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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용수  

비트겐슈타인과 용수

Wittgenstein and Nāgārjuna

李 昇 鍾(Lee Seung-chong)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차 례│■

1. 접속

2. 조각난 언어, 조각난 세계

3. 시네마 천국

4. 딱정벌레

5. 비어 있는 세계

6. 비어 있는 언어

7. 우상의 황혼

비트겐슈타인과 용수

1. 접속

이 글에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龍樹(Nāgārjuna)의 철학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또한 용수의 철학을 비트겐슈타인의 관점에서 읽어 냄으로써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철학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교정하려 한다. 동양과 서양, 그리고 시대의 차이로 상호간에 멀게만 느껴졌던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철학을, 평면적 단순 비교가 아니라 서로에게 유익하고 생산적인 대화로 이끌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만남이 생산적인 대화로 성공적으로 이끌어지려면 만남에 참여하는 어느 한쪽이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상대방이 수용할 것이라고 전제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보편적 합리성이나 과학적 객관성과 같은 이념이 쌍방 간의 대화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척도를 제공해 준다는 전제하에 만남의 틀이 짜여질 때, 그 대화는 애초부터 불평등한 관계에서 시작될 것이며 결국은 비생산적인 형태로 끝나고 말 것이다.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폭로하고 있듯이 전제되는 두 이념은 서양의 이성 중심적 형이상학과 그 뿌리를 같이 하는, 서양 중심적 척도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용수의 중관철학에 대한 수용과 해석의 역사는 동서의 진정한 만남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노정하고 있다. 용수의 중관철학에 대한 서양인들의 첫인상은 허무주의, 바로 그것이었다(Keith, 1923, pp. 237, 239, 247, 267 ; Kern, 1896, p. 126). 중관철학의 핵심 개념인 空을 無로 간주한 데서 비롯된 이러한 입장은, 윤리적 가치를 포함한 일체를 오로지 부정한다는 의미로만 공을 해석하거나, 혹은 공이나 무가 있다는 식으로 공을 사물화하여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중관철학자들 스스로에 의해 명백히 부정되고 있다. 예컨대, 짠드라끼르띠(Candrakīrti)는 용수의 󰡔중론󰡕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사물화된 개념을 가지고 공에 허무주의적 의미를 부과하며 … 이러한 모욕적인 혐의로 우리를 비방한다.

용수의 중관철학은 허무주의적 해석에 이어 20세기 서구 불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무르티의 주도하에 칸트의 절대적 관념론의 틀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무르티에 의하면, 공은 칸트의 누메나와 같은 것으로서(Murti, 1955, p. 294), 현상계 배후의 실재요 현상계의 초월적 토대이다(Murti, 1955, pp. 234~235). 그러나 무르티는 다음에서 보듯이 용수가 허무주의뿐 아니라 절대주의도 부정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됨에 집착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斷滅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석한 사람은 존재성이나 비존재성에 의거해서는 안 된다.

앞서 보았듯이 동서 철학의 진정한 만남이 성사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쌍방이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열린 마음과 언어로 만남의 테이블에 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르티의 용수 해석이 준거점으로 삼고 있는 칸트의 절대적 관념론의 경우, 바로 그 절대성의 주장이 타자와의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한다.

이 글이 시도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만남은 양자가 절대적 진리나 보편적 토대와 같은 형이상학적 언어를 지양한다는 점에서 열린 대화의 전망을 밝게 한다. 물론 양자의 만남이 이 글에서 처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를 체계적으로 비교하고 있는 거드문센(Gudmunsen, 1977)의 작업은, 특히 용수의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Huntington, 1989, p. 31). 그러나 거드문센은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들과 맞지 않는 이분법적 위계를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거드문센(Gudmunsen, 1977, pp. 44, 52~53, 55)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언어는 일차적 체계와 메타체계, 이렇게 두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사물에 관한 언어(속제;saṃvṛti)가 일차적 체계에 속한다면, 그 언어에 관한 언어인 공의 언어(진제;paramārtha)와 철학의 언어는 메타체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서 보듯이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이러한 언어관을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철학이 ‘철학’이라는 말의 쓰임에 대해 말한다면, 2계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철자법’이라는 말을 다루는 철자법이 2계적이지 않은 것처럼. (PI, §121)

세간의 언어 관습에 의거하지 않고는 최고의 意義는 가르쳐지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거드문센의 해석 틀을 이루는 2분법과 같은 것이 가치의 서열화와 그에 수반되는 형이상학적 위계를 형성해 냄을 지적하고, 이를 해체하려 한다.(형이상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위․아래, 선․후의 위계를 내포하고 있다.) 해체를 통해 그들이 돌이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위계의 부과에 의해 만들어진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초월해 버린 이 삶의 세계와, 그 세계에서 언어가 사용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용수의 철학은 각각 러셀 및 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아비다르마철학을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철학의 주제는 러셀/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아비다르마철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러셀/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아비다르마철학을 관통하는 세계관은 원자론이다. 이들에 대한 비트겐슈타인과 용수의 철학의 비판도 바로 원자론을 겨냥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론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자연스러운 출발점이 된다.

