또한 식이 나오는 중요한 곳을 알며, 또한 식의 근본은 지극히 진실함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색(色) 같은 것을 살필 수 있는가? 색이라는 것은 네 가지를 근본으로 하니, 또한 4대(大)가 있고, 4대에는 독이 있다. 색의 근본은 이와 같이 근본이 같음을 알라.
어떻게 색습(色習)의 근본이 같음을 아는가? 애습(愛習)이 색습이니, 이와 같이 색습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색이 다하면 지극히 진실하게 되는가? 애착이 다하면 색도 다함을 알 것이니, 이와 같이 색이 다하면 지성지(至誠知)가 된다.
어떻게 색의 행이 다하면 지성지와 같이 되는가? 만약 이 색을 이 8행(行)으로 삼아 자세히 보아서 자세하게 8행을 정하는 데 이르면, 이와 같이 색이 다 행을 받으니, 지성지의 근본과 같다.
어떻게 색의 맛[色味]이 지성지와 같음을 아는가? 색이라는 것은 살고자 하되, 기쁘게 살고자 하는 것이니,이와 같이 색의 맛은 지성지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색의 번뇌[色惱]가 지성지와 같은 것인가? 색이라는 것은 항상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법륜을 굴리니, 이와 같이 색의 번뇌는 지성지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색요(色要)가 지성지와 같은 것인가? 색이라는 것은 욕심내어 탐하는 것을 능히 벗어나서 욕심을 버릴 수 있고 욕심을 건너갈 수 있으니, 이와 같이 색이 요(要)임을 알아 지성(至誠)과 같은 것이다.

어떤 것이 통양(痛癢)임을 능히 아는 것인가? 여섯 가지 통양이 있으니, 눈[眼]에 통양이 심어져 있으며,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에도 통양이 심어져 있다. 이와 같은 통양을 아는 것이다.
어떤 것을 통양습(痛癢習)이라 하는가? 습(習)에 심겨진 것을 통양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습이 통양습이다.
어떤 것을 통양진지(痛癢盡知)라 하는가? 심은 것이 다함을 통양진지라고 한다. 이런 것이 통양진지가 된다.
어떤 것을 통양수행(痛癢受行)라고 하는가? 만약 8행(行)을 받아서 자세히 보아 의(意)가 정해져 여덟 가지가 되는데 이르면, 이와 같이 통양을 다 받아서 행하여 도가 된다.
어떤 것을 통양미식(痛癢味識)이라 하는가? 이것은 통양이 오기를 구하여 기쁨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통양식미를 아는 것이다.
어떤 것을 통양뇌식(痛癢惱識)이라고 하는가? 통양이라 하는 것은 고(苦)를 무너뜨리지 않고 법의(法意)를 굴리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통양뇌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통양요(痛癢要)라고 하는가? 통양이라는 것은 능히 살아서 아끼고 탐하여 능히 건너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통양요식이니, 자세히 살펴 알아라.