2. 조각난 언어, 조각난 세계

오랜 역사를 지닌 데다 그 갈래도 다양한 원자론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철학에 있어서 원자론은 대체로 세계를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궁극적 원자들로 환원해서 이해하려는 입장을 통칭한다. 궁극적 원자들은 (1) 단순한 것이며, (2) 또 상호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원자론의 토대를 이루는 공준이다. 우리는 (1)을 단순성의 공준, (2)를 상호 독립성의 공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렇다면, 각 공준의 근거는 무엇인가?

(1) 만일 원자들이 단순하지 않다면, 그것은 보다 단순한 것으로 더 분석되어야 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애초에 원자로 여겨진 것들이 사실은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궁극적 원자가 아님이 입증될 것이다. (2) 또한 만일 원자들이 상호 독립적이지 않다면, 한 원자가 다른 원자를 포함하거나 배제하는 경우가 가능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애초에 원자로 여겨진 것들이 사실은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궁극적 원자가 아님이 입증될 것이다.

위의 두 요건을 만족시키는 원자는 어떠한 것일까? 아니, 그에 앞서 우리는 그러한 원자가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러셀과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이끄는 분석철학의 전통은 (1) 언어와 세계가 동일한 형식,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으며, (2) 언어가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1)은 언어­세계 동형론으로, (2)는 언어의 그림이론으로 각각 알려져 있으며, 동형론은 그림이론의 논리적 전제에 해당한다. 그림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림과 그림의 대상 사이에 비교와 대응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다시 양자 사이에 어떠한 공약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동형론은 양자 사이에 공유된 동일한 논리적 형식과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바로 그러한 공약수로 지목하고 있다.

분석철학의 전통에서 원자론적 세계관은 결국 언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통해 추론되는 입장이다. 이제 청년 비트겐슈타인을 좇아 그 추론의 구조를 살펴보자. 아래에서 L로 표시되는 명제는 언어에 관한 명제이고, W로 표시되는 명제는 세계에 관한 명제이다. LW로 표시되는 명제는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명제이다.

(L1)언어는 명제들의 집합이다.

(W1)세계는 사실들의 집합이다.

(LW1) 언어와 세계는 동일한 논리적 형식과 논리적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L2)명제는 더 이상 다른 명제로 분석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명제인 요소명제로 환원된다. 명제의 참/거짓 여부는 요소명제의 참/거짓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LW2) 요소명제는 사실을 그린다.

(L2)는 명제가 요소명제의 진리함수임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동형론(LW1)과 그림이론(LW2)의 전제에 적용할 때, 세계는 명제들의 진리함수적 구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분석된다. 우리는 언어와 세계에 대한 이러한 분석의 틀을 진리함수적 분석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진리함수적 분석론을 통해 발견되는 원자는 언어의 측면에서는 요소명제이고, 세계의 측면에서는 그에 대응하는 사실이다. 사실은 요소명제의 지시체로 상정된 것이므로, 양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요소명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진리함수적 분석론이 발견한 궁극적 원자로서의 요소명제들은 원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 즉 (1) 단순하고, (2) 또 상호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요소명제들이 단순하다는 의미는 그 명제들이 더 단순한 명제로 분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소명제들이 상호 독립적이라는 의미는 요소명제들 사이에 상호 함축이나 배제의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명제 p와 q가 상호 독립적이기 위한 조건으로는, 다음의 여덟 가지를 들 수 있다.

1) p는 q를 함축하지 않는다.(p ⊭ q)

⊭ː함축하지 않는다

2) q는 p를 함축하지 않는다.(q ⊭ p)

3) p는 q의 부정을 함축하지 않는다.(p ⊭ ~q)

4) q는 p의 부정을 함축하지 않는다.(q ⊭ ~p)

5) p의 부정은 q를 함축하지 않는다.(~p ⊭ q)

6) q의 부정은 p를 함축하지 않는다.(~q ⊭ p)

7) p의 부정은 q의 부정을 함축하지 않는다.(~p ⊭ ~q)

8) q의 부정은 p의 부정을 함축하지 않는다.(~q ⊭ ~p)

이들 중에서 1)은 8)과, 2)는 7)과, 3)은 4)와, 5)는 6)과 논리적으로 동치이므로, 위의 여덟 가지 조건은 결국 네 가지로 줄일 수 있다. 혹은 함축에 모순의 개념을 더하여 이 네 가지 조건을 다시 다음과 같은 세 명제로 표현할 수 있다.

I) p와 q는 상호 함축하지 않는다. (1, 2, 7, 8)

II) p와 q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3, 4)

III) p의 부정과 q의 부정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5, 6)

상호 독립성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명제 p와 q의 위상을 벤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p q

그런데 놀랍게도 위의 벤다이어그램은 상호 독립적인 p와 q가 각각 그 내용에 있어서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더 분석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반면에, 단순성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명제 r과 s의 위상을 벤다이어그램으로 나타내 보면 아래와 같다.

r s

그러나 이 두 명제는 상호 독립적이지 않다. 상호 독립성 조건의 5), 6) 혹은 III)을 위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명제의 상호 독립성은 각 명제의 단순성과 양립할 수 없다. 단순한 명제들은 상호 독립적이지 않고, 상호 독립적인 명제들은 단순하지 않다. 진리함수적 분석론에서 단순성의 공준과 상호 독립성의 공준을 모두 만족시키는 원자가 요소명제와 그 지시체인 사실이라면, 우리의 분석은 그러한 요소명제나 사실이 성립 불가능함을 입증한다. 이는 곧 진리함수적 분석에 입각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원자론이 성립할 수 없는 입장임을 함축한다.

3. 시네마 천국

분석철학에서 행하는 분석이 진리함수적 분석의 선에서 그치고 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예컨대, 러셀은 요소명제가 이름으로 더 분석되고, 이름의 지시체인 개별자, 성질, 관계가 진정한 원자라는 입장을 편다. 그는 감각자료, 심적 상태, 보편자 등을 그 구체적인 예로 꼽고 있다. 경험적 세계의 궁극적인 원자가 감각자료라면, 심적 세계의 궁극적인 원자는 심적 상태이며, 추상적․논리적 세계의 궁극적인 원자는 보편자이다.

러셀에 의하면, 이 세 종류의 원자는 모두 직대면(acquaintance)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다. 결국 러셀의 원자론은 (1) 감각자료를 원자로 삼는 경험주의, (2) 심적 상태를 원자로 삼는 데카르트주의, (3) 보편자를 원자로 삼는 플라톤주의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세 입장을 관통하는 공통의 끈이 있다면, 그것은 인식론적으로는 직대면의 원리이고, 존재론적으로는 언어­세계 대응론이다.

아비다르마철학은 진리함수적 분석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이 펼쳐진 원자론의 지평에서 러셀의 철학과 조우한다. 아비다르마철학에 의하면, 세계는 다르마(dharma, 法)라는 궁극적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境界(viṣaya)와 心所(caitta)는 각각 감각자료와 심적 상태를 지시하는 다르마이며, 受(vedanā)는 樂(suhka), 苦(duhkha), 捨(upeksā)를 통칭하는 보편적 다르마이다. 또한 想(samjñā)은 감각에 私的으로 이름을 부여하는 경험에 대응하는 다르마이며, 名身(nāma-kāya)과 文身(pada-kāya)은 각각 낱말과 문장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다르마이다. 다르마들은 궁극적 원자가 그러한 것처럼 단순하고 상호 독립적이며(Stcherbatsky, 1923, p. 74), 다르마들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지식이야말로 유일하게 확실한 지식으로 간주된다.

앞서 우리는 진리함수적 분석론에서 궁극적 원자로 상정된 요소명제들, 혹은 사실들이 각각 단순한 동시에 상호 독립적일 수 없음을 보았다. 진리함수적 분석의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이 펼쳐진 원자론의 지평에서 발견되는 감각자료나 다르마와 같은 원자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우선 진리함수적 분석론에서 상정된 원자가 명제나 사실인 데 반해 러셀과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상정된 원자는 대상이나 상태이며, 이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명제가 아니라 이름 혹은 개념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명제 간의 상호 독립성을 정의하고 분석하는 데 사용되었던 함축, 모순 등의 용어는 이름 혹은 개념 간의 상호 독립성을 정의하고 분석하는 데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함축을 포함으로, 모순을 배제로 바꾸어 적용한다면, 우리는 마찬가지 결과에 도달할 것이다. 요컨대, 러셀과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상정된 원자들도 단순성과 상호 독립성의 공준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는 곧 이들의 원자론도 진리함수적 분석에 입각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원자론과 마찬가지로 성립할 수 없는 입장임을 함축한다.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원자론에서 분석의 대상인 언어와 사실세계는 정지되어 있다. 진리함수적 분석론은 시간적 계기가 배제된 정태적인 구조분석론이다. 러셀과 아비다르마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원자론에 변화와 시간의 계기를 부여함으로써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원자론을 비롯한 여타의 원자론이 갖는 난점들을 타개하려 한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어떠한 사물이 정말로 실재한다면, 그 사물은 영속적으로 혹은 적어도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 편견이 있다. 이러한 견해는 내가 보기에 완전히 잘못되었다. 정말로 실재하는 사물들은 순간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물들이 수천 년 간, 혹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사물들은 우리의 경험을 초월해 있으며,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아는 실재하는 사물들은 매우 순간적으로만 지속됨을 말하려는 것이다. (Russell, 1918, p. 274)

정말로 실재하는 사물들이 순간적이라는 러셀의 명제는 불교적이다. 아비다르마철학자들에 의하면 열반과 공간을 제외한 모든 다르마는 찰나적이다. 아비다르마철학의 대표적 학파로 꼽히는 說一切有部는 이를 刹那三世論이라는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모든 다르마들은 찰나적 현재뿐 아니라 바로 그 현재에 선행하는 찰나적 과거와 그 현재에 뒤따르는 찰나적 미래, 이렇게 삼세에 걸쳐 존재한다. 요컨대, 변화하는 것은 다르마들이 아니라 시간이다. 모든 다르마는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항상 존재하는 진실된 본질(svabhāva, 自性)과 그것의 찰나적인 顯現(lakṣaṇa, 相), 이렇게 두 가지 상이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다(Stcherbatsky, 1923, p. 42). 시간의 상하에서 볼 때 다르마들은 단순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자성의 상하에서 볼 때 다르마들은 미래로부터 현재로, 다시 과거로 움직일 뿐이다.