어떤 것을 사상식(思想識)이라고 하는가? 몸에 여섯 가지의 사상(思想)이 있으니, 눈[眼]에 사상이 심어져 있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도 사상이 심어져 있다. 이와 같이 이 여섯 가지 식(識)이 사상(思想)이다.
어떤 것을 사상습식(思想習識)이라고 하는가? 습(習)을 심는 것이 사상습(思想習)이 된다. 이와 같은 것이 사상습식이 된다.
어떤 것을 사상진식(思想盡識)이라고 하는가? 사상진식이 다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사상진식이 된다.
어떤 것을 사상진수행식(思想盡受行識)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8행식(行識)이다. 식(識)을 자세히 살펴보아 자세히 정해서 의(意)가 여덟이 되는데 이르니, 이런 것이 사상수행식(思想受行識)을 다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사상미식(思想味識)이라고 하는가? 사상의 인연으로 즐거움이 생겨서 뜻[意]의 기쁨을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상미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사상뇌식(思想惱識)이라고 하는가? 사상이 항상 고통을 다하지 못한 채 법을 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상뇌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사상요식(思想要識)이라고 하는가? 사상이 능히 욕심과 탐욕을 벗고자 하여 능히 욕심과 탐욕을 끊고 능히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사상요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생사식(生死識)이라고 하는가? 몸에는 여섯 가지의 생사식이 있다. 눈에 생사식이 심어져 있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도 심어져 있다. 이와 같은 것을 생사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생사습(生死習)이라고 하는가? 습(習)에 심어진 것을 생사습식(生死習識)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생사진식(生死盡識)이라고 하는가 ? 심음이 다한 것을 생사진식(生死盡識)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생사욕진애행식(生死欲盡愛行識)이라고 하는가? 이것은 8행식(行識)을 자세하게 살펴보아 자세하게 정하여 여덟이 되는 데 이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사를 멸하고자 하여 식을 받아서 행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생사미식(生死味識)인가? 나고 죽는 인연이 즐거움과 기쁨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생사미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생사뇌식(生死惱識)인가?
나고 죽는 것이 항상 고통을 다하지 못한 채 법을 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생사뇌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생사요식(生死要識)인가? 나고 죽는 욕심과 탐심이 욕심과 탐심을 피하여 능히 욕심과 탐심을 끊고 능히 건너가니, 이와 같은 것을 생사요식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식(識)이 몸의 여섯 가지 쇠미한 식(識)인 것인가?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에 식이 심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식의 식이 된다.
어떤 것이 식습(識習)인가? 명자습(命字習)이 식습(識習)이 된다. 이와 같이 습(習)이 식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식(識)이 다 받아 행하여 식이 되는 것인가? 목숨이 다 식이다. 이와 같은 것이 식을 다함이 된다.
어떤 것이 식(識)이 다 받아 행하여 식이 되는 것인가? 8행(行)을 잘 살펴보아 자세하게 정해서 여덟 가지가 됨에 이르니, 이와 같이 식이 다 받아서 행하려고 하는 것을 자세히 살펴 아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식미(識味)를 아는 것인가? 인연을 아는 까닭에 태어남이 즐겁고 태어남에 기쁜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태어남을 음미하는 것이 식미를 아는 것이다.
어떤 것이 식뇌식(識惱識)인가? 식이 다하여 고통이 되고 구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식뇌식이다.
어떤 것이 요식(要識)인가? 식의 욕심과 탐심이 능히 욕심과 탐심을 다스려 능히 끊어서 능히 건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요식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비구는 7처(處)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을 일곱 가지라 하는가? 색(色)ㆍ습(習)ㆍ진(盡)ㆍ도(道)ㆍ미(味)ㆍ고(苦)ㆍ요(要)니, 이것은 5음(陰)에 각각 일곱 가지 일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3관(觀)이라고 하는가? 식(識) 또한 일곱 가지 일이 있는데, 5음을 얻으면 여섯 가지 일을 이룬다. 몸을 관(觀)하는 것이 일색(一色)이 되고, 5음을 관하는 것이 2가 되고, 여섯 가지 쇠함을 관(觀)하는 것이 3이 되니, 이런 까닭에 3관이라고 한다.

비구여, 능히 7처(處)와 3관(觀)을 밝게 하면 오래지 않아서 도(道)를 따라 행할 것이며, 묶인 것을 끊어서 묶인 뜻이 없을 것이고, 벗어나서 지혜를 모아 긴요히 하나를 증득해 받아 머무는 것을 볼 것이며, 마침내는 생사를 끊어 지어야 할 바를 결국 행할 것이니, 다시 돌아와 생사에 떨어지지 않고 도를 얻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비구가 크게 기뻐하고 가르침을 받아 행하였다.

주석
1) 농기구의 한가지로 볏단을 끼우는 데 쓴다.
2) 철을 불속에서 제련할 때 불에 녹아떨어지는 쇳조각을 말한다.
3) 문맥상 ‘지혜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나, 원문에 불(不)자가 없으므로 그대로 번역한다.
4) 호흡을 헤아리는 관법으로, 호흡을 통해 산란한 마음을 쉬고 집중하는 마음을 길러 선정을 닦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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