찰나삼세론의 구조는 영화 메커니즘의 구조와 유사하다(櫻部 建․上山春平, 1969, p. 61). 하나의 릴에서 송출된 영화의 필름은 한 장면 한 장면 광원 앞에 나타나고, 이 광원에 의해 비춰져 스크린 위에 한 순간 화면을 투영한 뒤, 다음 순간에 다른 릴로 감겨 간다. 필름의 흐름은 이처럼 하나의 릴에서 다른 릴로 계속 움직여 가지만, 필름에 인화된 하나의 화면 그 자체는 처음의 릴 속에 있을 때도, 광원에 비춰질 때도, 다른 릴에 감겼을 때도,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 그리고 스크린에 차례로 투영된 영상은 하나하나로서는 순간적이며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이것이 부단히 연속함으로써 시간적 경과 속에서 변화하고 활동하는 영상의 사건을 구성해 간다.

이 영화 메커니즘에서 처음의 릴은 다르마가 경과하는 삼세 중 미래의 영역에, 광원에 의해 비춰지는 순간은 현재에, 다음의 릴은 과거의 영역에 해당된다. 필름의 매장면이 곧 함께 일어나는 다르마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스크린에 비춰진, 변화하고 활동하는 영상의 사건은 현실의 세계에 해당된다. 결국 다르마들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흐름에서 영화 필름처럼 연속적으로 상영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찰나삼세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과거 및 미래의 대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행하는 인식은 대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상이 없는 인식은 있을 수 없다. 마음이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상하는 이상, 이 기억과 예상이라는 생각의 대상이 되는 과거와 미래의 다르마들은 당연히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櫻部 建․上山春平, 1969, p. 72;梶山雄一․上山春平, 1969, p. 52). 그러나 이는 부당한 논증이다. 추억 속의 고향이 실제 고향과 같을 수 없고, 예상한 미래가 실제와 같을 수 없다. 지향적 대상은 실제 존재하는 대상과 동일시될 수 없다. 환각이나 착시 혹은 상상 속에서의 대상은 실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지만, 우리의 의식은 그러한 대상을 지향할 수 있다.

찰나삼세론은 또한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찰나삼세론은 운동을 부정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다르마는 출현하자마자 소멸하여 운동할 시간이 없다. 모든 운동은 영화 필름의 각 조각들처럼 서로 연속하여 잇닿아 있는 일련의 다르마들이 개별적으로 출현하고 소멸하는 과정일 뿐이다. 둘째, 찰나삼세론은 인과 개념을 약화시킨다. 원인은 실제 원인이 아니라 단지 선행하는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셋째, 찰나삼세론은 시간을 파편화한다. 시간은 다르마들이 현현하는 찰나로 쪼개지며, 이 찰나는 곧 다르마와 구별되지 않는다. 설일체유부는 이러한 문제들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설일체유부가 초래한 난제들은 후에 용수에 의해 이루어진 새로운 연기 해석에 의해서 비로소 올바로 파악되고 또 해소된다.

4. 딱정벌레

세계의 구조가 논리적이라는 언어­세계 동형론은 언어의 구성적 관계를 세계에 확대 적용한 경우이다. 동형론은 언어와 세계가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함을 간과했다는 점에서, 혹은 언어와 세계의 동형성을 아무런 정당화 없이 전제했다는 점에서, 범주 오류나 전제 미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세계 동형론이 함축하는 의미론은 언어가 세계를 지시함으로써 의미를 얻는다는 지시적 의미론이다. 지시적 의미론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와 세계의 대응은 언어의 구성요소가 세계의 구성요소에 대응하는 일대일대응의 관계일 수는 없다. 언어와 세계의 구성요소는 각 요소가 속해 있는 언어와 세계라는 집합체에 유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빨강’이라는 낱말은 색채 개념을 구성요소로 하는 언어와 문법을, 빨강이라는 색은 그 색을 띤 대상과 아울러 색의 스펙트럼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낱말이 대상을 지시하도록 설정할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빨간색 연필을 가리키면서 어린이에게 “이것이 토우브야.”라고 말했을 때, 우리의 말은 토우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정하지 못한다. 토우브는 빨간색, 목재, 연필, 딱딱함 등등 다양한 것에 대응될 수 있기 때문이다(BB, p. 2). 어린이는 우리의 발언이 사물의 어떤 점을 어떤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는 지시가 의미의 원천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 지시가 그보다 더 원천적인 많은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가 지시보다 오히려 그 전제들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고통과 같은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의 의미는, 분명 그 지시체에 의해서 주어진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1인칭적이고 사적인 체험과 그 서술은 틀릴 수 없다는 점에서, 직대면과 지시의 다른 어떠한 경우보다도 더 확실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고통과 같은 사적 감각에 관한 표현에 대응하는 지시체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사적 감각을 하나의 사물로 간주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한 생각은 다시 사적 감각이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사적 감각이 하나의 사물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적 감각의 경우를 신중히 살펴보면, 우리는 결코 그러한 기준을 확보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문제는 내가 사적 감각을 지시하는 경우 올바른 지시와, 내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지시를 판별할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이 사정을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나는 옳음의 기준을 결여하고 있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옳게 보이고 있는 것은 실제로 모두 옳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여기서 ‘옳음’에 관하여 말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이다. (PI, §258)

그러므로 ‘규칙을 따름’은 또 하나의 행위이다. 그러나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규칙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PI, §202)

올바른 지시와 그렇지 못한 지시를 판별할 수 없다면 지시 대상으로서의 사적 감각 개념은 그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예를 고안한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다고 하자. 그것을 ‘딱정벌레’라고 부르기로 하자(PI, §293).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상자 안을 들여다봄으로써만 ‘딱정벌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다른 사람의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딱정벌레’에 관해서 말하고 있을 때, 그것이 상자 안에 있는 것일 수는 없다. 이 경우에 각자의 상자에 각기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다(PI, §293). 사실상 상자가 비어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은 없다(PI, §293). 요컨대, ‘딱정벌레’라는 낱말이 어떤 쓰임을 갖는다고 해도 그것은 상자 안에 있는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감각’이라는 낱말이 갖는 의미의 유일한 원천이 사람들 저마다의 서로 다른 사적 감각에 대한 지시체라면, 그 낱말에 대한 공통적인 의미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감각’이라는 낱말은 일상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것의 의미가 사적 감각에 관한 지시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감각 표현의 문법을 ‘대상과 지시’의 모형에 기초하여 해석한다면, 대상은 무관한 것으로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PI, §293)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사적 대상은 전혀 쓸모가 없게 된다. 거꾸로, 사적 대상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면 의사소통은 불가능해진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감각에 대한 지시체가 확정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언어와 사적인 사물로서의 사적 감각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성립할 수 없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적 경험’은 우리 문법의 퇴화된 구성물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동어 반복 내지 모순과 비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문법적 괴물이 이제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 (LPE, p. 314)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는 사적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적 감각은]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결론은 단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말해질 수 없는 어떤 무엇과 마찬가지의 자리매김을 갖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강요되는 문법을 거절하였을 뿐이다. (PI, §304)

우리가 지시의 모형에 기초하여 감각 표현의 문법을 설명하는 한 “[사적 감각은]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PI, §304) 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자기 모순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위의 문장을 모순으로 처리하는 문법을 거절한다면, 문제되는 모순은 해소될 수 있다.

사적 언어 불가능성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은 어떠한 철학적 입장을 겨냥하고 있는가? 우리는 앞서 러셀의 원자론이 (1) 감각자료를 원자로 삼는 경험주의, (2) 심적 상태를 원자로 삼는 데카르트주의, (3) 보편자를 원자로 삼는 플라톤주의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았다. 이들 세 입장을 관통하는 공통의 끈은 인식론적으로는 직대면의 원리였고, 존재론적으로는 언어­세계 대응론이었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데카르트주의의 경우가 이 두 공통의 토대를 가장 확실하게 실현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우리는 첫째, 고통과 같은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낱말의 의미가 그 지시체에 의해서 주어지며, 둘째, 이러한 1인칭적, 사적 체험과 그 서술이 결코 틀릴 수 없다는 전통적 가정을 꼽았다.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은 바로 이 두 가정이 그릇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곧 데카르트주의의 와해를, 더 넓게 보아서는 러셀의 원자론의 와해를 함축한다.

5. 비어 있는 세계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은 불교철학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 사적 감각이 그러하듯이 아비다르마철학에서 다르마는 일상의 문맥으로부터 추상, 분리되어 독자적인 자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적 언어가 그러하듯이 다르마에 관한 언명은 일상적 의사소통을 넘어선 사적 직관의 표현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다르마와 그에 관한 언명의 위상을 비판하는 데 적용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설일체유부를 위시한 아비다르마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각기 자성을 갖는 다르마라는 원자로 사물화하여 이해하도록 인도한다. 이러한 사물적․원자론적 세계관은 지시적 의미론을 수반한다. 지시적 의미론은 지시체의 확정성을 그 전제로 하는데, 이 전제는 다르마와 같은 원자의 단순성 및 상호 독립성 공준과 연결되어 있다. 사적 언어 논증에 의한 비트겐슈타인의 지시적 의미론 비판은 단순성과 상호 독립성이 양립할 수 없다는 앞서의 논증과 한데 어우러져 지시적 의미론에 수반된 사물적․원자론적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확립한다. 용수로 대표되는 중관철학이 비트겐슈타인과 만나게 되는 계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련된다.

중관철학은 금욕과 고행이라는 양 극단을 피하면서 관통하는 부처의 中道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상호 이율배반적인 그릇된 형이상학들을 일거에 혁파하는 부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이름이기도 하다. 그 근거는 부처가 깟짜야나에게 한 다음의 설법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깟짜야나, 이것은 한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깟짜야나, 이것은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 두 극단에 서지 않고 여래는 그대에게 중도의 교리를 가르쳐 주마.

이 구절이 함축하는 바의 하나는 존재와 비존재를 어떤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사물화하여 이해하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 설법을 인용하면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自性이나 他性, 존재나 비존재를 (있다고) 보는 사람들, 그들은 부처의 가르침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한다.

자성, 타성, 존재, 비존재 등 형이상학적 개념의 지시체가 어떤 것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물적․원자론적 사유방식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세계관은 우리로 하여금 사물화된 것들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에 빠지게 한다. 그러한 집착은 사물화된 원자들이 영원불변한 자성을 갖는다는 믿음을 초래한다. 집착이 낳은 이러한 믿음은,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므로 우리에게 좌절과 번뇌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번뇌의 소멸은 결국 그릇된 믿음, 그릇된 사유방식, 그릇된 세계관의 해체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감각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처럼, 중관철학도 다르마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 근거는 󰡔금강경󰡕의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다르마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다르마 아님에도 집착하지 말 것이니라. … 다르마도 오히려 버려야 하겠거늘, 하물며 다르마 아님에 있어서랴.

이러한 태도는 다르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물화된 모든 존재와 비존재 일반에 적용된다. 이와 관련해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자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항상성의 과실에 떨어지고,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 지금 존재하지 않는 것은 斷滅性의 과실에 떨어진다.

다르마가 미래에서 현재로, 다시 과거로 유전하는 경우, 그 본래의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설일체유부의 찰나삼세론은 바로 항상성의 과실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성이나 타성, 존재나 비존재, 다르마나 다르마 아님 등의 언어가 사물화되어 사용되는 것을 바로잡았을 때 얻게 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릇된 사물 언어와 사물화된 지시체를 해체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이 집착에 빠진 우리의 마음과 언어가 지어낸 것임을, 그리고 그것들이 사실은 비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그것들의 空性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의 깨달음은 사물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용수는 “나는 사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자성을 갖는 것으로 실체화된 사물이 비어 있음을 깨닫는 일이 사물의 부정이나 없음을 정립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후자는 또 한 번의 그릇된 사물화(부정과 無의 사물화)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의 자각이 사물의 본질을 해명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통찰이나 이론적 테제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성이란 일체의 견해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성인들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공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 사람은 구제 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공이 있다는 견해를 갖는 사람은 공에 집착하여 공에 대한 형이상학을 전개하려 한다. 용수는 이러한 오류를 막기 위해 공도 비어 있음[空空]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공은 마치 치료약과 같아서 공이라는 약으로 사물적․원자론적 사유의 질병을 치료했으면, 그 치료약도 씻어내야 한다. 남아 있는 약이 위를 해치듯이 공에 대한 집착도 우리를 다시금 미혹에 빠뜨릴 뿐이다.

철학적 깨달음에 대한 용수의 이러한 태도는 다음에서 보듯이 비트겐슈타인과 닮았다.

진정한 발견은, 내가 원한다면 철학을 그만둘 수 있게끔 하는 그런 것이다. 철학이 스스로를 문제삼는 물음에 의해 더 이상 고통받지 않도록 철학에 평화를 주는 그런 것이다. (PI, §133)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철학이 스스로를 문제삼는 물음에 의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기’ 위한 하나의 조건은, 철학 고유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사물화하고 언어를 그에 맞춰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도록 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의 다양성과 경험의 유동적인 섞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 이 개념의 영역에서 나름의 위계와 작동으로 산출된 것들이 형이상학적 체계들이다. 형이상학은 우리에게 드러난 (다양하고 개별적인 사건과 사물이 유기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세계를 그와는 질적으로 다른 (단일한 기능으로 추상되고 확장된) 개념체계로 환원하여 설명하려 한다.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개념체계를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면, 그에 대한 비판과 해체의 작업은 자연히 그러한 개념체계의 발생을 막거나 그것을 원래의 출발점으로 복귀시키는 작업이 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면, “언어에 의해 우리의 지성을 매혹하려는 것에 대한 투쟁이다.”(PI, §109) 전통 철학으로 하여금 체계를 만들게 하는 추상된 언어의 영역이 그 자체의 자립적인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연적 세계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철학적 개념과 체계의 해체 작업은 하나의 기능과 단일성으로 언어가 고착되기 이전의 지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전통 철학이 사용하는 개념들과 그에 의해 산출된 체계가 자립적이고 무한한 절대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는 데 반해, 일상 언어는 그것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세계의 자연적 사실들과 조건들에 의해 제약되고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철학은 결코 언어의 실제적 쓰임을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이 쓰임을 기술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그것을 정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철학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둔다. (PI, §124)

사용하는 언어는 서로 다르지만 戱論寂滅을 역설하는 용수도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철학관을 공유하고 있다. 용수의 글을 읽어 보자.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깨달음의 세계는 열반으로, 그에 대립되는 세계는 세간으로 구별되었다. 그러나 용수는 세간의 중요성을 긍정하여 열반이 세간 중에 있음을, 세간을 떠난 열반이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용수와 비트겐슈타인은 세간과 일상 언어를 극복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철학의 토대와 자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서로 대단히 근접해 있다. 세간과 일상 언어에서 생겨나는 문제들이 있다면, 그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해소하기 위한 첫걸음은 세간과 일상 언어를 초월한 형이상학적 이상세계와 이상 언어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간과 일상 언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6. 비어 있는 언어

공성은 존재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언어적 차원에도 적용되는 깨달음의 골자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공성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청년 시절의 저작에서도 발견된다.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이 해명으로 기여한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들을 통하여, 그것들을 딛고, 그것들을 넘어서서 올라갔을 때, 종국에 가서는 그것들이 넌센스임을 인지한다. (말하자면, 그는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내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때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TLP, 6.54)

여기서 말하는 ‘나의 명제들’은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표현하는 명제들이다. ‘그것들이 넌센스임을 인지한다.’는 것은 그 명제들이 의미를 결여하고 있음을, 즉 비어 있음을 뜻한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내던져 버려야’ 하듯이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말은, 이 명제들의 공성을 다시 비워야 함[空空]을 뜻한다. 이처럼 철학적 언어의 공성마저 비워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세계를 올바로 보게 된다.’

앞서 보았듯이 청년 비트겐슈타인은 사실을 그리는 요소명제에 대해서는 입장을 달리하였다. 요컨대, 요소명제는 비어 있지 않으며 서로가 상호 독립적인 확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락타투스󰡕 이후의 저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요소명제가 상호 독립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정하게 된다. 그러므로 “요소명제의 개념은 이제 그것이 과거에 지녔던 모든 중요성을 상실하였다.”(PR, p. 111) 그 대신 언어는 ‘언어와 그 언어에 얽힌 행위로 구성된 전체’(PI, §7)인 언어게임의 문맥하에서 고찰된다. 그래서 그는 요소명제와 그 지시체 사이의 대응관계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심을 던져 버리고, 실제 언어가 삶의 흐름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관찰할 것을 권고한다. 이는 그의 언어관이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을 이루었음을 뜻한다. 새로운 언어관은 언어와 세계를 각각 토막내는 원자론이 아니라 ‘삶의 흐름에서’(LW, §913) 언어의 전체적 의미를 살피는 전체론이다. 그래서 “하나의 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에 숙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PI, §199) 여기서의 기술은 언어를 적합하게 사용하는 기술, 언어게임을 올바로 행하는 기술을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전체론적 언어관에서 문장이나 명제는 문맥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의미는 삶의 흐름에, 언어게임의 문맥에 삼투되어 있기에 그 배경적 흐름과 문맥이 제거되었을 때 문장이나 명제의 의미도 사라진다. 용수의 언어를 빌면 문장이나 명제는 자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따라서 비어 있다. 명제가 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청년 시절의 생각은 언어의 실제 사용을 무시한 이상주의적 요청일 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가 실제의 언어를 정밀하게 검토하면 할수록 언어와 우리의 요구 사이의 갈등이 더욱 날카로워진다. (논리학의 투명한 순수성은, 물론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요구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갈등은 허용 범위를 넘게 되어 요구 조건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한다.­우리는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 조건은 이상적인 것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걸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걷고 싶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PI, §107)

실체화되고 이상화된 열반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역설한 용수는, 마찰이 제거된 이상주의적 얼음판에서 마찰로 가득찬 거친 땅으로 되돌아온 비트겐슈타인과 합류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그들의 비판자들에 의해 흔히 사유의 3원칙으로 알려진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을 부정하는 위험한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비트겐슈타인(PI, §§215~216)이 동일률을 넌센스라고 역설할 때, 그리고 용수가 존재를 긍정하는 명제와 부정하는 명제를 동시에 부정할 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사적 감각이 “어떤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PI, §304)라고 주장할 때, 실로 이들은 사유의 세 원칙을 조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판자들은 이 세 원칙이 부정될 경우, 어떠한 합리적 사유도 불가능하다고 우려할 것이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자신들이 옹호하는 사유의 3원칙이 명제의 자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위의 세 원칙은 각각 명제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관계를 맺는 각 명제들이 문맥 독립적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명제들이 서로 맺을 수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관계의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으로 허용(동일률, 배중률의 경우)되거나 금지(모순율의 경우)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가 사유의 3원칙을 비판할 때, 그들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들의 지적을 차례로 살펴보자.

(1) 비트겐슈타인(PI, §§215-216)은 동일률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넌센스라고 본다. 모든 존재자(혹은 명제)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의 존재자가 둘로 복사되어 서로 비교되는 경우, 혹은 존재자의 자리에 구멍이 패어 있고 존재자가 그 구멍에 꼭 들어맞는 경우를 상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동일률의 의미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자(혹은 명제)의 자성을 전제로 한 상상의 유희일 뿐이다. 상상의 유희로 말미암아 의미를 얻게 되는 동일률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무엇이 무엇과 같다, 동일하다는 말은 인간에 의한 비교의 작업을 전제로 한다. 비교라는 실천적 작업과 무관한 본질적 동일성, 원초적 동일성이란 성립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사변의 산물일 뿐이다.

(2) 배중률을 형성하는 두 선언지들로 체계의 전 영역이 포괄되며, 하나의 선언지가 부정됨으로써 다른 선언지가 긍정되는 체계에서 배중률은 성립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사람들은 배중률에서 확고한 어떤 것, 어떤 경우에도 회의에 빠져들지 않게 할 어떤 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한다.”(RFM V, §12) 제한된 경우에만 배중률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시도된 성급한 일반화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확신은 그릇된 것이다. “3과 4 사이의 정수는 소수이다.”라는 무의미한 명제와, “3과 4 사이의 정수는 소수가 아니다.”라는 무의미한 명제의 選接(disjunction)은 ‘3과 4 사이의 정수’라는 표현이 가리키는 바가 없기 때문에 올바른 쓰임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Murti, 1955, p. 147), 존재를 긍정하는 형이상학적 명제와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명제의 선접도 그것이 가리키는 바가 없기 때문에 올바른 쓰임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용수가 강조하려는 바이다.

(3) 일반적으로 ‘사적 감각은 어떤 것이 아니다.’, ‘사적 감각은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와 같이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문장이 동시에 주어진다면, 우리는 이들이 상호 모순된다는 사실 자체가 두 문장이 공존할 수 없는 징표가 된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이들 문장이 위치한 문맥과 그 문법이 완전히 이해된다면, 모순되어 보이는 두 문장은 상호 공존이 가능한, 의미 있는 주장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전환으로 말미암아 두 문장의 관계의 성격은 상호 양립 불가능한 모순의 관계에서 양립 가능한 공존의 관계로 재설정되는 것이다. 전환이 이루어진 경우, 두 문장은 우리가 사적 감각에 관한 언명으로 의미하는 바를 문법적으로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7. 우상의 황혼

철학자들은 삶과 세계를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작업을 짜기 위해 끊임없이 “…는 무엇인가?”라는 형식을 갖는 질문을 제시했고, 그 답안에 해당하는 개념을 또한 끊임없이 고안했다. “만물의 원질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은 예나 지금이나 철학이라는 담론의 골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철학적 질문의 예이고, 물(탈레스), 무한정자(아낙시만드로스), 수(피타고라스),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일자(파르메니데스), 이데아(플라톤), 형상(아리스토텔레스) 등등은 존재세계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대 희랍 철학자들이 제시한 답안의 예이다. 또한 아누(바이쉐쉬카), 쁘라끄리띠(상키야), 다르마(아비다르마) 등은 같은 질문에 대해 고대 인도 철학자들이 제시한 답안의 예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철학에서 되풀이되는 이러한 질문과 응답의 게임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있다. “…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필연적으로 “…는 X이다.”라는 형식을 띠게 되며, 이때 X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철학자들 저마다에 의해 새로 고안된 철학적 개념으로 채워진다.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그 X에 해당하는 사물화된 지시체를 천착하게 되며, 이로부터 그 지시체에 대한 형이상학이 그 근거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형이상학에 의해 질문에 답했으며 설명되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사실 언어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가해진 일방적 왜곡에 편승한 위험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시대에 통용되고 있는 과학적 사유방식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은, 그 사유방식이 각각의 불안에 대한 답변으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MS, 220, 92)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자면 과학의 뿌리는 형이상학이고, 불안은 인간의 실존에 내재한 철학적 계기이다. 그러나 과학적(혹은 합리적) 설명의 형태로 너무 쉽고 안이하게 답안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은 철학적 반성의 계기와 마주하지 못한 채 형이상학적 독단의 잠에 빠지게 된다. 요컨대, 과학적 사유로 가장한 형이상학적 설명이라는 지적 마취제가 우리의 반성의 몫을 영원히 대체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우리를 미혹에 빠뜨린 형이상학이 가한 언어의 왜곡을 바로잡음으로써 형이상학적 사유를 부정하려 한다. 그 핵심은 바로 사물화된 언어의 의미와 지시체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용수에 의해 공으로 표현된 이 해체는 그릇된 사유에 대한 치료의 의미를 지닐 뿐이지, 그로 말미암아 해체된 것의 반대가 긍정되고 사물화되는 것은 아니다. 용수를 주석하면서 짠드라끼르띠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마치 가게 주인이 “나는 당신에게 팔 물건이 아무것도 없소.”라고 말하자, 당신이 “좋소. 그렇다면 내게 그 아무것도 없는 것을 파시오.”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공은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비밀스런 내용으로 감춘 고유명사가 아니라 해체의 작용을 뜻하는 동사이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철학은 사물화된 우상의 파괴작업이다. 그 파괴작업이 우상의 부재라는 또 하나의 사물화된 우상을 정립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철학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상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가령 ‘우상의 부재’에서 새로운 우상을 창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MS, 213, 413)

우상의 존재와 부재가 동시에 해체됨으로써 애초에 제기되었던 문제도 해소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것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대답이다.

우리는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이 답해졌을 때도, 우리의 삶의 문제들은 전혀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라고 느낀다. 물론 그때는 더 이상 아무런 물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가 소멸됨에서 감지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의미가 분명해진 사람들이, 그 의미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를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TLP, 6.52-6.521)

삶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은 사람은 침묵한다. 그 깨달음의 골자를 용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모든 법이 적멸하고 모든 희론이 사라졌으며,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그 어떠한 법도 부처님에 의해 교시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비어 있음에 관한 자신의 명제를 다시 비워 냈듯이, 용수도 ‘그 어떠한 법도 부처님에 의해 교시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공의 언어를 비워 낸다.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포함하는 일체의 법과 희론이 적멸된 자리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비트겐슈타인과 용수는 그것을 침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결코 언어의 부정이 아니다. 침묵은 오히려 막혔던 언어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뚫어 주고, 왜곡되었던 언어의 길을 펴 주는 실천적 수행의 은유이다. 침묵하는 사람은 더 이상 “진리가 무엇인가?”, “실재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에게는 의지할 아무런 우상도, 입장도 없다. 그는 다만 언어의 길을 따라 흐르는 삶을 가로질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정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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